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마라톤
이채원 지음 / 현대문학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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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뜀박질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원시적이라서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아니,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계 운동성의 기초. 문명을 이루어 살며 그러다보니 어떤 일에도 숨이 꼴깍 넘어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만족하는 속성을 지닌 인간들의 한 결실, 나도 읽어봤는데, 헤로도토스의 <역사>. 페르시아 전쟁에서 마라톤에 상륙한 페르시아 인들을 물리쳤다는 낭보를 전한 메신저가 먼지투성이가 되어 아테네에 입성하여, “만장하신 시민 여러분, 아테네 군대가 이겼구만이라!” 딱 한 마디하고 숨넘어가 죽어버린 걸 기념하여 백리 길 달리기 시합이 벌어졌다가, 20세기 들어 백리 길을 딱 42,195 미터로 정한 뜀박질 경기.
 이 달리기 시합, 백리 길을 쉬지 않고 달리는 자체가 워낙 힘들어 죽음과 거의 유사한 경험을 잠깐이라도 하지 않고는 마칠 수 없다고 하여, 너무나 자주 인생길, 재수 없게 세상에 나오게 되고, 그렇다고 죽지도 못해 모진 세상살이 꾸역꾸역 살아내는 인간의 일생과 유사하다고 숱한 인간들이 그렇게 얘기했는바, 하여간 가져다 붙이긴 잘도 붙인다. 내가 생각하는 마라톤의 미덕은, 단 한 발자국도 자신이 직접 찍지 않으면 결코 백리 길을 갈 수 없다는 아주 우스운 진리. 하여간 인생은 잘 살아야 한다. 여기서 ‘잘 산다’는 건 일차원적으로 생각해서 좀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지적 양식과 철학의 고양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즉 삶이, 사회 전체가 먹고 살기 나아져야 한다는 의미. 그래야 마라톤처럼 죽을 고생을 해가며 운동하는 사람도 생기고 만날 야근하면서 번 돈 들여 비싼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 끊어 땀 뻘뻘 흘리며 근육 키우는 인간도 생기는 것이지, 지금부터 멀리도 아니고 60년 전만 생각해보라, 배고파 죽겠는데 무슨 뜀박질을 하고, 힘들여 죽어라 뛰면서 이게 인생살이니 뭐니 할 여유가 있었겠는지. 그리하여 솔직하게 말하자면, 마라톤, 진짜로 이렇게 뛰다가 세상 하직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는 마라톤이란 뜀박질 운동을, 42,195 미터 다 완주하면 인생에 대한 철학 하나 건질 수 있지 않을까하고,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찍지는 않을 거 같다는 점.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 보면, 글쎄 모르긴 몰라도, 뛰는 운동, 극한 운동을 하는 도중에 인체 내부 어느 분비샘에서 자신을 만족시키는 물질이 퐁퐁 솟아나, 그게 마치 일종의 성적 오르가즘 비슷한 기능을 해서 자꾸 뛰게 되는 것이고, 그런 희열을 느낀 극소수의 사람이 마라톤에 관해, 완주한 다음의 오르가즘을 아름다운 수사로 만들어 널리 알리면, 결코 42,195 미터를 달리지 못하는 나 같은 보통 사람이 홀랑 속아 넘어가는 거 같다는 뜻이다.
 어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본능 가운데 하나. 특히 드런 인생살이 중에 정말 드럽고 드런 인생의 교차로를 만나는 걸 계기로, 소설의 ‘나’처럼 마라톤을 시작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마라톤, 뜀박질을 통해 자신의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현명한 방법일 수 있을 터. 홧김에 서방질 하는 우리네 조상님들의 지극히 현명한 방법보다도 훨씬 바람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앞 문장에서 ‘드럽다’는 맞춤법에 어긋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람. 어감이 ‘더럽다’보다 좋아서 일부러 선택해 그렇게 썼음).
 그래. 결혼 십년 차 여자인 ‘나’. 난소 결함으로 인한 불임증 판정. 늙고 병들어 수발해야 하는 시어머니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 다른 통로에 살며, 남편이 먼저 마라톤을 시작. 남편새끼가 첫 번째 42,195 미터 뛴 날이 하필이면 내 생일이었는데, 그 새낀 그날 다른 여자하고 잤음. 근데 문제는 새끼가 칠칠맞아서 마라톤 완주를 통해 받은 힘을 그 여자 몸속에 홀랑 쏟았다는 걸 내가 알게 만들었음. 그리하여 그날부터 나는 존나 뛰게 됨. 그날 시작해서 나도 잘난 남편새끼처럼 마라톤 완주한 날까지의 기록. 이걸로 끝.
 내 말이 맞다. 아무리 화려한 수사로 소설을 썼다 해도, 조상님들의 빛나는 권장성 속담인 홧김에 서방질보다 훨씬 우아하고 돈 덜 들고, 건전한 방식의 스트레스 해소로써 마라톤이지, 그게 무슨 철학은 아니잖아? 마라톤을 완주 하고난 다음 세상을 향해 “나는 인생의 영웅을 보았다. 바로 나다”라고 뻥칠 일은 아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예를 들어, 남원의 육모정을 출발해서 노고단까지 1박 2일 기어 올라가고, 거기서 또 열 개의 봉우리를 넘어 천왕봉에 오른 다음 대원사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를 마친 이가 “난 또 한 번의 인생을 살았다.”며 구라를 푸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본인들한테는 전부 진실이겠지.
 위와 같이 좀 야박하게 썼다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개인의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렇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건 존중받아야 한다. 이채원, 당신 말이 맞다. 근데 마라톤 백 번 완주하면 드런 인생살이의 문제가 좀 풀리긴 할까? 날 버린 그 새낀 다시 돌아오고, 늘 수발해야 하는 시어민 얼른 꼴깍 죽어주고, 불임 대신 잘 생긴 아이 하나 입양해 천만다행으로 속 안 썩이는 건 물론, 얌전하고 건강하고 공부 잘 하는 모범 청소년으로 자라줄까? 암, 만일 그렇다면,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된다면, 그게 아니라도, (당연히)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거 하나 없어서 생긴 속상한 마음, 말짱, 요새 말로 힐링 비슷하게라도 된다면 백 번 아니라 천 번은 못 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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