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책 삼인 시집선 1
유진목 지음 / 삼인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접몽



 빈 방에서 사랑을 했는데

 당신은 어느덧 살림이 되고


 나는 봉지처럼 느슨하게 묶여서

 서랍에 들어 있길 좋아한다


 움켜 쥔 창틀 쪽에서

 매일 밤 돌아오지 않는 꿈을 꾼다


 나는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것보다

 그게 더 슬펐다


 배꼽에 흐르던 당신의 일들


 내게서 당신이 가장 멀리 흐를 때

 나는 오래 덮은 이불 냄새


 우리는 닫힌 채로 집을 나왔다   (20쪽. 전문)



 <접몽>, 어떤 꿈일까? 제목만 딱 보고, 이거 참 중의적인 시가 아닐까 싶었다. 장자莊子가 먼저 생각났다. 나비 꿈을 꿨는데, 내가 나비 꿈을 꾼 거야, 나비가 내 꿈을 꾼 거야? 다른 하나는 이런 접몽. 접몽接夢, 교접하는 꿈. 특히 남자의 경우 몽정이라고 하는 거. 시인 유진목이 여자니까 몽은 오케이, 그러나 정精할 것이 없으니 그냥 접몽, 이라고 하는 것도 괜찮은 시어. 굳이 주장한다면 장자와 섹스詩의 중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주장할 걸 주장해야지, 이건 그냥 사랑과 섹스의 시다. 다시 한 번 시를 읽어보자. 어딘지 읽어본 느낌. 들어본 가요 제목이 문득 생각난다. 공일오비, <아주 오래된 연인들>. TvN의 인기 프로그램 <SNL>에서 싱어송 라이터 윤상이 이 제목을 이렇게 바꿔 얘기했다. <아주 오래 한 연인들>. 아주 딱!


 '(주) 도서출판 삼인'이라는 책 내는 법인이 있다. 펴낸이, 즉 발행인이 신길순. 이 분이 사장일 거 같고, 간행위원으로 황현산, 김혜순, 김정환. 이렇게 적혀있다. 황현산은 평론가. 김혜순은 시인이자 대학 선생(그냥 '선생' 또는 '교사'라고 하고 싶은데, 요샌 언어의 인플레가 심해 대학에서 선생하는 사람들한테 앞에 '대학'을 붙혀 '선생'이라 하거나 '교수' 또는 '교숫님!'하지 않으면 드럽게 싫어한다. 우연히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동, 같은 레인의 아래층 네 집에 대학 선생들이 살아서 아주 쯔~알 안다). 김정환은 이젠 시인이라기보다 잡글 전문가. 하여간 간행위원 세 명이 모여 우리나라에서 시인으로 등단하는 과정에 문제가 크다고 의기투합, 싹수 있는 시인 지망생들의 시를 추려 책을 내주는 행위를 통해 정식 시인으로 만들어준다는 기특한 생각으로 "삼인 시인선"이란 시리즈를 냈다고 한다. 이 <연애의 책>이 시리즈 첫번째.

 '삼인 시인선'의 이런 바람직한 출판 행위는 갈채 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시를 감상하는데 보태거나 빼는 요인이 되면 안 될 것. 계속 유진목의 시를 더 읽어보자. 위의 시 <접몽>의 다음 페이지에 게재된 한 줄 시.



 에밀 졸라


 계속 트랑스를 겪으며 사느니 차라리 몰래 떠나고 싶어 (21쪽. 전문)



 트랑스? 이거 불어인줄 몰랐다. 영어 접두사 'trans'가 생각났고, 이어서 'transportation'이 떠오르니 당연히 우리 말로 '수송'. 그러니 이 시가 지금 뭘 주장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있었겠는가. 미친 척하고 불어 사전을 열고(요샌 불어 사전을 '펴고'가 아니라 '열고'다.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내 불어사전은 지금 어디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trance'를 찾아보니 '불안, 공포, 최면상태, 신들린 상태'라는 뜻 등장. 그래 이거다. 근데 그거하고 에밀 졸라하고 무슨 관계? 에밀 졸라 대신에 그 자리에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도스토옙스키, 마르케스, 심지어 보르헤스를 넣어봐라. 무슨 차이가 나는지. 오히려 도스토옙스키를 대입하면 불안, 공포, 신들린 상태, 최면 상태, 이런 게 훨씬 더 실감난다. 기억하시지? 그의 작품 속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불안, 공포, 섬망, 식은 땀 등등. 시가 후지단 뜻이 아니라 이왕 한 줄 시를 쓰려면 제목, 즉 에밀 졸라를 단 칼에 대표할 수 있는 카피를 썼어야 했던 걸 아닐까,는 의견. 아직 한 줄 시 쓸 짬밥은 아닌 듯. 그게 쉬운 줄 아셔? 이 정도는 되야 하는 겨.



 서울살이


 서울 천리를 와서 가랑잎 하나 줍다 

 박목월, <서울살이> 전문. 외워 쓴 관계로 출처는 아예 기억도 안 남.



 유진목의 시집 <연애의 책>이 나온 것이 2016년. 그러니 나이는 많지만 신인이다. 목월과 비교할 상대가 아니나, 단언컨데 모든 시인의 경쟁자는 과거의 별들, 청록파 3인, 미당, 이런 선배들을 물리치겠다는, 아니면 앞으로 적어도 그들과 어깨를 견줄 시를 써야겠다는 포부가 있어야 할 터. 옛 거장과의 비교는 피할 수 없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아예 시를 쓰지 말든지.


 말이 딴 데로 흘렀다. 다시 <연애의 시>. 여기서 '연애'라 함을 말 그대로 연애로 받아들이지 말자. 사랑? 얼마나 좋아. 연애는 빨리 끝나잖아. 사랑은 좀 더 오래 가고. 물론 '정'만큼이야 질기겠어? '정'만큼이야 더럽겠어? 근데 당신과 나를 여태까지 같이 살게 만들고 앞으로도 같이 살게 만들 거 같은 게 웃기지도 않는 '연애'도 아니고 우라질 '사랑'이긴커녕 드럽게 질긴 그놈의 '정'일 거 같아. 이 시 한 번 읽어보자.



 그믐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과를 주워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아내는 몸을 씼고 일찍 이부자리에 누웠다


 밤에 모과 한 알이 부엌에 놓여 있다


 나는 모과를 훔치려고 더 어두워졌다  28쪽 (전문)



 여기서 '나'는 그믐밤의 어둠. 모과 아시지? 우리 조상들께서는 좀 못생긴 아이 놀릴 때 "꼭 모과덩이 닮은 것"이라고 했다. 생기긴 그렇지만 방에 두면 모과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이 참 그윽하다. 얇게 저며 설탕에 재워 오래 두면 저절로 모과주가 된다. 나 유년 시절에 모과주 마시고 알딸딸해져서 이상하게 걸으면 고모들이 나보고 허벌 웃으셨다. 나, 즉 어둠이 바로 그 모과를 훔치기 위해서 밤을 더 어둡게, 어둡게, 페이드 아웃, 페이드 아웃. 그리하여 밤과 어둠이 안식과 사랑을 위한 어둠으로 되기 위해. 위의 <접몽>도 그렇고 <그믐>도 그렇고, 딱 내 스타일. 난 길고 긴 시는 정말 별로다.


 물론 유진목의 시를 다 좋게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 시집을 산다. 그럼 솔직히 얘기해서 시집 속에 내 맘에 맞아 한 번 외워볼까, 하는 시 두 개만 건지면 본전이고 세 개 건지면 횡재다. 아니 그런가? 나한테 이 시집은 횡재에 해당하는데 마지막 세번째 시를 소개한다.



 한밤



 신발을 이렇게 예쁘게 꺼내놨네


 너하고 나하고 예쁘게 떠나려고  (82쪽, 전문)



 시는 전적으로 읽는 사람, 아니, 감상하는 사람 마음대로다. 너하고 나하고 예쁘게 어디로 떠나? 둘이 좋아하는 걸 양가부모가 지랄맞고 극성맞게 반대해서 걍 보츠와나 공화국으로 도망가듯 이민가는 거야? 아닐 걸. 예쁘게 어디로 떠나느냐, 하면, 밤으로. 빈 방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또 하고, 쉼없이 사랑해서 당신은 어느덧 살림이 되고, 나는 봉지처럼 느슨하게 묶여서 서랍에 들어앉아 있길 좋아하는 상태가 되기 위해, 오늘 밤, 밤 속으로 떠나는 거다. 천만의 말씀이라고? 그랴.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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