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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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눈먼 암살자>를 재미나게 읽어 애트우드의 다른 책을 찾아 읽은 것이 바로 <시녀 이야기>. <눈먼…>에서 애트우드는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힘과 재력을 포함한 가정 내 모든 권력을 쥔 남성에 의한 행해진 성폭력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번에 읽은 <시녀 이야기>는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발발한 길리아드 내전, 대통령 즉위식을 기해 군부에 의하여 벌어진 집권층 학살과 이어진 쿠데타 및 오랜 독재와 경찰국가 체제를 가정한 의사 역사소설이다.
 길리아드는 미합중국 해체 후 북아메리카 동쪽에 자리 잡은 나라. 이 국가에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에필로그를 대신하는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란 글에서, “길리어드에는 진정으로 독창적이거나 토착적인 것은 없”고 “그들의 탁월함(주: 지금은 이 단어를 ‘탁월성’보다는 ‘특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합성>에서 발휘”된다고 작가 스스로 얘기했듯이(514쪽), 인류 역사상 안 좋은 쪽으로 모범이 된 몇 개의 정부를 샘플로 만들어냈을 것이다. 길리어드 수뇌부가 정권을 잡은 다음에 정통 프로테스탄이 아닌, 가톨릭과 침례교를 포함한 모든 이교도를 탄압하여 길리아드는 바야흐로 내전상태에 처해있고, 유대인들에겐 민영화한 운송회사를 이용하여 즉시 길리어드를 떠나게 함으로서 보트 피플로 밀려난 유대인을 과밀하게 싣고 가던 여객선 한 척은 대서양에서 침몰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모든 윤리규범은 교조적 기독교 경전에 맞게 시행되어야하므로 국민들은 자신의 재산과 인격과 지위에 따라 적절한 계급으로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 남자들에겐 사령관, 수호자, 천사, 눈 등의 호칭이 붙어 지휘자, 군인, 스파이 등의 직업이 주어지고, 여자들은 아내, 아주머니, 하녀, 시녀 등의 계급으로 구별한다. 여자들은 모든 사회활동을 금하며 오직 후대를 생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때맞춰 무능한 길리아드 정권은 환경파괴물질을 과감하게 투기하는 동시에, 방사능과 핵폐기물 등 인류에게 최악의 상태를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악을 모든 방법으로 완벽하게 배출하여 아메리카를 접한 대서양 인근에 서식하는 어종의 씨를 말리는 상태까지 도달했다.
 이제 ‘시녀’가 어떤 계급인지 설명을 해야겠다. 우리말로 ‘씨받이’. 최고위 계급인 ‘아내’는 당연히 남편의 지위에 의하여 자리를 점하게 되는데, 아내가 직접 출산을 할 수도 있고, 출산의 번거로움과 고통을 다른 여인에게 대신 맡기고 자신은 낳은 아이만 취함으로 자녀를 얻을 수 있는데, 이때 아이를 낳아주는 여자를 ‘시녀handmaid'라고 했다. 아이를 낳고, 한 한 달가량 모유를 먹인 다음에 아이의 양부모에게 꾸벅 절을 하면 곧바로 다음 가정으로 떠나야 한다. 거기서 또 임신, 출산, 수유. 즉, 아이 낳는 기계, 다리 달린 자궁 정도의 위치다. 이들은 국가권력과 현 체제에 안주하는 시민들, 예컨대 아내, 아주머니, 하녀 등에 의하여 철저하게 감시당하는 삶을 산다. 남이 알아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대화도 할 수 없으며, 조금의 사생활도 보장받지 못하고, 언제든지 비관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집단 구성원으로 늘 감시 받는 것은 물론이고, 어떠한 계급 이탈의 기도도 가혹하게 처벌 받는다. 그런데,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이 시녀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시하는 계급으로 누굴 꼽았는가 하면, 시녀를 둘 수 있는 지배층에서 봉사하는 아주머니 계급. 즉 수석 하녀를 꼽았다. 탁월한 선택. 동서고금을 통해 알 수 있듯, 가장 가혹하게 탄압을 받는 계급을 가장 효과적으로 조종했던 건 동족 중 바로 위 계급이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반장이 그랬고, 일본 식민지 조선에서 순사들이 그랬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것들 가운데 특히 씨받이, 시녀들에 초점을 맞춰 글을 썼을 뿐이지 진짜로 얘기하고 싶었던 건 가혹한 권력이 어떻게까지 비인간화할 수 있을까, 하는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었다. 씨받이 이야기이니 당연히 유사이래가 아니라 직립보행하기 전부터 특히 덩치와 완력으로 우위에 있던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폭력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정도로 생각하면서. 남성인간에 의해 지속된 유구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20세기와 21세기 와서 겨우 몇 십 년 조금 반성하는 시늉하면서 이제 서로 동등하다거니, 그건 그거고 이제부터 서로 잘 살자느니 어떻거니 함부로 얘기하려는 생각 없다. 하여간 나는 이 소설을 처음부터 한 독재 또는 통제체제에 의한 인간의 말살로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230쪽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남자라면, 그리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다면, 제발 명심해 달라.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정말이지 그런 충동은 참으로 거역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권력이며, 용서를 유보하거나 베푸는 일 또한 일종의 권력이다. 아마 그만큼 커다란 권력은 없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자는 남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란 말. 뒤에 용서를 구하는 것도, 용서를 하는 것도 다 권력이란 얘기는 도무지 무슨 주장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거릿 애트우드가 처음부터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구속, 억압, 폭력을 주제로 이 소설을 쓰기로 이렇게 작정을 했었는지는, 아주 몰랐던 건 아니고, 설마 이런 거대 서사에 피해자로 인구의 절반만 해당하게 구상했겠나 싶었던 거다. 이제 실토하자. 독후감 제일 앞자리에 이이가 쓴 <눈먼 암살자>의 대강의 내용을 두었던 건 <시녀 이야기> 역시 근본적으로 <눈먼 암살자>와 같은 부류로 읽어야 함을 비치기 위해서였다.

 비록 작가가 설정한 정치적 음모. 대통령과 요인 암살, (198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벌어진)군부 쿠데타, 기독교 원리주의와 유대인 추방, 학살 수준의 형벌과 특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 이런 것들이 지난 시절 히틀러 등의 파시스트와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독재정권,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행태를 종합한 것이고, 그도 모자라 온갖 형태의 자연파괴, 방사능 유출, 아메리카의 지역적 몰락 등, 작가 스스로 주장한 대로, 길리아드 국國을 만들기 위한 뛰어난 “합성”의 결과인데, 이 모든 합성은 결국 여성주의 소설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길리아드에서 여성은 항상 남성으로부터 상상도 할 수 없는 탄압을 받아왔는데, 이 장면에서도 애트우드는 놀라운 인류학적 힌트를 던져 넣는다. 반정부 활동을 한 남자를 체포, 고문한 다음, 거의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서, 이 남자를 여자들한테 던져준다. 쉬운 얘기로 공개처형에 처하는 것. 처형은 자리에 모인 여성들 마음대로 행한다. 난 이 장면이 대단히 흥미롭게, 500쪽이 넘는 잘 쓴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 행동, 이마를 탁, 치면서 읽었다. 이를 ‘참여처형’이라고 한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쓴 위대한 인류학 서적 <황금가지>를 떠오르게 하는 기막힌 번뜩임. 그러나 인류학적으론 자연스럽지만 인간적으로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행사이자 축제.
 참여처형은 이른바 ‘구제驅除’ 행사의 뒤풀이로 나온다. ‘구제’라는 거 자체가 공개처형이다. 책에선 세 명의 여자, 두 명의 시녀와 한 명의 아내의 얼굴에 흰 보자기를 씌우고 목에 밧줄을 맨 다음 딛고 선 나무 단을 걷어 차버리는 거. 이게 단줄 아시지? 서양의 교수형에선 한 공정이 더 있다. 페터 바이스의 명작 <저항의 미학>에서도 나온다. 목을 매단 사형수의 다리에 집행인이 매달리는 거. 그럼 목뼈부터 척추 등 관절이 우드득 소리를 내면서 탈골되어 보다 빨리 죽일 수 있단다(우드득, 탈골되는 소리가 이 책에 나오진 않는다). 이런 장면을 보며 흥분한 여성들, 그들이 상당한, 극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자신들도 조그만 잘못만 해도 이렇게 목매달려 죽을 게 번하니까. 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평소 자신들을 핍박해온 남성 하나를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일, 그걸 집권자들이 생각해내고 시행하는 걸, 난 이걸 생각도 못했던 거였다. 애트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희생양들은 역사상 어느 시기에나 유용했습니다. 평상시 극도로 엄격하게 통제받고 있는 이들 <시녀>에게도 가끔씩 맨손으로 남자를 찢어죽이는 일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게 분명합니다. 이 행사가 어찌나 인기를 얻고 활용도가 컸는지 중반기에는 정규적으로 시행되어 1년에 네 번씩 동지, 하지, 춘분, 추분에 시행되었습니다. 고대 대지의 여신에게 바치는 다산제의 흔적을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515쪽)

 

 어떻든, 난 애트우드가 이 거대서사를 여성주의 문학을 위해 사용한 것에 조금도 반대하지 않고 반대할 수도 없으며 반대할 이유도 없다.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것이지 그게 옳고 그르고 따지는 건 독자가 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이 소설에 대해 느끼는 것은, 이미 있어왔던 사실이나, 현재 상황으로 미루어 가능한 문학적 실제를 제시하고 그 안에서 여성주의 소설을 써도 괜찮을 텐데(마치 <눈먼 암살자>처럼. 얼마나 잘 쓴 여성주의 소설인가), 있지도 않은 디스토피아의 미래, 2045년 이전의 어느 시대 북아메리카에 가능하지 않은 길리아드 국가를 건설해 굳이 또다시 여성을 생식기계 상태로 만들어서,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고 주장해야 했는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가상 역사라면 원조 여성주의 문학이라고 일컫는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이 훨씬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전에 여성주의 소설에 관해 비슷한 독후감 썼다가 코피난 적 있다. 자주 얘기했듯이 난 논쟁을 싫어한다. 혹시 생각이 다른 분 계시면 미리 말씀드린다.
 당신 의견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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