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잡극선 을유세계문학전집 78
관한경 외 지음, 김우석.홍영림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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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漢나라 문, 당唐의 시, 송宋의 사詞, 원元의 곡曲 가운데 (세월 빠르다, 벌써)20년 전에 당시唐詩는 이원섭의 번역으로 읽고 몇 수는 외웠는데, 다른 세 개는 머뭇거리기만 했다. 이번에 기회를 잡았다. 책의 제목 "원잡극선"을 우리식으로 알기 쉽게 쓰자면 '원 (한 칸 띄고) 잡극 (한 칸 띄고) 선' 즉 "원 잡극 선"이 좋다. 즉, 원나라 시대의 잡극 선집이란 말씀. 칭컨데 '원곡'이란 건 들어보기만 했지 '곡'의 형태가 무엇인지는 생각해보지않았다. 물론 곡哭 소리 나는 비탄의 싯구는 아니겠지만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근데 원곡元曲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해 했다면, 아시다시피 내가 또 음악을 대단히 좋아하니, '곡曲'이 '소리와 가락'을 포함하는 예술행위라는 걸 금방 알았으리라.

 여기까지가 책을 읽기 전의 황량한 내 정신상태. 드디어 해설까지 포함해 830 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넘긴다. 첫번째 이야기가 <선비 장우가 바다를 끓이다>. '이호고'의 작품이란다. 장우라는 이름의 선비가 있어 동해(우리나라 서해) 바닷가 근처 한 사찰에 들어 경치가 삼삼하니 풍취가 돋는다. 선비랄 작자는 길을 나설 때 반드시 가지고 다녀야 할 것이, 책, 검, 거문고(또는 가야금) 그리고 뭐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벌써 잊었다. 알고 싶으시면 이 책 사 읽어보시라. 알더라도 다 말해버리면 재미 적으니 기억나지 않는게 오히려 기특하다. 하여간 네 가지 가운데 거문고를 가져오라 하여 득도의 솜씨로 연주를 하며 노래 한 곡조를 뽑는다.


 흐르는 물을 연주하든 높은 산을 연주하든

 종자기가 가버리면 내 연주 알아듣는 이 없으리

 오늘 밤 등불 아래 노래 세 곡 연주하리니

 헤엄치던 물고기 머리 내밀고 들어줄까?


 종자기鍾子期가 누군지 모르시지? 한 마디로 '귀명창'의 대명사. 전국시대 때 백아伯牙(한자 변환 하니까 1번으로 鍾子期, 伯牙가 뜰 정도로 유명짜한 인간들이었으니 좀 외워둬도 좋을 듯)라는 극강의 거문고 연주자가 있었는데 종자기가 백아의 연주를 듣고 한 방에 광팬이 됐단 거.

 하여간 장우의 노래 속에 마지막 줄, "헤엄치던 물로기 머리 내밀고 들어줄끄나" 하자마자 정말로 물고기 인간, 동해바다 용왕님의 세째 딸 '경련'이 연주를 듣고는 단박에 장우한테 반해버린다. 그리하여 용왕님 댁 세째 따님이 연주를 들으면서 노래하는 여러 마디 가운데 하나 만 소개하자면,


 [작답지鵲踏枝]

 패옥 잡아당겨 나는 딩동 소리도 아니고

 처마 밑 풍경의 찰가랑 소리도 아니고

 사찰 승방의 목경 두드리는 댕댕 소리도 아니고

 한 소리, 한 소리 마음 두려워지는데

 아, 바로 띵띠링 오동 나무에 비단줄 소리구나


 이 노래가 대단히 훌륭해서 따온 것이 아니라, 시 앞에 지시어 비슷하게 써놓은 세 글자로 된 걸 읽어보시라. 작답지. '까치가 나뭇가지를 밟듯' 노래하라는 거. 굳이 서양 말로 하자면 알레그로 스케르쪼?

 이걸 보고, 아, 원나라 시대의 잡극이란 것이 기악연주, 노래, 연극을 포함한 종합예술이로구나!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원나라 시대의 잡극이란 건, 연극대본 즉 희곡이 아니라 오페라 대본에 더 가깝다. 이런 것도 있다.


 [육요서 六幺序]

 영락없이 한나라 때 사마상여가 임공臨卭에서 객이 되어

 탁문군 유혹하러 봉황노래 연주하던 그 자태인지라

 나도 모르게 흠모하는 정이 짙게 일어나네

 저 청풍명뭘 세 곡을 들어보라!

 안족은 들끓고

 돌괘는 영롱하도다.


 [요편幺篇]

 슬프기는 기러기 울음 같고

 처절하기는 가을철 귀뚜라미 같고

 교태롭기는 꽃의 자태요

 날래기는 우레의 울림이요.


 육요서. 여섯 개의 짧은 서술(표현) 속에 장우의 외모 또한 절세미녀를 유혹하는 봉황의 자태인데다가 연주마저 얼마나 오줌 지리게 하는지, 안족雁足(기러기발: 거문고 판과 줄 사이에 줄을 받치고 있는 장치)이 펄펄 끓는 거 같고 돌괘마저 영롱한 느낌이 든다니, 참 명기를 신기로 연주하는 절세 미남자아니냐.

 요편. 짧게 얘기해서(글쎄 이렇게 해석하는 게 가당키나 하다면 말이지만), 연주가 슬픔과 처절, 교태와 날램까지 두루 다 포함되어 있으니, 이 신기의 연주를 실제 무대, 대갓집 정원이나 시장바닥이겠지만, 하여간 실제 공연에선 어떻게 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외의 지시어, 비슷한 것들로 재미난 것들이 많다. 하다못해 기생초妓生草도 있다. (<두아의 억울함이 천지를 움직이다>에 나온다) [기생초]는 어떻게 연주 또는 노래하라는 것일까? 암만 궁리해봤자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다.

 원곡元曲이 지금 어떻게 연주되는지 모르겠다. 이후 명과 청조를 지나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바뀌었을 텐데 혹시 베이징 오페라라고 불리는 경극京劇이 이 원곡에서 시작한 거 아닌가?

 아, 지금 경극을 검색해보니 유명 레퍼토리 가운데 <조씨고아趙氏孤兒>라는 것도 있다. 이 책의 11번째 작품이 '기군상'이 쓴 <조씨고아의 위대한 복수>다.


 근데, 희곡과는 달리 오페라 대본을 보고 "진짜 재밌다"라고 하는 사람 못봤다. 음악과 춤과 연기에 대한 정보 없이 대사만 좍 나열되어 있는 대본. 그건 대사를 통한 메시지 전달에 의존하는 연극(희곡)하고는 달리 공연을 해야만 표현되는 풍부한 감정이 완전히 건조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판소리를 글로 읽으면? 무지 재밌다. 글로 전해지는 판소리 가운데엔 <변강쇠전>도 있다. 그건 하도 야해서 판소리로 구전되진 않았지만 한국고전문학전집 비슷한 이름을 단 책 속을 통해 읽어볼 수 있는데, 완전히 뒤집어진다. 심지어 희곡보다 더 재밌다.

 재미있는 순서로 치자면, 판소리 > 희곡 > 오페라 또는 원나라 잡극 대본.

 그러니까 무대 위에서 배우 혹은 소리꾼이 표현의 양식이 간단할수록 그걸 글로 쓴 것이 재밌다는 얘기. 그럼 잡극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없을까?

 천만의 말씀. 인간의 가장 큰 무기 가운데 하나가 상상력이다. 잡극을 보면서 독자는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 수 있다. 내 마음대로 등장인물을 설정하고 연기와 노래와 연주를 연출해가며 읽는 거다. 그야말로 상상 속의 한 편 드라마, 오페라를 만들어내는 작업. 그게 이 책 <원잡극선>을 읽는 방법이다.

 내 경우에 한하지만, DVD를 비롯한 영상물은 한 번 보면 그걸로 끝인 경우가 많은 반면, 오직 시각에 호소하는 CD는 열번, 오십번도 즐겨 듣는 이유. 음악 또는 오페라 또는 판소리를 들으며 오직 나만의 무대, 나 하나를 위한 공연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

 바라건데, 즐기시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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