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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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드라마는 읽지 않으려고 했다. 프랑코 알파노가 작곡한 오페라 <베르주라크의 시라노 Cyrano de Bergerac>가 충분히 재미있었고 그 정도의 대본이라면 더 이상 재미있는 극작이 거의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근데 역시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읽으면서 마지막 1/4 부분은 온통 <시라노>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를 해놓아 이건 분명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원작 안에 있다, 라고 판단했다. 그래 정말로 읽어보니 그랬다. 있었다.
 오페라 대본을 쓴 앙리 캐Henri Cain는 확실히 원작의 핵심 부분을 정확하게 포착, 축약하여 대본을 만들었으나, 무대에서 관현악 음악을 배경으로 노래해야 하는 전달 상 시간의 한계로 인해 디테일을 몽땅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뭐 <시라노>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오페라 대본이 마찬가지기는 하다. 근데, 오페라를 충분히 만족하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본의 원본인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을 읽어보니,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이 작품은 반드시 원본도 읽어봐야 한다고 주장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움베르토 에코가 자신의 작품 <로아나…>에서 쉴 새 없이 <시라노>를 언급할 만큼의 울림이 있었다.
 일단 스토리 먼저 소개.
 가스코뉴 지방 출신의 카데(귀족의 장자가 아닌 아들이 병졸부터 하급사관까지의 계급으로 복무하던 병사)들로 된 군대의 기사 시라노. 하늘은 시라노에게 튼튼한 육체와 민첩한 반사 신경, 둘을 합해서 선천적 결투와 싸움의 능력을 허여했다. 동시에 놀라운 시적 재주와 그 비슷한 예술적 정열까지 몽땅 주었으나, 공평하게도 어마어마한 코를 얼굴의 한 가운데다 배치함으로써 지독하게 못생겼다는 평판을 얻게 했다. 원래 저 희랍시대부터 신들이 하는 짓거리가 다 그랬듯이. 그래서 시라노 하는 일이란 무턱대고 정의파, 용맹과감, 우스운 시적 찬가 등인데 무대가 17세기 초반이라 이런 과한 낭만적 시도는 숱하게 적들을 만들어놓고 만다. 이 기운 센 천하장사, 부르고뉴 성곽에서 (과장이 있겠지만) 무려 백 명을 단기필마로 거꾸러뜨리고 마는 검술의 신공을 자랑할 정도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수준.
 아무리 못생겨도 한 여인을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서 동네 최고의 미녀이자 사촌동생인 록산을 사랑하는데, 하늘이 선물한 시적 능력을 총동원해 근사하고 근사한 연애편지를 써서 사랑을 고백할 찰나, 아, 록산이 먼저 자신의 짝사랑을 고백하며, 금발의 돌대가리 미남 크리스티앙이 시라노의 부대로 전입했으니 잘 봐달라고 하는 거다. 자신이 못생겼음을 잘 알고 있는 시라노는 표정 하나 드러내지 않고, 알았다고 잘 봐주겠다고 약속을 해버린다. 크리스티앙에게 연애편지를 써서 보내달라는 록산의 부탁을 전하자, 생기기만 잘 생겼지 싸움도 못하고 시적 재주도 없는 크리스티앙이 기겁을 하자 시라노는 기꺼이 자신이 쓴 연애편지를 건네주고, 앞으로 크리스티앙의 외모와 자신의 문학적 소양으로 록산을 대하기로 결정을 한다. 물론 록산은 전부 크리스티앙의 재능으로 오해하고.
 그리하여 어느 달 없이 깜깜한 밤, 록산의 발코니에 걸쳐놓은 사다리 아래서 크리스티앙의 목소리를 흉내 낸 시라노가 열정적인 사랑의 고백을 하고, 이에 감격한 록산이 껌벅 넘어갔으나, 정작 사다리를 타고 올라 키스로 불태우는 인간은 크리스티앙. 사다리 아래서 그 꼴을 봐야했을 시라노의 복장은 어땠을까. 쓰라린 심정이야 말로 해서 뭐할까.
 

 이 장면, 유튜브에 있어서 따왔다. 비록 늙었지만 프라치도 도밍고. 발성에 대한 호오는 별개로 하고 하여간 노래 하나는 심금을 울린다. 즐감!

https://youtu.be/FayZ63koKJ8


 그러다 이들은 진짜 전쟁에 나가야 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는 시라노에게 록산이 하는 말이라니.
 “오! 그를 당신에게 맡길게요! 그 무엇도 그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줘요!”, “애써 보겠소… 하지만 약속할 수는 없소.”, “그가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러도록 노력하겠소. 하지만…”, “약속해 줘요, 그 끔찍한 포위전에서도 그를 추위에 떨게 하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하겠소. 하지만…”, “결코 날 배신하게 놔두지 않겠다고!”, “물론 그러겠소! 하지만…”, “나에게 자주 편지를 쓰게 하겠다고!”, “아, 그건 분명히 약속하겠소!”
 시라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호 안에서 열라 연애편지를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써서 새벽마다 포위하고 있는 스페인 병사들을 뚫고 록산에게 보낸다. 굶주림에 처한 병사들 앞에, 스페인 장교의 기사도 정신을 이용하며 과감하게 식량을 가득 실은 마차를 타고 도착한 록산.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시라노가 보낸 편지에 감동하여 여기까지 온 거다. 그리고 크리스티앙한테 당신이 보낸 편지가 자신의 심장을 녹여 이런 무모한 짓을 하게끔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록산, 사랑하는 록산느. 만일 내가 잘생기지 않았더라도 사랑했을 거요?”, “그럼 얘기하면 뭐해요. 당근이지요. 당신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시는 거예요?”, “다시 묻겠는데 내 외모가 노트르담의 콰지모도 같이 생겼어도 날 사랑했을 거냐고.”, “아 그렇다니까 남자가 왜 자꾸 물어보고 그래요, 내 사랑! 날 감동시킨 당신의 편지들이 내 몸과 마음을 다 녹여버렸다니까.” 크리스티앙의 옆구리로 슬쩍 다가온 시라노가 마지막 편지를 그의 호주머니에 질러 넣는 것을 록산은 보지 못했고,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자신의 외모가 아닌 시라노의 시적 재능이란 걸 확실하게 이해한 크리스티앙은 갑자기 핑, 돌아 때마침 시작한 적들의 공세에 무모하게 돌격 앞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마지막 편지. 눈물과 크리스티앙의 피가 물든 편지. 그것이 하도 아름답고 심금을 울려 록산을 편지를 가슴에 넣은 채 수녀원에서 무려 15년 동안 크리스티앙만 생각하며 상을 치룬다.
 일주일에 한 번 씩 들러 친구로서 록산을 위로해온 시라노. 어느 날, 적들에게 통나무로 뒤통수를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된 상태로 수녀원을 방문해 록산과 이야기를 하던 중, 록산이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건네주고 읽어보라 하는데,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하다가 드디어 글자 한 자 읽지 못할 상태. 그러나 시라노는 편지를 줄줄 읽어 내려가고, 드디어, 15년 만에 록산은 편지를 진짜로 쓴 사람이 크리스티앙이 아니라 시라노였음을 알아채지만 이미 그는 록산의 앞에서 죽어간다.
 재밌겠지. 그래서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이 생기는 거다. 생기기만 멀쩡하지 재주라곤 하나도 없는 크리스티앙 같은 이들을 도와 연애를 하게끔 조작하는 직업이 바로 ‘시라노 연애 조작단’. 하여간 말들은 참 잘 만들어.
 오늘 스토리를 다 소개한다고? 암. 드라마는 스토리를 알고 작품을 읽어야 제 맛. <햄릿>과 <리어 왕> 스토리 다 알고 책 읽어야 더 재밌는 거. 맞지? 그래야 자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어떤 대사로, 어떤 모습으로 표현을 했구나! 깜짝 놀라는 것이다. 이 책도 그렇다. 위에서 대충 이야기한 내용을 참 재미나게 생긴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다른 건 모르겠고 하나만 말한다. 정말 죽여줘.

 

 


 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재미난 외모. 보여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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