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야기 끝에 이젠 너무 자주 입끝에 올라 식상한 주제, 무인도에 가면 어떤 책? 이 이야기가 나왔다. 아이고……. 진짜 아무 생각 안 났다. 그리하여 책 대신에 가스 라이터, 코펠, 칼, 3인용 텐트와 (낚시대 말고) 통발. 이렇게 다섯 개 골랐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인도 운운이, 내가 평생을 두고 읽는다면 어떤 책을 선택하겠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고, 그게 또 멋을 좀 부리느라 만일 내가 자유로운 독서가 가능한 정치범 또는 사상범으로 교도소에 간다면 어떤 책을 가져가겠는가, 라고 바꿔봤다. 그러니 교도소 운운도 소위 "필생의 책"을 선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제 마침 하던 일이 일찍 끝나 한 번 골라봤다. 다섯 개를 고른다는 전제로 시작했다.
1. 소포클레스, 천병희 역, <소포클레스 비극전집>
누가 20세기에 그리스 비극을 읽어! 일갈을 하고 절대 나한텐 그리스 비극을 읽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건 내 장담대로 이루어졌다. 20세기에 난 그리스 비극은 절대 읽지 않았으니까. 세월이 흘러흘러 21세기가 되고,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외디페>를 보고 듣고, 어느새 내 책상엔 <소포클레스 비극전집>이 올라와 있었다.
하루키가 나에게 가르쳐준 거의 유일한 가르침은 <노르웨이의 숲>에서 말하기를, "30년 이상 된 책을 읽어. 그건 이미 검증이 끝났다는 얘기야."란 대사.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30년 씩 100번을 더 지나 완벽하게 검증이 끝난 위대한 작품. 시대를 초월한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비극적 절망과 종말은 독자의 심장을 저며 놓는다.
진정으로 불쌍한 인류는 소포클레스를 읽지 않고 생을 마감하는 자들이다.
2. 베르길리우스, 천병희 역, <아이네이스>
목마를 타고 침공한 그리스 군대에 의하여 완벽하게 괴멸된 트로이. 카산드라의 정확하지만 공허한 예언은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고 스스로 멸망한 가운데 장군 아이네이스는 늙은 아버지를 업고 불타는 트로이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약속의 땅 로마를 찾아 긴 항해에 나선다.
영웅과 사랑의 서사. 서양 문학을 알기 위한 기초 텍스트가 아니라 정말로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답고 영웅적인 개척자 이야기.
3. 황순원 전집
위 책들. 모두 11권 가운데 열 권만. 11번째 전집은 황선생의 시들을 모아놓은 거다.
조선어로 글을 쓸 수 없는 시절이 닥치자, 교사 직을 내려놓고 낙향해 침묵 속에 굳건하게 조선어로만 소설을 썼던 대나무 같은 이. 오직 작품으로만 말을 남긴 세계문학의 위대한 교사. 언어는 선생에게 종교였을 것이다. 개별 작품에 대한 호오는 다음으로 하고 시절을 뚫고 당대의 서정을 간결하게 품은 글의 만찬을, 교도소 안에서라면 만찬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4. 김수영 전집 1.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만, 김수영과 신경림으로 나는 시를 알았다.
비록 이이가 혁명도 못하고 울화가 돋아 수유리 집구석의 방만 바꿔버리는 양계장 주인이었을망정, 그리하여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을 망정, 전후 폐허 속에서 진정한 선비였음이 그의 시 속에 온통 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5. 최명희, <혼불>
우리나라 소설문학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
* 이것들 말고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최인훈 전집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