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흥미로운 요소와 사회적 여러 문제, 개인의 자존감에 관한 굵직한 주제를 품고 있지만 읽기엔 좀 불편한 책. 신뢰할 만한 부커 상을 수상한 작품. 내가 읽기에 불편하다는 것일 뿐 사소하고 얇은 이 독후감만 읽고 일독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바람.

 1994년 4월,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함으로써 아라파트헤이트를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흘려보낸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지만 여전히 국부國富의 대부분은 네덜란드나 영국계 백인이 틀어쥐고 있던 상황. 이름하여 아프리카너. 정서상 유럽과 긴밀한 유대감을 갖고 있던/있는 이들은 정치적 측면 말고는 각계 각층의 최고 지도부를 몽땅 점령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인물, 데이비드 루리. 쉰 두 살. 매주 화요일 오후 아주 괜찮은 여인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섹스를 사는 것으로 적절하게 삶이란 톱니바퀴에 윤활유를 공급하던 잘 생긴 외모의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

 어느 날 퇴근하다가 평소에 잘 다니지 않았던 길로 접어든 그는(문제는 언제나 하던대로 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외면한 이 지성인이) 앞에서 마치 열두 살 먹은 계집아이의 것같은 엉덩이를 옴찔옴찔 움직이며 가고 있던 같은 과 학생 멜라니를 만나 점심 한 그릇 사주고, 어때 집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실까? 뻔한 수작 끝에, 안돼요, 안돼요를 립 서비스로 생각하면서 약간, 정말 약간의 저항을 가볍게 물리치고, 독자, 그중에서도 남자 독자의 입장에선 바람직하진 않지만 적어도 강제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는 방법, 즉 적극적으로 합의하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 다 모든 일에 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란 측면으로 관찰할 때는 그나마 불법적이지 않았다는 의견을 낼 수 있을 정도의 방법으로, 한 번 했다. 그때 딱 한 번으로 그쳐야 했으나 그게 마음 먹은대로 되는 일이 본래부터 아니라서 몇번에 걸쳐 관계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런 거다. 아시는 분은 아실겨.

 다 커서 이미 성인이 된 여성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전적으로 본인 책임 아래 있지만 이제 그놈의 우라질 법적 성인의 테두리에 갓 전입한 여성이 쉰 두 살의 교수와 관계 했다는 건 사실 아름답지는 않을 텐데, 내 생각에 더 큰 문제는 교수가 댓가로 출석과 성적에 관해 부당하게 높은 평가를 했다는 거. 거기다가 멜라니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골치 아프게 남친이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어서 학생도 아닌 것이 자기 수업에 들어와 깽판 비슷하게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 그 후 멜라니 본인의 의지라고는 전혀 읽히지 않지만(아무리 법적 성인이라도 아직도 열 두 살짜리 계집아이의 엉덩이를 갖고 있는 풋내나는 아가씨란 점을 감안하면 분명히 아니겠지만) 어쨌든 주위의 충동에 의해 한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의지인지 하여간에 멜라니는 데이비드 루리 교수를 지위를 이용한 성희롱 또는 성폭행으로 학교 윤리위원회에 제소해버렸다.

 데이비드 루리. 끝났다.

 무대가 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분리정책이 사라지자 그간 백인의 억압에 의하여 아슬아슬하게 지켜지던 사회질서가 한 방에 무너져버려, 그동안의 질서 속에서 살던 백인의 입장에선 무시무시한 무법천지로 돌변했다고 여기는 반면, 흑인의 입장에선 비록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범죄가 만연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속박하던 규정에서 벗어나 역사상 최초의 자유를 즐기고 있었던 거다. 아울러 남아프리카 지역 내에서의 사고방식, 행동규범이랄까 행동양식이랄까를 포함한 생존을 위한 거의 모든 사고방식 역시 송두리째 변화하고 있던 시점. 데이비드는 심신의 안돈을 위하여 시골에 정착해 사는 딸 루시의 집으로 잠시 거처를 옮긴다.

 남아프리카에서 목장을 경영하며 땅에 맨발을 딛고 살고 싶어하는 루시. 그녀가 겪고 있고 앞으로 겪어야 할 아프리카의 새로운 파도 또는 충격이 무엇이고, 그걸 극복해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곳곳에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지뢰가 묻힌 땅. 반드시 지뢰지역을 맨발로 건너야하는 숙명. 그게 데이비드와 루시 부녀가 걸어야할 길이라고? 당신과 내가 걸어야할 길이기도 하다. 정신차려! 까딱하다간 끝장이야. 물론 아무리 정신을 차리더라도 별 소용이 없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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