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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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은 벌써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명성을 떨치는 것은 물론이고 많은 다른 책에서 인용하는 독특한, 소설일 수도 있으며 읽기에 따라선 에세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책을, 새삼스럽게 골라 읽은 건, 랭보의 시집을 골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왕비의 신비한 불꽃>에서 계속 인용하기 때문이었다.
 부록까지 포함해 185쪽에 불과하지만, 그리 읽기 녹록하지 않았다. 구성이 어렵다거나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뜻이 아니라, 놀랍게도, 19세기 초반에 쓴 글, 그걸 한국어로 번역해 놓은 문장들이 대단히 아름답다는 뜻이다. 글을 만드는 재료들이 정말 다양하고 그것들을 적절하고 교묘하게 버무려 독자로 하여금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속뜻이 무엇일까 궁리하게 만들다가, 자신들의 마음 속 해석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관계없이 글에 공감하게 만드는 기묘한 아우라. 그리하여 갈피를 넘기는 속도가 빠를 수 없다.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해 쓴 글, 그것도 아편쟁이가 과거에 정말로 있었던 일들, 평소에는 바로 그 기억이 뇌의 주름 한 구석에 있었을 뿐,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가 아편의 자극에 의하여 끄집어낸 것인지, 아편이 뇌를 몽환으로 이끌어 정말 있었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만들었는지,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동서를 가리지 않고 불쑥, 갑자기 솟아오른 불꽃처럼 돋아나는 생각들, 그것들의 묘사.
 어느 날 문득 시골집의 부엌에 나타난 말레이 인. 터번과 더러운 흰색의 바지가 벽에 댄 거무스름한 판자를 배경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풍경. 나는 이 말레이 인과 아무 관계도 없으며 심지어 말레이 인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나는 말레이 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데, 의사소통 없이 말레이 인은 그냥 부엌 바닥에 한 시간 가량을 누웠다 떠나고, 난 그에게 기념으로 아편 조각을 건네준다. 남아시아 인이라면 아편과 친하겠지 싶어서. 말레이 인은 손바닥 위에 놓인 아편 조각을 그냥 꿀꺽 삼키고, 그 정도의 분량이라면 용기병 세 명과 그들의 말까지 한 번에 죽일 수도 있는 치사량임에도 나는 어떻게 할 줄 몰라 그냥 내버려두었으나 다행히 남아시아 사람이 길을 가다 죽었다는 소식이 없는 것을 듣고 안도한다. 역시 아편에 익숙한 남아시아 인임을 확인하며.
 이 일화는 본문 세 쪽에 걸쳐 있는 내용을 요약한 건데, 내가 글재주가 없어서인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리 요약을 잘 해도 원문의 그로데스크, 기이하고 또 쓸쓸한, 이런 거 다 합한 것을 비슷하게라도 쓸 수 없음은 물론이고, 이 내용이 책의 저 뒷부분에 다시 한 번 갑자기 등장해 나의 꿈속에서 거대한 공포로 자리하는 연결고리가 된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하나만 꼽아본 (19세기 초반에 쓴 글이란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방식의 글이다. 이런 것들을 다 합해서 난 토머스 드 퀸시의 글을 아름답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로 자주 쓰는 아름다움하고는 좀 다른 거. 이 책의 초간이 나온 것이 1822년.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쌍코피 흘리고 불과 10년 후, 워털루 전투로 폭망 7년 후에 쓴 글이란 거 감안하면 더 진가를 알 수 있는데, 처음에 얘기했듯 움베르토 에코가 이 작품을 자신의 소설에 즐겨 거론한 건, 책의 2부 세 번째 장, “아편의 고통”, 즉 금단현상을 겪을 때, 특히 꿈속에서 동서양과 아프리카까지 큰 그림의 원시상태와 다양한 파노라마가 <로아나 왕비....>의 주인공 ‘얌보’에겐 아찔한 기억일 수도 있었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감상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재미나게 읽었으나 다른 사람의 만족까진 담보하지 못하겠다는 거.
 (어제 술 좀 마셨더니 아, 오늘 아침 글 참 안 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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