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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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어느 날, 20년 전 미국 모처의 고만고만한 악동들이 다시 모여 당시를 회상한다. 악동이라 해봤자 대단한 악동도 아니고 그저 나무 위에 얼기설기 판자를 이용한 작은 아지트를 지어놓고 활기방약하게 뛰어놀던 보통의 소년들. 이들 역시 유년, 소년, 사춘기를 거쳐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예전 자신들을 빼다 박은 듯한 아이들을 거느리는 인생의 사이클을 순환하는 중이었으며 당연히 개중엔 정수리가 훤히 비기 시작한 이도 있고, 셋 중의 둘은 복부 비만에 따른 고혈압에 주의를 기울이는 중이며 오직 딱 한 명만 전과 같은 체격과 조금밖에 퇴화되지 않은 운동능력을 보유했으나 아내로부터 이혼을 통보받은 보통의 중년들로 성장 혹은 늙어갔다.
 20년 전, 아무런 방비도 되어있지 않은 이들에게 습격해온 사춘기의 혼동과 정체모를 욕정과 갈증은 쉴 새 없이 눈알을 두리번거리며 실체 없는 여성들에 관한 호기심을 충동질 했으며, 이 와중에 하필이면 동네에서, 심지어 카운티에서 가장 예쁜 다섯 자매가 살고 있던 리즈번 가家로 온 눈길을 포함한 모든 더듬이를 곤두세우게 만든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1970년대. 미국의 주부들은 출산 후 아기에게 모유 대신 분유를 물에 타 먹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도대체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을 수 없을 테니. 보시라, 아래부터 13세 서실리아, 14세 럭스, 15세 보니, 16세 메리, 17세 터리즈. 연년생으로 줄줄이 아이를 생산할 수 있던 계급은 중세 유럽의 귀족 혹은 부르주아 외엔 없었다. 낳자마자 초유부터 생략하고 고용한 유모로 하여금 아이의 수유를 담당하게 만든 여인들은 곧바로 임신이 가능했었고, 그렇지 못한 일반 계급의 여성은 수유를 포함한 육아기간 동안은 임신을 하지 못해 약 삼년 터울로 자녀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20세기 들어와 인간의 젖 대신 소젖으로 대신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게 되자 그냥 1년에 하나씩 생산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그래도 그렇지 연년생으로 다섯은 좀 심했다. 더 심한 건, 다섯 자매들이 하나같이 빼어나게 예쁘다는 거. 물론 그 중에서 굳이 제일 예쁜 아가씨를 고르자면 네 번째 럭스를 꼽겠지만 비슷한 옷을 입혀놓으면 전부 다 비슷하게 예뻐서 사춘기에 접어든 사내아이들 눈에는 누가 누군지 무구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니 참 이정도면 만족스런 딸 농사라 할 수 있겠다.
 곤혹스런 사춘기 시절 소년 친구들 가운데 폴 발디노라고 있었다. 이태리 출신 고급 마피아를 아버지 및 친척으로 둔 아이라, 이 집 구성원 가운데 남성 어른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적대적 타他 마피아 집단(이를테면 양은이파나 칠성파 같은)에 의한 살해 또는 공격의 위협을 감당하며 살아야하는 운명을 견디고 있었다. 드디어 어느 날, 집안에 거창한 비상 탈출구를 건설해 지하 관을 통해 운하로 빠지는 대피로를 완성시켰는데, 신작로 닦아 놓으면 원래 문둥이가 제일 먼저 걸어가는 법, 폴 발디노가 새로 취미를 붙였으니 지하 대피로 탐험. 이를 통해 폴은 자기가 원하는 동네 어떤 집이라도 하수도를 통해 침입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대가로 온몸에서 지독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끊임없이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걸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수학교사를 하던 리즈번 씨를 도와준 걸 고맙게 생각해 식사초대를 받은 피터가 일찍이 다섯 자매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자매들 전용 화장실을 사용할 기회가 있어 무수한 여성용품과 그것들의 사용흔적을 발견했고, 여기다 소년들 특유의 과장까지 ‘위대한 경험담’에다 마구 섞는 바람에 자존심이 상한 우리의 폴 발디노는 소년들에게 자기는 자매들이 샤워하는 장면을 보고야 말겠다고, 그 광경을 빠짐없이 너희들에게 다 말해주겠다고 큰소리 뻥뻥 친 다음, 예의 하수구를 통해 리즈번 씨 집에 잠입했던 것이다. 가는 길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텅 빈 리즈번 씨네 집. 1층 탐색을 끝내고 2층에 오른 폴, 원래 출신이 마피아 대부네 가정인지라 보통 아이들 보다는 통이 훨씬 큰 그는 이제쯤 거침없이 방마다 벌컥벌컥 열어젖히기 시작했고, 소녀 또는 처녀들 방이 생각보다 단정하지 못해, 침대 위엔 뭔지 모르지만 하여간 색깔 든 오물이 조금 묻은 흰색 면 팬티가 널부러져 있었고, 십자고상엔 브래지어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 피터의 허풍이 생각나 목욕탕 문을 왈칵 열어젖힌 순간, 뿌옇게 김 서린 욕조 안엔 마치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것처럼 완전한 알몸의 막내딸 서실리아가 뜨끈한 목욕물에 잠긴 채 양 팔의 혈관으로 붉은 피를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우리의 소년 영웅 폴,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을 잘 받아 피 또는 피를 흘리는 광경에 관한 한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마피아 혈통의 소년은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해, 서실리아가 변기에 앉아 아빠 리즈번 씨의 면도칼을 이용해 정맥인지 동맥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양 팔의 혈관을 절단한 다음, 면도칼은 변기에 버리고 자신은 더운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앉은 상황인 것을 파악하고, 가문의 가르침에 따라 침착하게 911에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처녀가 자살에 성공했냐고? 아니다. 구급차가 조용한 마을에 사이렌을 요란하게 불며 도착하더니 키 작고 똥똥한 구급대원 한 명과 기 크고 비쩍 마른 대원 한 명, 이렇게 두 명이 서실리아와 리즈번 여사를 태워 병원에 도착해 말 그대로 ‘구급’하는데 성공한다. 정신병리학자의 열성적인 노력과 분석에 따라 서실리아의 사회성 개발을 위해, 아이가 퇴원한 다음 소년들을 초대해 리즈번 가정 최초로 파티가 열린다. 여태껏 파티라고 하면 엄마 아빠가 1박 2일 또는 며칠을 기한으로 집을 비운 아이네 집으로 쳐들어가 가라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구해온 독한 술을 밤새 마시며 최대 음량 비슷하게 로큰롤을 틀어놓고 쉼없이 몸을 흔들고, 소파에서 트렘폴린을 하고, 어질어질한 머리통을 흔들면서 화장실까지 억지로 기어가 밤새도록 토한 다음 또 다시 술을 마시고, 이렇게 밤을 새는 거 말고는 전혀 지식이 없던 소년들이 이리하여 깔끔한 일요일 옷을 입은 채로 수학교사 리즈번 씨와, 수학교사보다 훨씬 더 엄정한 리즈번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즈번 부인이 국자로 떠주는 펀치를 마시며 다섯 아가씨와 별로 재미있지 않은 얘기를 하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익숙하지 않은 파티 분위기에 서먹서먹한 시간이 지나가던 어느 순간, 자신을 위한 파티임에도 불구하고 막내딸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문제아인 서실리아가 엄마한테 자기 먼저 올라가 자겠다고 눈에 힘을 주고 주장한다.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니까 억지로 붙들어 매지 못한다는 걸, 원래대로라면 귀싸대기라도 때려 입 닫고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동네 꼬마들이 다 모여있는 관계로 엄숙하기 그지없는 리즈번 부인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하여, 막내딸이자 사실상 오늘의 주인공 서실리아는 먼저 2층 침실로 올라가는데, 이제부터 집중하시라. 5분 쯤 후, 물리학적 법칙에 의하면 1초에 9.8미터가 떨어지는 건 진공상태에서 쇠공이나 사람의 몸이나 다 똑같다. 중력가속도 초당 9.8미터. 그리고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1초에 9.8미터, 2초면 약 40미터. 이런 속도로 뭔가가 휙, 허공을 나는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그러나 푹 떨어지는 소리. 땅바닥에 쿵,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뭘 팽개치는 것도 아니고 약간 둔탁한 기분 안 좋은 느낌이 드는 진동이, 정식 파티 장소인 지하실에까지 도달했다. 제일 먼저 이걸 느끼고 뛰어 올라간 사람은 리즈번 씨. 나머지 사람들, 리즈번 여사와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독하게 건전한 파티를 즐겨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자리를 지키던 동네 청소년들과 네 명의 자매들이 지상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덤불을 젖혀보니, 거기엔, 쇠로 만든 울타리의 창살모양 뾰족한 세로 골격에 가슴이 관통당해 꽂혀있는 서실리아와, 아이의 머리와 골반 부분을 두 팔로 안고 어떻게 해서라도 쇠울타리에서 서실리아를 빼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리즈번 선생, 마치 빼내기라도 하면 서실리아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2층 방으로 총총거리며 뛰어올라갈 것 같기라도 하는 듯했다.
 이렇게 해서 리즈번 가의 첫 번째로 자살하는 처녀가 탄생하는 것.
 책은 이후 나머지 네 명의 처녀가 자살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언제 어디서 이들이 자살을 시도하고 성공하는지는 당연히 가르쳐드릴 수 없다. 비록 이 책이 지금 품절 상태이지만 올해 노벨상 받은 가시오 오가피 이시구로의 책이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판매하고 있는 덕분에 조만간에 다시 발매할지도 몰라 지금은 입 닫고 있는 것이 스포일러를 예방하는 일이겠다. 책의 거의 앞부분에 서실리아의 죽음과정이 나오며, 아예 처음부터 다섯 자매 몽땅 자살에 이른다는 걸 전제로 깔고, 20년 전 동네 소년들이 당시 관련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여기까지가 내가 먼저 책을 읽어본 입장에서 얘기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다. 아주 예외적으로 오늘 독후감은 거의 전부 스토리에 집중해서 썼는데, 내가 이런 종류의 자살은 많이 불편해하는 성격이라서 그랬다. 그나마 작가 유제니디스가 그리 무겁지 않은 필체로, 어떤 경우엔 웃음까지 픽, 흘릴 정도로 책을 썼기 망정이지 이런 종류의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 절망, 감상 뭐 이런 모드로 썼다면 아마 백 쪽도 읽지 못하고 그냥 던져버렸을 것이다.
 다섯 영혼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송신했던,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었던 모스 부호, 도와줘. 혹은 SOS. 그걸 발견하거나 수신하지 못했던 20년 전의 소년들. 또는 모든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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