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표제는 나쁜 소년이 서 있다라고 표기하고, 각 시의 제목은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식으로 써야 마땅하나 그딴 거 구분하지 않고 다 <우짜구저짜구> 이렇게 쓰겠다. 특수문자 골라오기 귀찮아서.

 

  처음 들어보는 시인. 근데 많고 많은 이름 가운데 허연이 뭐야, 허연이. 그럼 미세스 허연의 이름은 하얀이야? 이건 뭐 그냥 지나가는 말. 하여간 책 뒤에 나오는 허연의 약력을 보니 1966년에 태어나서 1991년에 현대시세계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이 시집은 2008년에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42세 때. 민음사 시집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목차 바로 앞 페이지에 자서自序라고 스스로 시집을 시작하는 말씀이 적혀 있는 거. 허연은 자서를 어떻게 써놓았는가 하면,

 

 

 自序

 

 결국,

 범인(凡人)으로 늙어 간다.

 다행이다.

 

 200810

 허연

 

 

  기껏 마흔 두 해를 살아보니 젊어서 시인이라고 해봤자, 허연의 말대로 마흔 넘으니 결국 범인, 평범한 사람으로 나이 먹어간다는 고백. 근데 그게 다행이라는 천만다행의 자각. 주변에 시인으로 등단한 사람 몇 명 있다. 이들의 공통점? 가관. 시인이 가관이란 뜻이 아니라 시인의 주변에 있으면서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지망생들, 시인에 대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환상을 갖고 시인을 바라보는 보통 인간들의 몰지각한 우상숭배가 꼴불견이란 말이다. 등단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법이다. 한 번은 내가 등단 시인을 우상숭배하는 시인 지망생에게, 너도 시인이다. 시를 쓰고 읽고 진짜로 좋아 몇 수를 외고 있으면 그이가 시인이지 꼭 등단을 해야 시인이냐, 했다가 만장하신 신사숙녀 앞에서 개망신 당한 적도 있다. 물론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뜻을 굽힐 내가 아니라서 아직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등단하지 않아서(이것도 못해서가 아니다) 공인받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근데 내가 개망신 당할 때, 문제의 그 시인새끼는, 숱한 인간들이 자신을 숭배하는데 그게 기분나쁠 이유가 없으니 그저 싱긋, 웃음 짓고만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 자신 스스로 조금은, 어느 정도는 그냥 보통 인간과 애초부터 다른 종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리하여 젊은 시절을 보통 인간과 애초부터 다른 종자로 살기 위해 시를 쓰고 월月도 아니고 연年 5백만 원 안팎의 수입으로 늙으신 부모 등골을 휘게 하며 살다가 이제 나이 먹으면 대개 젊어서 숭배받으며 몸에 익었던 다른 종자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급기야 나도 그냥 보통인간임을 자각하는데, 그걸 다행으로 생각한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허연의 두 번째 시집이라고 하는 이 책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눈알이 뚫어지게 읽어보면 크게, 그동안 시인의 건강에 문제가 있었는데 혹시 귀를 비롯한 이비인후과 질환이 아니었는가 싶고, 분명 피라미드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사막지대를 여행했으며, 그간 스스로의 상태를 빙하기로 표현하는 일종의 혹한기를 보냈다고 여기며, 시를 쓰는 것도 일종의 자연상태, 즉 생태의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 거처럼, 네 가지 부류boundary로 나눌 수 있을 거 같은데 당연히 예외는 있는 법이라서 여기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시도 물론 있다.

  ①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상이라 그걸 시로 써놓았을 경우에 독자가 시인과 더불어 같이 백년 된 병원에서 귀여운 환자가 되어 베토벤도 있는데 이 정도야, 할 수도 없고(<박수소리> 40), 같은 모래 언덕에 서서 저 멀리 지평선에서 푸른 하늘이 1차 하늘, 2차 하늘, 3차 하늘, n차 하늘이 다 모여 마치 바다 같아서 그 위를 지나는 위그르 족(위그르 족이라면 이거 고비사막일 텐데 끙) 처녀는 틀림없이 바다 위, 물 위를 걷는 것(<바다 위를 걷는 것들> 34)처럼 보이길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주목한 것은 슬픈 빙하기 시리즈다. 이제 시인이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어느덧 범인, 평범한 보통사람이 됐다. 평범한 보통사람? 시인이 보는 보통의 인간은 이런 종류다.

 

 

 

  슬픈 빙하시대 2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디가 힘겹고, 돌아놉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난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시는 읽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런 자의적 해석은 언제나 정당하다는 인식 아래서 이 시에 관해 말하면, 이 시야말로 지랄 염병을 하는 시다. ‘한 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는 진짜 시인이 병을 앓았던 시기와 경험을 뜻할 수도 있고 본격적으로 시를 썼던 한 시절을 은유할 수도 있으며, 이 두 경우를 적절하게 합해서 하나로 은유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나는 세 번째, 진짜 병을 은유하여 한 때 목숨걸고 시를 썼던 시절을 얘기하는 걸로 이해하겠다. 그러니 그때가 행복했겠지. 한데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었던 것도 세월이 지나 당시를 뒤돌아보니 그렇다는 말씀이다. 이제 시인은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을 자유스러움과 편함이 아니라 비굴과 설움으로 느끼며,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즉 술 마시는 일이,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즉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술 한 잔의 짜릿함 대신 출처불명의 난데없는 일이 돼버리고 만다. 여기까진 넓은 아량으로 봐줄 수 있는데(시인이 암만해도 열등감에 절어 있는 모양이다. 혼술의 아름다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니), 문제는 다음 연이다. 이제 40대가 되어 모든 죄가 다 어울리는 나이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하는 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이 어울리는 나이란 세상에, 없다. 그럼 20대는 폭력과 살인, 강간이 어울리는 나이? 물론 시인은 나와 내 친구가 이런 모든 죄와 어울리는 나이라고 했으니, 시를 쓰지 않으면, 이라는 가정을 달아 그런 범죄가 어울린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줄도 모르겠으나(암만해도 어리광이 맞는 거 같음. 이런 오만이 어딨어!) 몇 번을 읽어보고 또 읽어봐도 기분 나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짧은 마지막 연, 청춘이 갔기 때문에 죄가 어울린다니. 이런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창백한 시인의 허약한 고백. 청춘이 백번을 떠나가도 모든 죄가 어울리는 나이란 세상에 없다. 사랑하지 않는 죄 말고는. 시인들이 흔히 범하는 죄. 그냥 읽으면서는 참 맛있는 문장들을 나열하면서 속으론 나약하고 썩는 냄새가 나는 말을 교묘하게 숨기는 일. 그게 시적 범죄다.

  다른 시 하나 더 읽어볼까?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살은 굳었다는 표현은 물론 굳은살을 의미하겠다. 발뒤꿈치! 또 직업에 따라 몇 군데가 있겠지. 주로 손바닥이거나 손가락 부분에 많이 있는 듯. 그건 좋은데, ‘상스럽다는 건 뭘 의미할까? ‘상스럽다의 사전적 뜻은, ‘말이나 행동이 보기에 천하고 교양이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 말이나 행동이 보기에 천하고 교양이 없었을까? 차라리 상처라면 지나간 일인데 굳은살은 아직도 진행중이니까 그야말로 상스럽지 않을 방법이 없게 상스러운가? 시인이 쓰는 말을 사전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나도 그건 안다. 시인에게 상스러운 일은? 시를 쓰는 일 자체. 혹은 시 작업의 결과물로서의 시. 그게 상스러웠을까? 물론 반어 혹은 은유로 상스럽다는 거겠지만. 시 작업을 염두에 두고 굳은살, 즉 시를 쓰기 위한 고뇌와 안간힘을 상스럽다고 했을 거라고 믿겠다. 절색의 여인마저 시인의 굳은살을 보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이 시와 앞의 <슬픈 빙하시대2>를 함께 보면, 시를 쓰느라 시인의 뇌 곳곳에 굳은살이 박일 고통의 시기가 그래도 행복했던 것이고, 시를 쓰지 못하는 단계, 그리하여 시인의 자서처럼 범인凡人으로만 늙어가 드디어 모든 죄가 어울리게 됐을 때 시를 썼던 청춘이 간 것이 불행했을 것이다. 다만 시를 쓰는 너만 독야청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