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 문학동네 시인선 73
고영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영민? 이 사람이 누구? 해서 인터넷 검색해봤더니 프로야구 선수 고영민이 뜬다. 야구 선수 아래 작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시인 고영민. 1968년 서산 출생 기타 등등. 개인정보가 너무 세세하게 뜨는 거 아냐? 이 양반 생일까지 나오더만. 하여간 보니까 서른네 살에 등단시인이 되어 박재삼 문학상 받은 이력이 있으며, 시단에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거 같다. 이상해. 요새 읽는 남자 시인들이 대개 1960년대 충청남도 태생인 거다. 시집 한 권 살 때 이딴 거 다 알아보고 사는 인간이 아닌데 어째 그렇게 됐다. 남자 시인의 경우 신문기사를 가끔 검색해본다. 하도 성sex 관련 이야기가 분분해서. 이런 내가 싫지만 뭐 어쩌겠나. 그런 시인 아니더라도 읽을 시집은 넘쳐흐르는 걸. 이야기가 또 삼천포. 좌우간(난 이 단어 쓰면 좀 캥긴다. 좌우간. 왼쪽과 오른쪽 사이, 딱 그 중간에 뭐가 있기에 좌우간, 좌우지간, 어떤 사람들은 ‘좌우당간’ 이렇게들 얘기하는지. 모르긴 하나 뭔가 중요한 것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앞에서 읽었던 충남 출신 시인들의 공통점은 겁나게 사투리를 구사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인데, 고영민 이 사람의 시에서는 사투리가 등장하지 않고, 검색해보지 않았더라면 충남 출신인지도 몰랐을 지도 모른다. 난 문학작품에 사투리 자꾸 나오는 걸 반기거나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인종이 아니라서 고영민의 이 점에 대해서 흡족했다. 시, 소설에 사투리 좀 쓰지 말자. 우리나라 문학작품도 이제 세계문학을 지향해야 할 때. 번역한 서양 소설 읽을 때, 세계를 정복한 충청도 사투리 나오면 기겁을 하겠다. 들은 말에 의하면 서양 또는 일본 조폭들이 사투리 쓰는 걸 번역할 땐 경상도 사투리 나오다며?
 아, 그러나. 고영민의 시는 아쉽게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물론 여태까지 한 번도 빼지 않고 다 그랬지만 특히 이번엔 전적으로 내 기호 또는 취향에 입각해 시를 읽은 감상을 쓴다는 걸 분명하게 밝힌다. 이런 의미에서 고영민의 시들이 ②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말씀. 그가 쓴, 이 시집에 들어있는 시들의 품질이 처진다는 의미는 단연코, 조금도 없다.
 시집 한 권을 읽으면 (특별히 시인과 독자의 코드가 맞는 경우는 예외로 하고) 적어도 하나 혹은 두 편 정도의 시는 건질 수 있어야 하겠으나, 이 책의 경우(한국 사람들의 경우 적어도 삼 세 번은 얘기를 해야……) 나하고 도무지 그놈의 (드디어!) 코드가 맞지 아니하여, 대단히 불행하게 건진 시가 한 편도 없었다. 그건 아마 시집을 펼치고 읽은 첫 번째 시 <식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였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식 물



 코에 호스를 꽂은 채 누워 있는 사내는 자신을 반쯤 화분에 묻어놓았다 자꾸 잔뿌리가 돋는다 노모는 안타까운 듯 사내의 몸을 굴린다 구근처럼 누워 있는 사내는 왜 식물을 선택했을까 코에 연결된 긴 물관으로 음식물이 들어간다 이 봄이 지나면 저를 그냥 깊이 묻어주세요 사내는 소리쳤으나 노모는 알아듣지 못한다 뉴스를 보니 어떤 씨앗이 700년 만에 깨어났다는구나 노모는 혼자 중얼거리며 길어진 사내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준다 전기면도기로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레 흔들어본다 몇 날 며칠 병실 안을 넘겨다보던 목련이 진다 멀리 천변의 벚꽃도 진다 올봄 사내의 몸속으론 어떤 꽃이 와서 피었다 갔을까 병실 안으로 들어온 봄볕에 눈꺼풀이 무거워진 노모가 침상에 기댄 채 700년 된 씨앗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다



 시집을 읽어보면 시인 아버지가 세상을 뜬다. 그때 병원에 입원을 했을 것이고, 시인은 막내아들이니 당연히 아버지 문안을 갔을 것이고, 그때 이 병실 저 병실, 아니면 아버지 옆 병상에 젊은이 하나가 기관지를 절개해 이중 금속 튜브를 박아 숨도 쉬고, 금속 관 속으로 분홍색의 얇은 고무관을 또 삽입해 기계에 연결해서 고통스럽게 가래를 제거하고, 코에 호스를 꽂아 음식물을 섭취하고, 콘돔의 정액받이 부분을 잘라 링거 줄과 연결해 소변을 보고, 욕창이 생길까봐 늙은 어머니가 시간마다 왼쪽 오른쪽 똑바로 몸을 돌려놓았었나보다. 아픈, 죽어가는,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쁠 것이 없는, 조금만 더 지나면 가족 모두가 차라리 얼른 죽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할, 사내를 보고 시인은 과.감.하.게. 식물이라고 칭한 거다. 언필칭 식물인간을 염두에 두었겠지.
 이해한다.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한다.
 그런데 말이지.
 만 24년 동안 시인이 말한 ‘식물’을 화분에 담는 바람에 완전 풍비박산한 집구석의 일원이 이 시를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 거 같아? 이해하고 납득하지만 저절로 ‘닛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700년 만에 행여라도 씨앗이 싹을 틔울까봐 겁나는 심정을 시인은 알까? 이런 걸 “탱자 탱자 한다.”라고 칭하는 거다. 하필이면 이런 시를 시집의 제일 앞에다 떡하니 박아놨느냐고.
 처음부터 틀어진 시인과 나의 코드는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