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암살자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0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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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책, 많이 읽었다. 내 사전에 전권구입이란 건 없다. 그러니 전부 한 권 한 권 골라 사서 읽었다. 그러나 앞으로 두어달 동안 민음사 세계문학은 목록에 올라오지 않는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참 기념할 만한 세계문학전집이고 다양한 작품을 새로 소개하는 것 등 칭찬할 만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계문학 시리즈와 비교해 책을 너무 함부로 찍어내는 거 같다. 내가 읽는 세계문학 시리즈로 말씀드리자면, 민음사, 문학과지성사, 열린책들, 문학동네, 펭귄클래식코리아, 을유문화사, 창비, 시공사, 동서문화사 등인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다른 출판사는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만큼 탁월하게 앞서나가는 것이 오탈자 발생률이다(열린책들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시공사 <밤은 부드러워>를 빼면). 다른 출판사는 도무지 민음사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다. 물론 오역 여부에 관해선 내가 언급할 사항이 아니라서 함구. 타사의 책은 특정 상품 한 두 권이 대단할, 기가 막힐, 껌벅 넘어갈, 무척 열받을 정도의 형편없는 오탈자 내지는 비문의 향연으로 일관하는데 반하여, 민음사는 아주 균일한 수준으로 책마다 오탈자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독자로 하여금 적어도 각오하고 책을 읽게 만드는 어여쁜 센스는 있다.

 이 책? 역자 차은정. 본고사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당시 본고사 영어 시험에서 빠지지 않고 한 문제는 나왔던 것이, "다음 문장을 우리 말로 바꾸시오". 차은정의 번역이 딱 이 문제의 답안같다. 영어를 정확한 한국말로 그대로 옮기는데 완전 성공한 듯한 문장들. 이 대목에서 "완전 성공한 듯"이라고 표현한 건 정말로 성공했는지 아닌지 내가 원본과 대조해 읽어보지도 않았고, 대조해 읽어봤자 그런지 아닌지도 모를 수준이란 걸 다행스럽게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 (정답지 말고) 본고사 답안지 같은 문장. 거기다가 하나를 더 보태서, 차은정이 국어를 쓸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더 좋은 표현을 사용하고 싶은데 술술 나오는 국어 단어의 갯수에 문제가 있으니 적절하지 않은 단어도 막 집어 넣는다. 근데 자신은 문제의 단어가 틀리는 줄 모르니까 자체 퇴고과정은 무사 통과. 거기다가 낮은 급여로 인해 열의도 없는 데다가 불평불만이 꽉 차 있는 교정자의 국어 실력도 거기서 거기에다, 소프트웨어 아래한글의 검색과정에서도 하여간 단어는 틀린 말이 아니니 문맥상 쓰면 안되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무사통과. 역자-교정자-소프트웨어, 기가막힌 트라이앵글. 삼각형이라고 다 변증법인줄 아시나? 천만의 말씀.

 거기다가 하나만 더 보태면, 자신 없으면 제발 사전 좀 찾아보고 한자를 보태라는 것. 내가 변태라서 이 단어를 고른 건 아니고 지금 딱 생각나는 게 이거라서 첨언하는 것인데 (당신들도 나이 먹어봐라, 한 단어 떠올리는데 삼박 사일 걸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나마 고른 것도 다행이다) 남자 또는 여자, 그중에서 특히 여자의 다리 사이에 있는 기관을 일컫는 말 '음부'를 굳이 '음부(淫部)' 이렇게 써놓는 거. '음부(淫部)'라는 단어, 난 첨봤다. 인간의 다리 사이가 생전 햇빛을 볼 일이 없어서 그늘 진 부분, 어두운 부분이란 뜻으로 음부陰部라고 쓴다고 배웠고 그게 맞다. '음부(淫部)'라고 쓰는 여자는 진짜 무식한 경우고, 그렇게 쓰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는 여혐자다. '음부(淫部)'는 남녀의 성기, 특히 여성의 성기를 '음란한 기관'으로만 특정할 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이쯤에서 분명하게 얘기하고 넘어가자. 난 지금 역자 차은정의 영어실력에 관해 까탈을 잡아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다. 그가 번역한 기막히게 재미난 텍스트 <눈먼 암살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데 번역의 영향으로 줄거리가 이상하게 뒤틀린다거나, 아까 한 얘기가 이상하게 꼬여 흐르거나 그런 점은 없다. 난 이이가 번역한 <눈먼...>을 읽고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다고 작정을 해서 찾아봤더니 차은정의 번역이 제일 많다. 아, 고민 중. 왜냐하면, 한국어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여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 이런 책들이 거의 그렇듯 앞쪽에서 가독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다가 독자도 모르게 의례 그러려니 읽어나가게 되고 그러면 그냥 툴툴거리면서 끝까지 다 읽는다. 가끔 욕도 한 마디씩 하는 건 당연하지만.

 서두가 오지게 길었는데 이제 책 얘기하자.

 무조건 강추. 진짜 재미난 책. 2017년 6월에 재미난 책 참 많이 읽는다. 여태까지 써놓은 역자의 문제 때문에 별 다섯개 만점을 줄 수는 없지만 소설책 읽기 좋아하시는 분들한테는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겠다.

 1910년대 후반에 태어나 책의 현재시점인 1990년대 말까지 생존해 있는 아이리스라는 이름의 할매가 주인공이다. 소설은 좀 복잡한 구조를 띤다. 아이리스의 동생 로라, 1945년 8월에 교량 공사중이던 낭떠러지 아래로 자기 것도 아닌 언니 차를 과속, 전속력으로 몰아 추락해 온몸이 불에 타 죽는다. 델마와 루이스? 아니, '로라'라니까. '로라'하면 떠오르는 것이? 옙. <인형의 집>. 굳이 그 로라와 비슷한 점을 꼽으라면 자신을 찾기 위해 집을 나왔다는 거. 근데 이 로라는 여성의 권리나 자존 대신 인생을 통째로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했다는 거. 오직 하나, 캐나다를 비롯해 영어권의 독자와 비평계에 큰 발자국을 남긴 <눈먼 암살자>라는 책을 한 권 사후 출판으로 남기고 죽었다는 거. 로라가 죽은지 5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 또는 팬들은 끊임없이 로라의 무덤까지 찾아와 그녀를 기념하며 헌화한다.

 꼬부랑 노파이자 로라의 친언니 아이리스는 지팡이를 짚어가며 간혹 로라를 비롯한 가족묘를 찾아 돌보기도 하는데 비록 50년 전에 죽었다 하더라도 자매간의 오묘한 질투심으로 헌화한 꽃을 사납게 쓰레기통에 던져넣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쓸쓸하게 로라의 묘비를 손바닥으로 쓸어보기도 한다. 그림이 그려질 듯.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리스가 지난 날을 회상하며 싸구려 볼펜 하나로 시간날 때마다 낡은 노트에 손수 써내려간 회상록. 그걸 읽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건데, 속에 로라의 작품 <눈먼 암살자>의 여러 부분이 섞여가며 중의적 작품이 되며 독자로 하여금 책의 결론이 어떻게 날까, 궁금하게 만드는 효과를 낸 수작. 조금 건방지게 말하면 독서훈련이 좀 된 독자들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2권 중반쯤엔 노파의 글쓰기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리라 짐작하는데, 그래도 끝까지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추측한 책의 결말이 정말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거, 진짜 책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만들어놓은 트랩에 빠지지 않고 결말을 추리했는데 그게 정말로 맞으면 그 짜리리한 쾌감. 한 번 느껴보시라. 그건 좋은데 정작 트랩에 갇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작가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진짜다. 읽어보시라).

 "Trapped? Masturb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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