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의 악마 창비세계문학 51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정소영 옮김 / 창비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음사에서 발간한 <피의 꽃잎들>을 읽고 응구기 와 티옹오(민음사에선 '응구기 와 시옹오'라고 표기)의 다른 작품을 주저없이 골라 읽었다. 먼저 개인의 호오에 관해 언급하자면 <피의...>가 이 작품보다 더 좋았다는 걸 밝히는데, 그렇다고 이 책이 그냥 그런 범작이란 얘긴 결코 아니다.

 창비의 책소개를 보면 "아프리카 현대 문학의 거장이자, 치누아 아체베 등과 함께 탈식민주의 문학을 이끌어온...."이라고 해놓았다. 탈식민이란 의미에선 뭐 아체베와 동류로 묶는 건 동의하지만 두 거장의 문법은 확실하게 다르다는 말을 전에 <피의...> 독후감에 써놓은 거 같은데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아체베와 페르디낭 오요노로 대표하는 이들의 탈식민문학은 식민주의 하에 피식민민중들이 경제적, 심리적, 문화적으로 수탈을 당하는 모습을 그린 반면, 응구기 와 티옹오나 에스키아 음파렐레 같은 이들은 일단 정치적으로는 식민주의가 종식되어 독립된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 문화적으론 여전히 아메리카, 유럽, 일본에 의한 식민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있다는 걸 주장하면서, 대한민국의 1970년대와 80년대에 숱하게 논의되었던 신식민주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종의 문학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보시면 되리라. 처음에 내가 <피의 꽃잎들>이 더 좋다고 했던 것은 '소설'이란 장르로 국한하여 평가한 결과다. <피의...>와 비교하면 <십자가 위의 악마>는 작가가 1977년 교도소 수감 중에 화장지에 몰래 쓰기 시작해서 그랬는지 (내가 생각하는)소설 장르로서는 과하게 웅변적이다.

 몇가지 담론이 나오는데,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세명의 노예에게 각각 5달란트, 3달란트, 1달란트를 남기고 주인이 먼 길을 떠나 오랜시간이 흐른 후 돌아오니 그동안 5달란트는 10달란트로, 3달란트는 6달란트로 불렸는데 반하여 1달란트를 받은 노예는 돈을 땅에 묻고 주인이 돌아온 후에 파보니 그냥 1달란트더란 얘기. 다른 동포나 찢어지게 가난한 백성을 착취하지 않고는 돈을 불릴 수 없더란 건데, 주인은 어쨌거나 그간 돈을 불린 두 노예에게 상을 내리더란 거. 여기서 주인은 식민상태를 종식하고 자국으로 돌아간 식민모국과 서구 선진국의 종합상사, 은행, 거대기업 등을 일컫고, 돈을 불린 노예들은 독립한 신생국의 힘있는 도둑과 강도들, 즉 매판자본가들을 비유한다.

 다른 하나의 담론은 표제와 같은 십자가 위의 악마. 난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무식꾼이라 모르지만, 가난한 백성들이 악마를 십자가 위에 못박아 죽였다고 생각했으나 악마가 그리 쉽게 죽으면 그게 악마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지 사흘만에 양복입은 신사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악마를 십자가 위에서 끌어내렸더니 악마는 다시 찬연하게 빛을 발하며 세상의 창공을 날아다니면서 지악스런 마귀짓을 하더란 얘기. 그땐 양복장이 신사들이 사흘이 지난 다음에 몰래 악마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으나 요샌 억눌린 백성들이 힘들게 힘들게 악마를 잡아 십자가에 매달면 양복장이들이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조금도 눈치보지도 않고 그냥 십자가로 달려가 악마를 풀어준다나. 당연히 악마는 서구 자본주의의 대표선수들이고 양복장이들은 제삼세계의 매판자본가들.

 여기에 한술 더 떠 신생 독립국인 아프리카의 모처에선 도둑과 강도들의 대표선수 선발대회가 열리고 대회에 잠입한 노동자, 학생 등의 양심세력은 매판자본가들과 결탁한 경찰, 군인, 사법세력에 의해 거덜이 나는 광경이 장황하게 설파하여, 나로 하여금 이 소설을 '과하게 웅변적'이라고 평가하게 만들었다. 응구기가 김지하의 <오적>을 읽고 조금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이 씬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케냐에 자신타 와링가, 라고 하는 여여쁘고 (당연히) 새까만 아가씨, 아니, 미혼모가 있는데, 어렵게 취직한 무지하게 큰 건설회사에서 속기사 겸 타이피스트로 겨우 며칠을 근무하다가, 사주 영감이 입사 당일부터 은근히 추파를 던지더니 급기야 하루는 겁도없이 덥치고 말았지만, 건강한 아가씨가 늙은 영감 하나를 당해내지 못할손가, 딱부러지게 거절했더니 다음날 해고 당했다. 해고 당한 바로 그날, 그동안 죽네사네 사랑해 마지않던 남자친구 새끼한테 얘길 했더니, 넌 원래가 헤픈 년이구나, 곧바로 이별 통보를 받았고, 다 쓰러져가는 빈민촌의 집구석에 힘없이 도착, 이번엔 임대료 인상에 동의하지 않아서 졸지에 거리로 내쫓기고 만다. 와링가 아가씨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모부의 주선으로 돈 많은 늙은이 하나를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정부가 됐다가 덜컥 임신을 해버렸더니 이 늙은이가 하시는 말씀이, 열 일곱살 먹은 청소년에게 하시는 말씀이, 넌 약도 안 먹고, 루프도 안 하고 도대체 뭘 한 거야?  그 애가 내 아이인줄 어떻게 알아? 해서, 딸을 하나 둔 애엄마. 딸은 지금 외할머니 손에서 잘 자라고 있다.

 또 한 명의 주인공, 당연히 여주인공이자 진짜 주인공인 와링가 아가씨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청년이 등장한다. 거부, 큰 부자의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사업체를 물려받아 경영하기 바라는 아버지의 뜻과는 완전히 반대로 미국에 건너가 음악, 특히 작곡을 전공하고 돌아온 청년이다. 청년은 오선에 표시할 수도 없는 특유의 아프리카 악기와 아프리카 성악을 자신이 공부한 클래식과 융화시켜 거대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하고 노력하는 순진, 열혈파. 난 이 청년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클래식과 아프리카 음악을 훌륭하게 섞어 진짜로 오라토리오를 작곡한 한니발이란 아프리카 사람을 떠올렸다. 바렌보임이 시카고 교향악단을 지휘한 <아프리카의 초상: African Portrait>.

 

지금은 표지 바꾸고 다른 곡 삽입해서 발매하지만, 국내 시장에서 품절이다.

 

 이 음반은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원주민들을 무지막지하게 학살하고, 자원을 약탈해가고, 사람을 산 채로 잡아 유럽과 아메리카에 노예로 파는 세월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화해를 시도하는 거대한 오라토리오로, 재즈와 아프리카 토속음악이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근사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근데, 아프리카, 그중에서도 응구기의 조국 케냐에선 매판자본을 백성들이 효과적으로 몰아내고, 우리의 용감하고 건강한 와링가 아가씨는 죽고 못사는 애인 청년과 근사한 연애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딱 하나의 힌트를 드린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난 주먹을 쥐고 두번째 손가락과 세번째 손가락의 마디로 내 머리통을 한대 쥐어박았다. 아이고 짱구야, 아까 그거 복선이었어, 복선. 그것도 눈치 못챘냐! 하면서. 책을 다 읽고나서야 아까 그게 복선이었다는 걸 알아채게 만드는 소설은, 단언컨데, 잘 쓴 소설이다. 그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