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속의 외침 - 2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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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번째 읽은 위화.

 어째 그리 하나같이 궁상맞은지. 위화가 1960년생.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중국이 딱 그럴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중국하고 비교하면 뽕나무 밭이 넓은 바다로 서너번은 바뀌었지만. 격심한 현대사의 파도를 뚫고온 세대의 끝부분에 위화와 같은 1960년 생들이 있을 것이다. 이건 위화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다음 세대와 비교해 놀라울 만큼 풍부한 추억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의 젊은 세대들도 위화의 작품들을 읽으며 자신들의 부모가 이런 시대를 살아내 지금에 이르렀을까, 조금쯤 의심을 하기도 하고 또 많이는 놀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도 그렇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 안쪽에 태어난 이들을 베이비 부머라고 일컫는데, 이들은 워낙 대가리 수가 많아 세상에 나오자마자 전쟁 후의 극심한 빈곤 속에서 또래끼리 끔찍한 수준의 경쟁을 겪으며 성장하면서, 궁상스런 극빈부터 천민자본주의와 재벌들에 의한 정경유착 같은, 유럽의 백인들은 한 세기 이상 걸려 경험할 것을 한방에 다 겪으며 살아온 것하고 비슷하다. (이야기가 또 경상남도 삼천포 시로 빠졌다.) 하여간 위화가 (내가 읽은 네 편의 장편소설로만 판단하면) 초지일관 굳은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소년시절에 겪은 듯한 중국의 일반 농민 계급, 그것도 아주 날것의 솔직하기 짝이 없는 하이퍼 레알리즘 식 묘사가 현대 중국인들에게 대단히 신선하지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 같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작가가 처음 발표한 작품이란다. 읽어보면 첫작품이란 수식이 어울리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유명작가의 운명을 띠고 등장했다, 라는 표현이 어울릴 수도 있다. 물론 최용만의 번역이 유독 위화와 궁합이 맞아 한글로 읽는 이이의 작품으로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책의 마지막에 '역자 한 마디'에서 최용만은 위화와의 친밀한 관계를 은근히 과시하기도 한다), 아주 쉬운 문장과 '촌철살인'이란 낱말의 사전 그대로의 뜻을 분명하게 시연하는 난데 없는 대사의 상쾌함과, 도무지 예상하지 못할 등장인물들의 행동 또는 행위,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던 바늘 끝을 휙, 나꿔채 눈부신 문장으로 만들어내는데엔 이이와 어깨를 견줄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석대학 문창과 교수이자 시인인 안도현이 위화의 소설을 (이 책의 뒤표지에 나와있다) 이렇게 묘사한다. "위화의 소설은 끈적끈적하고, 거무튀튀하고, 때로는 붉다." 소설을 어떻게 읽었는가에 관해서 시인의 의견은 그리 참고할 만하지 않다. 역시 제일 중요한 건 독자 개인의 느낌이니. 난 차라리 이이의 작품 <가랑비....>는 '반투명한 안개 속을 유영하는 맑은 눈eye'이라고 하고 싶으니, 안도현과 완전히 반대의 느낌이다.

 화자 쑨광린은 삼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 책은 화자가 이야기하는 석공 출신 증조할아버지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쑨유위안과 부잣집 출신의 전족을 한 할머니, 개잡종처럼 보이는 아버지 쑨광차이와 어머니, 그리고 삼형제 쑨광핑, 쑨광린, 쑨광밍의 삶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기억해낸다. 읽으면 독자가 혹시 이거 작가 자신의 이야기 아냐, 라고 오해하기 딱 맞을 정도의 능청은 (이 책이 데뷔작이란 걸 기억하시라!) 벌써부터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고, 자기 기억 속의 1960년대, 그니까 한 1965년 전후의 중국 농촌에 한 가정을 상정하여 당시 중국의 가난하고 불행한 농촌의 삶을, 한 집안에 집중포화를 퍼부어 만들어낸 소설이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나' 쑨광린은 시내에 돈 좀 있고 슬슬 바람도 피우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의 손에 이끌려 양자로 팔려가고, 5년만에 말도 없이 파양당해 다시 고향, '남문'으로 돌아와 소년시절을 끝마치고 또다시 '남문'을 떠날 때까지,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세월이란 게 무서운 것이, 일을 당할 때는 참 무섭고, 아프고, 슬프고, 지랄맞고, 억울하고 그래도 나중에 그때를 돌아보면, 아 추억이란 이름의 진통제,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당연히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류의 소설은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데, 그러나 <가랑비....> 만큼의 질량으로 사람을 웃기게하고, 울게도 하고, 간질이기도 하는, 간단하게 말해 딱 집어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같은 문화권의 작품이라서 그럴까? 책의 스토리는 굳이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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