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시인선 84
김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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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시집이라고 한다. 앞서 시집 두 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가 독자들한테 어필했다고 해서 이왕 읽는 거 요즘에 나온 시집을 골라 읽었다. 유명 시인이 내 친구한테 얘기했고, 내 친구가 다시 나한테 옮긴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나이 먹으니 시가 써지지 않는다. 먹고는 살아야겠고, 시는 안 되고, 소설을 써볼까 궁리중이다.” 재작년 표절 시비로 시끄러운 와중에 국내 소설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 조정래가 신문에 기고하기를, 작품이 안 써질 때가 있는데 그때가 은퇴할 시기라고. 왜 이 말을 하느냐하면, 신작 시집이 전에 낸 책들보다 좋을 확률은 별로 없다는 걸 강조하기 위하여. 실제로 좋아하는 여류시인 가운데 나이 50 넘어가면서 확 글빨 혹은 시빨 (아, 어감 안 좋다. 그래도 욕하는 거 아니니까 참고 들어주시면 고맙겠다) 떨어지는 걸 확인한 적도 있다. 그 시인이 누구인지는 안 알려줌. 한때 워낙 좋아했던 시인이라서. 얘기가 또 삼천포 행인데, 왜 이런 이야기까지 나갔을까? 아하, 작가를 알기 위해 작가의 최근작을 읽어보는 일이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걸 잠시 잊었단 말을 하려고 했다가 애먼 곳에 까지 갔다. 앞에 써놓은 헛소리가 김민정의 경우에도 해당한다는 얘긴 절대 아니다. 시인 및 시인의 팬들께선 감안해주시라. 시인의 나이 딱 마흔이면 시인으론 그야말로 절정기라 할 만하니까. 어쨌거나 이 시집은 김민정이 2016년까지 쓴 시들을 모아놓은 것이니 최고 절정기의 시편들이 모여 있지 않을까 싶다.
 시인이 1976년 생. 그러면 딱 만으로 마흔. 불혹? 그건 저기 노나라 때 이야기고, 21세기 대한민국의 마흔은 “모든 죄가 다 어울”리는 나이,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법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1)리는 나이라서, 이젠 시인이 스스로 말했듯이 “날달걀에 비빈 밥을 더는 비려하지 않을 나이 마흔이면 / 모르긴 몰라도 똥 하나는 기차게 싸”는 시절을 만났다. “앙큼하고도 알뜰하여라 / 상큼하고도 살뜰하여라 / 하여간 처녀들이란,”이라고 노래(또는 질투)하면서 “그래 처녀들아 / 너희들은 오늘도 네 안의 그 귀여운 짐승들을 / 진동 호출벨 뒤에 슬쩍 잘도 감춰”놨다고,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은근히 나이 먹은 척을 한다. (<소서라 치자>) 신기한 것이 마흔이란 나이. 마흔이 되면 그 후 언제라도 이젠 세상을 다 아는 것 같은 (건방진)생각이 든다. 시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나이 마흔 먹은 사람의 권리이지 시인 잘못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디자인됐으니까. 근데 정작 마흔 살이 되니까 “이불집 간판을 빤히 올려다볼 때였다 /…/ 꽃자리를 왜 꽃자지로 읽었을까마는 / 찌른다고 해서 죄다 무기가 되는 게 아니란 걸 / 이미 알아버린” 나이라는 것도 알게 되더라는 말씀. (<시집 세계의 파편들>) 다분히 여성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는 마흔 살 먹은 시인의 눈에도 그게 꽃자지라면 찌른다고 해서 다 무기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지 내가 용케도 알아버린 건 / 운전석 유리창을 동시에 내리는 아저씨들이 / 있다 있어서였다 / 수컷은 그때 그 순간에 잘도 싸기 위해 뭔가 / 참아주는 의뭉함이 늘 있는 모양”인 것. 택시 운전수들을 통해 남자는 한 번의 사정을 위해 의뭉스레 위장한 도사림을 갖고 있는 짐승(수컷)인 것을 알아챈다. 유사이래, 저 멀리 고구려의 태조 “주몽도 공정하게 몽정을 했을 거니까 / 기사 아저씨 사타구니께 벅벅 긁는 소리에 / 잠시 귀를 빌려주기는 한다만 워 아주 적당히 / 1588-8910 그때 그 명함의 고딕체 / 다신 없을 것 같은 얽힘으로 곧음 그 믿음으로”(<오늘 하지>) 주몽과 몽정은 다분히 말장난이라 읽히지만 시인이 탄 택시의 기사새끼는 도로 옆에 우연히 같이 서게 된 택시 기사새끼와 창문을 내리고 욕설이 섞인 성적 농담을 걸쭉하게 쏟아낸 다음, 지금 승객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사타구니에 쑥 집어넣고 벅벅 긁어대고 있다. 이런 상태에 처한 여류시인은 자기가 부른 ‘주몽콜’의 전화번호가 고딕체로 씌어있는 명함을 손에 쥐고, 명함을 향한 허약한 믿음으로 순간을 견딘다. 제목 <오늘 하지>는 택시 기사가 시인더러, '오늘 나하고 한 번 하지?' 할 때의 하지가 아니다. 1년 24절기 가운데 낮의 길이가 가장 긴 성 요한 축일, 저 멀리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노래시합 하는 날이다. 시인은 절기 ‘하지’의 음가를 갖고 남성에 의한 일상적 폭력을 장난스레 폭로하고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게 택시 기사의 사타구니가 아니고 꽃자지면 절대 무기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 결국은 권력이 문제다. 밀폐된 택시 공간에선 기사 새끼가, 다른 열린 곳에선 ‘꽃자지’라고 얘기할 수 있는 중년 여류 시인이. 권력이 문제다, 사는 게 다 그렇듯.
 24절기는 이 시집의 중요한 줄기 가운데 하나다. 우수, 춘분, 곡우, 망종,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상강에 이어 동지까지 죽 나열되어 있다. 혹시 시인은 절기에 시 하나 씩을 써놓았지 않았을까? 1년에 24절기니까 보름에 시 한 편 쓰기를 특정 해의 목표로 삼고 있었을지 누가 아나. 그랬을 거 같은데, 아니면 말고. 앞에서 봤듯, 하지를 <오늘 하지>로 표기해서 누구나가 다 알 수 있는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일상적이고 폭력적인 성적 문제를 제기했듯이, 모든 절기에 다 수수께끼 하나씩을 숨겨놓았다고, 시집의 발문을 쓴 시인 이원이 주장하고 있다. 나도 이원의 글을 보고서야 알았는데, 곡우의 경우 <엊그제 곡우>라는 제목의 시를 잠깐 보자.


 

 엊그제 곡우



 4월 16일
 어디서 왔는지 모를 내 새끼가
 어딘지 모를 그곳으로 갔다
 …… 내가 침묵하는 거
 너 혹시 들었니? ……

 

 5월 6일
 우리 이모가 죽었는데
 너희 이모도 죽었구나 (중략)

 

 4월 16일
 네 생일인데 네가 없구나
 그리움을 드리움이라 썼다가
 유치해서 빡빡 지운다지만
 네가 없구나 얘야, (후략)

 

 

 이원의 발문을 읽고 나서야 곡우가 언제쯤인가 찾아봤다. 4월 20일 경이다. 그럼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있던 날과 5월 6일, 이모가 죽은 날 가운데 있다. 그 사이에 비가 내린다. 이 비가 ‘백곡을 기름지게 하는 비’가 내린다는 곡우穀雨에서 세월호에서 숨진 이들을 향한 울음 곡우哭雨로 바뀌는 중의를 띈다고 한다. 난 세월호 사건의 날자를 기억하지 못해 참 재미 없게 시를 읽었다. 시 감상하는 것도 힘든다. 이럴 때 각주를 달아 4월 16일의 의미를 알려주면 어디 덧나? 야박하게 말야.
 김민정의 이번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읽어보면 시들은 길고, 시어는 (발문에서 이원은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부인하지만)가끔 거칠고, 간혹 노골적이기도 하다. 올해 읽은 몇 권의 여류시인이 쓴 시집이 남자시인이 쓴 시집보다 이런 경향이 더 많아진 걸 보니 여자들이 세지긴 세졌다. 나를 비롯한 모든 남자들은 일단 긴장하시라. 함부로 까불지 말고. 손조심, 눈조심, 특별히 거기 조심 확실히 하고. 근데 이런 애국적인 장면도 등장해 나로 하여금 대한민국 여성들의 기개에 즐거이 박수치게 만들기도 한다.



 시집 세계의 파편들



 첫 장면
 중국 샤먼에서 시인 안치와 대담을 했다
 그녀는 나보다 일곱 살이 위였다.
 (중략)
 입 좀 풀자고 한 얘기였는데 그녀가 쌩을 깠다
 아무리 내가 병신 같은 년이라지만
 자존심이 아니라 애국심이 문제 같았다
 (중략)
 짠 년에 촌년에 센 년이 어떻게 중국어로 전해졌는지
 실력 좋은 통역이라더니 거침이 없었다
 (중략)
 자매애…… 함께 화장실을 가도 괜찮다는 사이라니까
 우리는 재래식 와변기마다 쪼그려않을 수 있었다
 고요 또 고요 연이은 고요
 어떤 망설임이 우리의 조준을 이토록 길게 끄는지
 앞서거니 뒤서다가 결국엔 너 터지고 나 섞이는 소리
 쏴―
 죽어도 오줌발로는 지고 싶지가 않았다
 3박 4일 동안 족히 서너 번쯤은 됐을 거다
 그녀는 모를, 나만 아는
 그녀와 나만의 오줌발 내기
 (후략)

 


 중국 전래 화장실 아시지? 칸막이 없이 그냥 변기 구멍만 줄지어 몇 개 뻥 뚫려 있는 거. 요새 시진핑 주석께서 이거 없애라고 지시를 때려 전국에 걸쳐 난리가 났다는 신문기사 못 보셨나, 하여간 거기 두 여인네가 엉덩이를 허옇게 까고 앉아 서로 묻어가려고, 그 우라질 놈의 소리를 좀 묻어가려고 참고 참아, 고요, 또 고요하다가 그냥 쏴― 해버리는데, 이왕 소리가 시작하니 거기서 지고 싶지 않은 대한민국 여성들의 기개. 아, 정말 대륙을 넘는 웅혼한 기상 아니냐.
 문제는, 당연히 진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문제라 전혀 심각하지 않겠지만, 이 시 <시집 세계의 파편들>의 경우 말고, 시집 전체를 볼 때, 단어 가지고 과하게 희롱을 하지 않았나 싶은 거다. 시인이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이 직업이긴 하지만 세상 어느 것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이 단어,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어쩔겨? 시집에 들어있는, 시인이 ‘선생님’이라고 칭하는 작가들, 박상륭, 구상, 이성복, 이성부, 이이들이 과연 말 가지고 장난을 치던가? 이렇게 말하면 시인은 “나더러 저 푸른 초원 위의 늘 푸른 소나무 같은 시”(<시의 한 연구>)를 쓰라고 말하는 겁지비? 라고 시비할 수 있겠지만, 글쎄,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저 푸른 초원 위의 늘 푸른 소나무 같은 시의 대척점에 말장난 가득한 시편들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뭐 아마추어의 아주 사적인 말이니 크게 신경 쓰지는 마시고.


 



1) 허연, <슬픈 빙하시대 2>에서 따옴.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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