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인랜드 창비세계문학 49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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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4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거 읽는데 꼬박 3일 걸렸다. ‘읽어내느라’ 고생이 자심했다. 토머스 핀천이 나하고 궁합이 좀 덜 맞는 거 같다. 지금 책방에서 팔고 있는 번역본은 다 읽었는데 한 편도 수월하게 읽히지가 않았다. 내가 미국인이 아닌 것이 제일 중요한 이유고, 그러고 보니 하필이면 핀천을 읽을 때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핀천의 책은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을 해야 문장과 문장이 엮이면서 만드는 교묘한 연결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 내가 미국인이면 모를까.) 물론 그렇다고 다른 책 읽을 땐 집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바인랜드>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로 생각할 수 있는 한 카운티의 이름이다. 산과 깊은 골짜기가 있어 대마를 키우기 위한 미국 내 최고의 장소. 근데, 시점이 1960년대와 1980년대가 사정없이 왔다갔다, 무수한 알파벳 약자, 핀천의 특기인 없는 단어 새로 만들기, 재즈, 블루스, 컨츄리 등 대중음악부터 각 시대별 코미디 프로그램 및 영화제목, 배우 이름, TV 드라마와 등장인물, 연기자 이름 이런 것들이 각 시대별로 마구 쏟아져, 내 입장에선 TV를 보기 시작한 것이 1965년부터인데, 당시 주로 미국 드라마를 싸게 수입해 와 방송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거의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다. <타잔>, <말괄량이 루씨>, <내 아내는 요술쟁이> 이런 것들은 알아듣겠는데, 루씨와 요술쟁이를 연기하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알겠으며, 하물며 루씨와 요술쟁이의 남편 이름과 배우 이름은? 찰리 파커와 마일스 데이비스부터 시작해서 비지스 사이의 시간/연도/시대별 히트작품과 가수들은 또 어떻고. 이렇다보니 613쪽에 나오는 마지막 각주의 번호가 393이다. 각주라는 것이, 책을 읽다가 내용 모르는 단어 또는 인명 또는 노래 제목 또는 노래가사 또는 드라마 이름 또는 배우 또는 역할 이런 게 나오면 그냥 대강 넘어가도 아무 문제없는 걸 번히 알면서도 그것들 위에 작은 번호가 쓰여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각주를 한 번 읽어보지 않을 수 없는 거, 그 순간 책 읽는 리듬이 홀랑 잃어버려 같은 문장, 심하면 앞 문장, 더 심하면 문단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악순환, 이해하시지? 대부분의 각주라는 건 사실 읽어봐야 오래 기억도 하지 못하고, 가끔은 정확하지도 않아 읽으나마나 하다는 게 내 주장이라서, 난 차라리 책 뒤에 따로 후추後註가 있어, 읽다가 정말 궁금해 돌아가시겠는 것들만 찾아볼 수 있는 편을 좋아한다. 처음엔 각주가 훨씬 좋았는데 책 좀 읽다보니 그것도 변하더라. 하여간 그리하여 토, 일요일 아침부터 현관문 밖에 한 발자국도 찍지 않고 하루 종일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200쪽 간신히 넘기기 바빴다. 물론 오후 7시 이후엔 책 안 읽었다. 내 좌우명, 다들 아시지? 진로眞露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게다가 요새 방어, 굴, 홍합, 꼬막 등등 맛난 게 지천이란 말씀이지. 어떻게 해 진 다음에도 책 따윌 읽을 수 있으리오.
 자, 위에서 난 미국문화를 전혀 모르는 아시아인이라서 읽기 힘든 거에 관해서 얘기했는데, 또 있다. 핀천의 글쓰기가 너무 자유로워, 심지어 생과 사를 가를 정도라는 것. “타나토이드”라고 처음 들어보시리라 짐작한다. 그게 뭐냐 하면, 굳이 우리말로 펼쳐 설명해서, 업보, 살면서 “선악과 행업으로 말미암음 과보果報”, 라고 네이버 사전에 나오거니와, 주로 악행 같은 것을 저지른 인간(그 인간이 살았건 죽었건 간에)한테 남아 있는 갚아야 하는 (에이 씨, 이담에 뭐라 해야 해!) 하여간 그거, 이해하시리라 믿고 넘어가거니와, 바로 그 업보를 정산해야 하는 살았거나 이미 죽은 집단을 말한다. ‘집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단어의 짧음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죽은 이들도 등장한다는 말씀. 쉬운 얘기로 유령까지 뻔뻔스럽게 마치 산 사람처럼 나와서 같이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할 짓 다 하는데, 물론 육체적 교접은 하지 못하지만, 산 사람도 포함해 죽은 이들까지 모두를 일컫는 타나토이드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디엘DL’이란 백인 아가씨가 깡패 같은 아빠를 따라 일본에 살 때 무사武士가 아닌 자객刺客, 즉 닌자 수업을 제대로 받아 백인 여자 닌자가 되어 초절정 고수로부터 수업을 받는다. 이 닌자 수업을 통해 생과 사를 넘나들고, 바로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특정인으로부터만 사라지게 만들고,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면 찔린 사람은 시름시름 앓다가 1년 후에나 죽게 되어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게 자연사인 것처럼 위장이 가능하며, 기타등등 기타등등. 아울러 21세기에나 <007>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기막힌 발명품도 나온다. 한 번 읽어보시라.
 “쌘타로자의 제로 프로파일 페인트 앤드 보디에서 일하는 마누엘과 그의 자동차 도금팀이 개발한, 굴절률을 변조할 수 있는 특허 미세 투명 래커 덕택에 그들이 탄 트랜스암은 설사 도로 감시가 있었다 하더라도 가장자리가 살짝 번뜩이는 것 빼고는 감쪽같이 눈에 안 보였을 정도였다.” (313 쪽)
 이거? 투명 자동차. 007 시리즈에서 얼음 쌓인 동네에 BMW가 투명인 채로 다니는 거 보셨잖아. 그게 벌써 여기서 나온다. 이거 뭥미? 이게 핀천의 상상력인지 아니면 장난기인지 그것도 아니면 두뇌에 약간의 이상작용에서 비롯한 것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어떻게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느냐고.
 책에 관해 말하자면, 핀천 본인이 1937년생. 소설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시간적 공간이 1967년가량. 말 힘들게 한다. “소설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시간적 공간”, 용서하시라. 달리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서. 1967년이면 미국 역사상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 비록 베트남 전쟁에 쓸데없이 끼어들어가 엉뚱하게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반전운동과 동시에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다 합해 좌파운동의 극점을 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화와 자유섹스, 마약, 해피스모크 등, 인류역사상 가장 놀기 좋았던 시기를 딱 그 당시에 접한 토머스 핀천. 당시 자유를 구가하던 세대가 20년이 흘러 닉슨을 지나 레이건 시대를 당하니, 이건, 책에서 핀천이 직접 이렇게 말했는데, 파시즘이 새로이 미국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업종을 불문하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노동운동, 가운데서 가벼운 파업 같은 것마저도 사정없이 패 죽이는 달콤 살벌한 시기. 실제로 1980년대와 90년대 초기까지 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대처노믹스로 대표하는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으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해, 미국에서는 공항 및 관제탑 파업에 대해 대통령 레이건은 파업권보다 국민의 편의를 위한 공익성이 우선한다고 주장하면서 강제로 파업을 깨부수며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까지 청구하는 소송에서 이겨버렸고,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강성노조에 의한 탄광노조의 파업을 단칼에 쪼개버리고 만다.
 영화산업에 종사하면서 파업을 벌여 쌍코피가 줄줄 흐른 주인공 가족의 가장이자, 늙은 히피에다가 (정말 이런 것이 있는지 아니면 핀천의 농담인지 모르겠지만)정신이상자에게 주는 연금으로 노동하지 않고 평생 놀고먹는 대신 전처와 완전한 단절을 요구받은 대마초 애연가 조이드 휠러 씨와 이이를 둘러싼 많은 친구들, 히피 친구, 마약 중독자 친구, 영화계 친구, 밴드 친구들과, 20년이 지나 80년대가 되어 이제 성인이 된 딸 프레리와 이 아이의 젊은 친구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DL을 비롯한 타나토이드들에 의하여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난장판에 대해서는 614쪽에 이르는 길고 긴 소설책을 진짜로 읽어보실 여러분들을 위해 온전하게 남겨놓겠다. 사실 벌써 책의 내용에 관해선 거의 다 지껄여놓고 이렇게 아닌 척하는 것도 먼저 읽은 사람의 권리요, 당연한 잘난 척이며, 즐길 수 있는 재미, 아니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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