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기다림 민음사 모던 클래식 63
나딤 아슬람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아, 어제 미친 짓 제대로 했다. 소주 각 3병 마시고 술김에, 이거 참 좋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책을 동무에게 줘버렸다. 술 깨니깐 그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명절 전에 미리 부모님, 평안히 쉬시기를, 한테 다녀와도 아까운 건 마찬가지다. 왜 그리 미친 짓을 했을까.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는데 혹시 잘 하면 이번에 지겨운 이승 떠날 수 있을까. 난 물고기자리라서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젠 드디어 이 지겨운 생로병사를 끝낼 수 있을 텐데.
 내 아무리 지겹고 고단한 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어찌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모진 삶을 꾸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비교를 할 수 있나. 민족주의, 이거 무지하게 나쁜 건데 딱 하나의 경우에만 좋은 의미로도 쓰인다. 피식민지 등 수탈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민족들. 즉 힘없는 나라 혹은 민족의 경우에만 긍정적인 의미가 될 수 있고 이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경우엔 차별을 정당화시켜주는 방편으로 기능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20세기 중후반 까지, 반半 식민적 예속 상태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하기 위한 방편으로 민족주의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지금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족주의는 소위 ‘다문화’에 대한 차별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정도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소비에트 연방에 의한 침략 시점부터 무차별 테러가 빈발하는 요즘까지도 민족주의라는 단어가 여전히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아프가니스탄 사람도 소비에트나 아메리카에게, 우리 땅에 와서 참견 좀 해달라고, 그러기 위해 무기를 가지고 와도 좋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서로 살펴가며 살고 있는 나라에 어느 날 문득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쳐들어 왔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과 영국 등에서부터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무기를 공급해주었으며, 그리하여 급기야 과격 이슬람 세력 탈레반에 의한 폭력정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탈레반에 의한 문명파괴, 인권말살은, 참으로 엉뚱하게, 미국 땅에서 발생한 911 사태로 인해 큰 전기를 마련한다. 911이 탈레반 정권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을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에 의한 범죄이며, 그가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얻은 미국은 20여 년 전 소비에트와 아주 비슷하게 최신식 무기를 운용하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이때 오사마 빈 라덴만 거덜을 낸 게 아니라 이참에 반미세력으로 변신한 옛 반공 동료 탈레반 정권까지 무너뜨려버린다. 그러니 오랜 세월 탈레반에 의해 잔인하게 짓밟히던 아프가니스탄의 선한 백성들은 21세기가 열리자마자 세계인들을 경악시킨 911 테러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이리 오랜 전쟁과 내전, 문명파괴, 인권말살 같은 야만, 그리고 다시 한 번 전쟁의 폭력. 왜 아프가니스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는가 말이다. 눈 크고 어두운 피부색을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들끼리 살도록 애초에 간섭하지 않았다면 아프가니스탄, 유목과 검소한 농경의 나라가 어찌 지금과 같은 비극 속에서 살았겠는가.
 독후감 제일 앞에 얘기했듯이 내가 잠깐 미쳐서 책을 동무한테 줘버려 갈피를 좇아가며 쓸 수 없는 것이 참 아쉬운데, 이 소설은 호숫가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시골 마을의 큰 집을 배경으로, 홀아비 집주인과 손님 세 명 사이에 벌어지는 기묘한 인연을 풀어내고untie 있다.
 홀아비는 영국인 의사 출신, 70세 이상의 고령 백인인데, 아프가니스탄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종교를 바꾼 사람이다. 아내 역시 의사.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차도르는커녕 히잡도 쓰지 않고 짧은 치마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던 시절의 옛날 사람이라 남편과 함께 영국에서 의사 면허를 따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 인물. 결혼 역시 예전 시절에 했기 때문에 주례를 여성에게 부탁했고, 세월이 더럽게 흘러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다음, 여자가 주례를 한 결혼이기 때문에 그건 결혼이 아니며 이방인에게 몸을 판 창녀에 불과하다는 판정을 받아 동족이 던진 돌팔매를 맞아 숨을 거둔다. 그러니 집주인 마커스 씨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근데 그의 모습도 좀 이상하다. 왼쪽 손이 없다. 탈레반에 의해 도둑질을 했다는 판결을 받아 손목이 잘린 것. 이들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점점 자라 이제 남녀 사이의 불장난을 알 시기가 되자 동네 미남 청년과 눈이 맞았다. 남자가 반소反蘇 운동을 했다는 죄명으로 남자는 총살에 처해졌고 딸은 소비에트 군대에 납치되어 강간당해 임신을 해서, 어찌어찌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피난민촌에 도착했으나 결국 지방군벌에 의해 사살 당한다.
 러시아에서 옛 소비에트 군인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행방불명된 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하려 입국해 이 집에 들를 라라, 라는 이름의 여성. 동생이 예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을 때……, 아, 지금 내가 뭐하는 거임?
 보석원석 전문 딜러이자 CIA 출신의 중년 남자, 그리고 극단 이슬람 주의자답게 성전聖戰을 신봉하는 아프가니스탄 청년. 이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수많은 매듭. 그걸 어떻게 풀까.
 난 분명히 말했다. 얽히고설켰다고. 유목민과 농민들이 평화로운 삶을 누려왔던 지역. 곱슬머리 상투를 한 수많은 석가모니 석불이 있었고, 그 연후에 이슬람의 평화로운 말씀이 대지를 덮었던 산악과 황야의 나라. 이들 사이에 당시엔 얼마든지 가능했었거나 가능하지 않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인연 또는 우연.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울어주고, 이미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며. 아니, 비록 늦게나마 그들이 어떤 시절을 살았는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악행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했는지 그걸 이해하는, 이해해야 하는 일. 긍정적인 의미로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민족주의를 인정해주는 일. 그것으로 나는 이 책을 읽었으며, 바보같이 술김에 동무에게 줘버렸지만, 그래서 세계인 가운데 한 명이 더 이 이야기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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