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의 뿔
윤순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아주 오래전 신께서 낙타에게 뿔을 주셨다. / 마음이 착해 상을 주신 것이다. / 어느 날 꾀보 사슴이 낙타에게 와 말했다. / “뿔 좀 빌려다오. 잘 차리고 서역 잔치에 가련다.” /낙타는 곧이 믿고 뿔을 빌려주었다. / 사슴은 돌아오지 않았다. / 그때부터 낙타는 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 사슴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위는 7쪽에 나오는 서문 비슷한 글이다. 서문만 읽어봐도 이 작품은 ‘기다림’에 관한 서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300쪽의 장편소설이라면(물론 편집을 최대한으로 늘려서 그렇지 250쪽 언저리로도 충분히 책을 꾸릴 수 있는 분량이다) ‘기다림’이 복합구조 속에서 발생하여야 할 것이라서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기다림이 될 수밖에 없다, 는 걸 요샌 모르겠고, 수십 년 전 고등학교 현대문 시간에 배워 안다(그땐 이과 반에서도 국어 교과서를 교사 두 명 이상이 각각 고문, 현대문을 따로 가르쳤다).
 주인공 효은. 스물 네 살의 아가씨가 화자 ‘나’이자 효은. 당연히 오늘의 주제 ‘기다림’은 나, 즉 효은의 기다림을 얘기하는 거라서 무엇보다 ‘나’를 알리는 것이 소설을 소개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일이겠다. 나. 2년제 전문학교 출신. 일찍이 21세 때, 두 살 많고 잘 생긴데다가 오페라 노트 ‘섬머타임’을 숨넘어가게 잘 노래하는 수영선생 ‘규용’하고 정분이 나서 스물한 살 때 ‘황소개구리처럼’ 배가 불러왔다. 


잠깐. 이왕 얘기 나왔으니 우리 거쉰의 <포기와 베스>에서 나오는 Summertime 한 번 듣고 지나가자.

 

 

https://youtu.be/kgZAhiAFYZU

먼저 오리지날 연주. 사이먼 래틀, 런던 필하모니. 클라라: 해롤린 블랙웰

둘 다 같은 판이고 이 링크의 음원이다.

난 어마어마한 가격의 왼쪽 그림의 판을 샀는데

세월이 지나니까 EMI 리마스터링 시리즈로 반값에 나왔다.

이럴 때, 심장병 도진다. 

 

https://youtu.be/i6SPi7w5E_g

마할리아 잭슨. 가스펠 가수라서 그런지 공명이 대단하다.

아마존에서 태평양 건너까지 힘줘 던져줬다. 포장 뜯어보니 껍데기 깨졌다.

당시 한국에선 잭슨의 판 구할 수 없어서 그냥 참았다.

 

 

 https://youtu.be/i4HhG6DyoBU?list=PLSubR5WV5GnUHSDN1EG0azZBAF6S2abCp

웃기게도 Summertime은 재니스 조플린으로 처음 들었다. 물론 10대 때 였다.

당연히 LP였고, 듣는 순간, 뻑 갔다.

 

 

 


 그리하여 홀어머니에게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4천만 원만 있으면 중고 어선을 하나 사서 잘 살 수 있을 거 같으니 그거 하나 사달라고 얘기했다가, 눈치를 보아하니,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잘난 아들 공부 다 시켜 서울에서 어느 회사인줄은 모르겠지만 직장생활 잘 하고 있어, 그 밑으로 줄줄이 사탕처럼 줄 서서 기다리는 동생들 교육비, 용돈 뭐 이런 거에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으려니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던 거다. 이 와중에 나 효은은 스물 한 살의 어린 색시답게 지극히 간단한 소원, 그저 마당이 있는 작은 집, 내 집이면 좋지만 전세라도 상관없는 오붓한 집에서 모빌이 달랑거리는 아이를 뉘어놓고 햇빛에 환하게 빛나는 기저귀 빨래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꿈만 꾸고 있었던 것. 그걸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장만하는 것이 또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는 아무 생각도, 노력도 할 수 없는 철부지여서, 자신의 모든 정기와 힘과 새끼 품은 암컷의 독기로 규용에게 그딴 거 못할 바에 차라리 아이하고 나하고 죽어버리고 말겠어! 찬란한 지랄 한 바탕을 해댔으며, 도무지 중고 선박을 살 4천만 원도 타내지 못하고, 그래서 서울은 아니지만 작은 어촌에서나마 살림도 살지 못할 거 같은 난감함에 에라 모르겠다, 실컷 소주로 병나발을 분 다음 마침 해수욕 나온 여자와 우연히 함께 빠져버려, 여자는 파도와 바다에 부딪힌 참담한 시신으로 발견됐고, 비록 술엔 취했지만 수영장 수영선생 규용은 그길로 행방불명. 아울러 실신해버리고 만 나 효은은 충격이 너무 심해서였을까? 그길로 심한 하혈을 하며 유산을 해버리고 만다.
 행방불명. 죽은 거 같지만 죽었다는 증거가 없는 상태. 규용. 규虯는 새끼 용, 용龍은 다 큰 어른 용. 그러니 작가가 이름을 규용이라고 지었을 때부터 독자는 남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확신하지 않는 상태, 즉 어디선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주장을 끝까지 유지하기를 바라는 거 같다. 그거 있잖아. 훈민정음訓民正音. “가난 엄쏘리니 군君짜 처엄 펴아나난 소리 가타니 갈바쓰면 뀨虯자 처엄 펴아나난 소리 가타니라.”(아래 아, 순경음 비읍 같은 예전 문자표기가 안 된다. 안타깝다) 규용. 갯가 것이 처음부터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기엔 이름이 너무 크다. 왕들이나 쓰는 글자로 이름 자를 썼으니 명이 길기를 바리긴 처음부터 힘들었을 듯. 여기까지 작가가 생각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하여간 나를 포함한 독자가 규용이 익사했다고 생각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어떤 수를 썼느냐 하면, 내가 사는 연립주택 궁전빌라로 그림엽서가 한 장 도착한다. 쌍봉낙타가 그려진 엽서에 이렇게 써있다.
 “사막에는 그리움이 모래알처럼 / 퍼져 있습니다. / (근 한 페이지 중략) / 아득히 먼 기억 너머로 사라진 / 야생의 뜨거운 발걸음 식히며 / 가시 돋친 붉은 꽃으로 피어나 / 당신 앞에 우뚝 서겠습니다.”
 하면서 서명 대신 규용이 늘 사용하던 이니셜, “g"가 필기체로 갈려져 있는 거다.
 그래서 규용이 죽었어, 살았어. 현대문학에서 이걸 밝힐 수는 없는 일. 다 읽으신 다음, 한 번 거수, 다수결로 해 볼까? 난 죽었다, 에 한 표.
 왜 이걸 미리 얘기하느냐. 이 책을 읽을 사람한테 너무 센 스포일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따질 수 있겠다. 그러나 이건 책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미리 깔아놓는 밑밥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책의 스포일러를 혐오하는 내 입장에서도 별로 께름칙하지 않다.
 하여간 나와 규용 사이의 기다림은 산 자와 죽은 자, 혹은 산 자와 실종자 사이의 기다림으로 일단 다차원적이고 관념적. 그 다음은 당연히 실제적인 기다림이 하나 더 등장해야 하는데, 바로 이걸 난 안 알려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그리움. 더런 삶의 지속을 위해 맺어야 하는, 형체가 분명한, 먹고, 싸고, 싸우고, 관심 없는 척하고, 사기치고, 배신하고, 훔치고, 울고, 웃는 육체를 가진 인격적 생체를 향한 그리움이 등장한다.
 윤순례. 이 작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한국 소설가들이 특히 장편을 쓸 때, 아니다, 단편집의 경우엔 단편의 편수만 조절하면 가능하니 장편의 경우만, 원고의 분량에 무척 신경을 쓰는 거 같다. 물론 출판사와 협의 하에 결정을 하겠으나 대충 300쪽 위아래로 만들기 위해 작품을 쓰고, 쓴 다음 조절하고, 조절도 모자라면 그냥 잘라버리고, 잘라버려도 좀 뭐하면 막 툭툭 끊어버리지 않나 하는 의문. 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얘기 몽땅 다 해버리면 좋을 것을. 굳이 이런 타박은 앞에서 얘기한 애 아빠가 될 뻔했던 규용과 나의 관계가 과하게 (전체 글의 분량과 비교하여)장황하고, 이어지는 이야기와 큰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 물론 난 지극히, 처음부터 끝까지 아마추어의 시선으로 책을 읽었으니 이 독후감을 읽는 다른 독자들이나 혹시 작가가 읽어본다면 작가를 포함한 모든 전문가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 바란다. 오히려 뒷부분, 즉, 인간이 살아있는 인간을 기다리게 되는 쪽이 더 많았으면 하는데, 다시 강조, 오직 내 생각일 뿐이다.
 위에선 내 생각을 얘기했고, 이젠 내 주장을 하나 소개.
 모든 문학작품, 그것도 걸작이라고 일컫는 대 문호의 소설에서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고, 짜증나는 에필로그는? 톨스토이 백작이 쓴 <전쟁과 평화>. 그건 그렇고, 이 책 <낙타의 뿔>에서 제일 뒤에 붙은 에필로그는? 백퍼 사족. 왜 그딴 걸 썼을까? 윤순례가 오늘의 작가상에 빛나는 소설가이기는 하지만 잠깐 돌았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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