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에블린 민음사 모던 클래식 57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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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를 쓴 작가인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선택해 읽다가, 문득 정신 차려 책장을 올려다보니 <그것이……>를 쓴 사람은 토마스 브루시히, 잉고 슐체가 썼고 내가 읽어본 장편은 <새로운 인생>. 즉, 완전 착각. <아담과 에블린>은 <새로운 인생>을 쓴 3년 후 발표한 작품으로 이 부분에서 “전작과 마찬가지로”라는 구절이 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헷갈리게 했던 바와 같이, “<그것이……>와 아주 비슷하게” 동서 독일의 1989년 통일 시기에 동독 인민들의 선택을 둘러싼 갈등을 두 주인공, 아담과 에블린, 아담은 다들 아실 것이고 ‘에블린’은 ‘이브’를 연상시키는 독일 이름이라고 하니, 저 예전에 ‘말씀’이 있어서 지구상 제일 먼저 만들어진 남자와 여자를 은유하는 두 남녀 주인공을 등장시켜, 통독 과정 당시 일반 동쪽 독일 인민들의 난감한 의식을 재미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난감한 의식이라 함은 에블린으로 대표하는 많은 동독 시민들은 서구를 동경하다가 드디어 탈동脫東에 성공한 사람을 대표하고, 아담은 굳이 체제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꼭 바꿔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해 그냥 동쪽에 머물고 싶으나 사랑하는 에블린이 꼭 동쪽에서 살아야하다니 차마 그녀와 떨어질 수 없어 어영부영 서쪽에 살게 된 인물을 대표한다. 그래서 어쨌거나 동쪽에서 낳고 자라고, 그 정도면 잘 체제에 적응하여 어렵지 않게 살았던 인간들이 처음으로 자본주의 가치관과 체제로 탈출하게 되어 아담과 이브, 즉 아담과 에블린으로 불리울 수 있게 되는 것.
 나는, 내가 꼭 남자라서가 아니라 아담의 입장에서 책을 읽었는데(어쩌다 그렇게 됐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이 이 책은 저절로 아담의 시각에서 읽었을 거라고 믿는다), 동쪽 독일에서 아담의 직업은 여성의류 재봉사. 일단 외국어로 표기해야 더 좋게 들린다는 몽매한 21세기 대한민국 언어의 흐름을 좇아 얘기하자면 여성 의류 디자이너로, 자신이 (주로 중년의 돈 많은) 여인들의 세련된 옷을 디자인해서 지어준 다음에 자신의 ‘작품’을 입힌 채로 사진 한 방을 찍어 보관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으며, 뭐 상황이 피할 수 없게 진전될 경우엔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작품을 몸에 걸친 여인들로부터 직접 만든 작품을 홀딱 벗게 만드는 신공을 가지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 어느 날 릴리라는 이름의 나이 들고 포동포동한 중년 여인에게 자신이 지은 옷을 입히면서 옷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산지 이틀밖에 되지 않는 실크 브래지어를 벗어 맨몸에 작품을 걸치게 한 다음, 원래 계획은 비록 그렇지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손가락들이 작품의 아래, 즉 곧바로 맞닿게 되어 있는 릴리의 피부 위를 적극적으로 탐사하기 시작했으며, 기대와는 달리 그리하여 벌어졌을 파노라마는 과감하게 생략한 채, 다음 장면으로 포동포동한 릴리는 욕실에서 비누거품 잔뜩 뒤집어 쓴 욕조 속에, 아담은 벌거벗은 채로 작업실에 서있는 순간, 동거인 에블린이 난데없이 그들의 동거가옥에 쳐들어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에블린은 스물 한 살의 똑똑한 여성. 그러나 아쉽게도 동쪽 독일이 요구하는 체제와 법률에 대한 순종을 가지고 있지 않아 자기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지 못한 대학생이 되었다가, 엉뚱하고 흥미 없는 전공을 공부하느니 차라리 다니지 않음만 못하다는 현명한 결론을 내린 것까진 좋았지만 지능지수 높은 아가씨가 기껏해야 슈퍼마켓 계산원을 하고 있었으니 평소 자기가 사는 꼴에 지극히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인데, 어느 날 불쑥 자기 꼴이 너무 한심스러워 한 바탕 벌컥 성을 내며 그것도 직장이라고 아 썅, 낼부터 안 나올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대성일갈한 다음 내연남의 위안이라도 받을까싶어 벌컥 현관문을 열어 젖혔더니, 욕실 문을 훤하게 열어놓은 피둥피둥한 아줌마가 비누거품을 뒤집어 쓴 채 욕조에 앉아 있고 내연남은 벌거벗은 채로 장롱 옆에 숨어 있더란 말이다. 아이고, 내 더 이상 이놈의 공산당 치하에선 살 수가 없다,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그길로 짐을 싸서 사촌이라 일컫는 나이많은 서독 남자 미하엘을 따라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거쳐 친구네 집으로 내빼버리고 만다.
 비록 육체가 원하고 본능이 원해 나이 많고 피둥피둥한 아줌마의 몸을 탐냈을지언정 죽으나 사나 에블린을 사랑해마지않는 아담은 그길로 만든지 28년이 넘은 똥차를 끌고 이들을 찾아 나서면서, 많은 사람들은 만나고 드디어 아담이 원하지 않았던 서독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망명해버리고 마는데, 하이고.
 문제는 동쪽이냐 서쪽이냐, 하는 선택과 그에 따른 실행 또는 모험담이 이 책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 비록 동쪽의 많은 인민들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하고 구호를 외쳤지만 동쪽은 동쪽 나름대로의 미덕이 있었던 것이고, 그 안에서 안분하던 인물이 아무 대책 없이 서쪽으로 넘어와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혼돈과 부적응, 뭐든지 과잉으로 공급되는 자본주의적 질서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그건 날 때부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던 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일 수도 있고 뭐 그런데, 예를 들면, 자본주의 세계로 이주하기로 결심하자마자 생긴 스물한 살 에블린의 태내에 막 생긴 생명이 과연 아담의 아이인지, 아니면 사촌이라고 주장하던 미하엘의 아이인지 도무지 알 수도 없으면서 그냥 아담과 계속 살기로 해버리고, 그리하여 지속시키기로 한 생활 역시 그리 행복해보이지 않는 건 물론이며, 동독에선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일지라도 서쪽으로 넘어오니 시민 대다수가 간편한 기성복만 사 입기 때문에 주어진 일거리라고는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없는 옷 수선, 그것도 파트타임 말고는 구할 수도 없는 비극.
 아, 오늘 내가 말이 너무 많다. 차라리 원문을 그대로 다 배껴 쓸 걸 그랬나? 반성한다.
 근데 이런 비극성을 잉고 슐체는, 그의 첫 작품 <새로운 인생>은 순전히 잉고 슐체란 이름이 근사해서 사 읽었는데, 이 책은 작가의 이름하고는 관계없이, 그는 이 작품을 산뜻한 희극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지극히 마음에 들었다. 비장하지 않은 비극. 숨어있는 웃음의 코드로 오히려 강화되는 비극성. 여기서 말하는 비극성은 뭐 킹 리어나 데스데모나 혹은 오필리어의 비극이 아니고 굳이 비교하자면 경쾌한 비극인데, 이걸 경쾌한 비극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거 역시 작가 잉고 슐체의 독특하게 발랄한 시선이 굳건하게 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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