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 시인선 401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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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표제는 《슬픔치약 거울크림》이라고 표기하고 각 시의 제목은 <구름의 노스텔지아> 이런 식으로 써야 마땅하나 그딴 거 구분하지 않고 다 <우짜구저짜구....> 이렇게 쓰겠다. 특수문자 골라오기 귀찮아서.

 

 

 

 이이의 시는 아주 가끔 읽어봤을 뿐이다. 1979년 스물 네살 아가씨 시절에 데뷔한 이래 아직까지 꾸준하게 시집을 간행하는 저력있는 시인, 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 전부터 이이의 시집을 한 번 읽어볼까 했는데 어째 손이 가질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읽게 됐다.

 <슬픔치약 거울크림>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나처럼 시에 대해 일천한 사람은 지금 뭔 말을 하고 있는지 아리송하기 짝이 없는 초현실적 수수께끼와 많이 배우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장난으로 채웠다. 나처럼 보통의 인간은 (아, 내 경우엔 애초부터 우울증 기질이 좀 있긴 하다) 기분이 저조하여 지금 내가 우울하구나, 이렇게 인식을 하지만 높은 단계에 있는 시인의 경우엔 그러지 아니한다. '높은 단계의 시인'의 우울은 일반 어린 백셩의 우울과 같지 아니하여 '우'와 '울'이 서로 교통하여 문학적 댓구를 이루기도 하고 때론 음악적으로 카운터포인트 즉 대위법적 화성을 만들어낸다. 문학적 댓구의 경우를 보면, 이 시집에서 첫번째 등장하는 시이기도 한데, "우는 구름을 덮고, 울은 그림자를 덮었네 / 우는 바람에 시달리고, 울은 바다에 매달렸네"(<우가 울에게> 부분 11~13쪽) 이런 식. 대위법적 화성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경우. "우는 산산이고, 울은 조각이고 / 우는 풍비이고, 울은 박산이고"(같은 시). 이런 '우'와 '울'의 댓구 또는 카운터포인트는 무려 세 페이지에 걸쳐 계속된다. 다 좋은데 문제는 나같이 무식한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건데, 또는 질문하건데, "근데 뭘 주장하는 거야?" 김혜순의 초현실적 초감각적 시각은 대상을 불문하고 도처에서 반짝인다. "눈뜨고 그냥 있는 거다. 멍하니란 말 참 좋다. / 멍하니? 멍하다. / 잠수부 아줌마가 있다. / 25미터 산소줄을 잠수복에 매고 / 우주인 같은 철모를 쓰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 키조개를 줍는다. / 하루 8시간 심해 속을 걸어 다닌다." (<안경은 말한다> 부분 12~14쪽) 비단 시인뿐이겠느냐만 갑자기 멍때리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시인은 TV에서 봤던 잠수부 아줌마가 떠오르고 바닷속의 압력과 좁은 시야를 자신의 멍한 순간과 합치시킨다. 물론 우리는 초감각적 시를 읽는 착한 독자의 입장에서 시인은 일상 생활 혹은 시를 쓰는 행위 중에 가끔 멍한 순간이고, 잠수부 아줌마는 일상화된 수압으로 하여금 심각한 심혈관 계통의 질환을 무릅써야 하는 노동을 하고 있는 순간이라는 주장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이런 초현실적, 초감각적 엽기 잔혹의 극치는 <유리우리>에서 볼 수 있다. 유리우리? 이게 뭔 뜻인지 헷갈리시지? 척 보고 아시겠으면 나보단 시적으로 아주 높은 이해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난 몰랐다. 하지만 곧바로 나온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가득 찬 우물 속에서 자맥질을 하고 있어. / 아, 갈기갈기 울고 싶은 이 마음은 이 우물이 나에게 준 것. / 카페가 울어. 잔도 울고, 병도 울고, 화초도 울고, 웨이터의 앞치마도 울어. / 깨진 유리를 우산으로 받고 선 소녀가 아까부터 창문에 붙어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어. / 먼 옛날 내가 갖고 싶던 것들은 다 진열장 속에 있었어. / 그래서 그런지 유리 안에 든 것들은 일단 다 무서웠어. / 이 술이 무섭니? 왜 무섭니? 저 빵이 무섭니? 왜 무섭니? 유리창에 담긴 / 사람들이 무섭니? 왜 무섭니? 유리창 속에 담긴 / 사람들이 무섭니? 왜 무섭니? 애인들은 물었어." (<유리우리> 부분. 44~46쪽) 글쎄. 깨진 유리로 가득 찬 우물 속에 자맥질을 해?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 우물 깊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충분히 깊기만 하다면 사람 몸에 달려있던 껍데기는 홀다당 다 까질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사실 당신이 겪고 있는 삶의 고통에 비하면 그리 심각해보이지도 않는 고통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고, 또 그게 아픔에 대한 대단한 비유이긴 한데, 독자는 으째 으스스 엽기 괴기 잔혹 영화, 시인이 등단하기도 전에 나온 클래식 공포영화 <오멘>을 보는 거 같다. 독자가 그렇게 느낄 지는 전혀 몰랐겠지. 유리창이 깨져 깨진 유리 조각이 아래로 떨어지며 사람의 팔뚝을 아작내는 걸 시인이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을까? 없다는 데 만원 건다. 그러니 유리조각이 가득한 우물로 자맥질한다는 표현이 나오지. 스물네 살에 시인이 되어 이날 입때까정 유명시인의 계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뭐가 그리 고통스럽고 우울할까. 아, 알아, 알아. 세상의 누가 있어서 고통스럽지 않고 우울하지 않겠어. 나름대로 다 그런 것이지. 근데 좀 적당히 엄살을 피우라고. 물론 자신의 고통이나 우울이나 삶의 지겨움이나 권태를 이것 저것에 비유하여 푹푹 삶아내는 직업이 시인이긴 하지만, 김혜순 시인의 작업을 읽고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앞으론 차라리 논문을 썼으면 좋겠다는 거. 앗! 이렇게 얘기했다가 이이를 사사한 숱한 시인과 시인 지망생들이 와르르 모여 그 사람들한테 각각 한 대 만 얻어터진다 해도, 금새 맞아 죽을 거 같은데 이걸 어째? 싹 지우고 말까? 큰일이다.

 2부는 AI, 요새 유행하는 알파고 같은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아니라 조류 인플루엔자를 얘기하는 건데, 오리, 닭, 거위, 타조? 같은 날짐승에 관한 비가 뿐 아니라 구제역과 광우병 등으로 인한 길짐승에 대한 살처분, 숱한 생명을 한 방에 생매장해 죽이는 비극성을 주제로 엮었다. 근데 정말 웃긴 것은 일부 염병할 평론가들이 이걸 읽고 살처분 당하는 축생들을 보고 사바세계 인간의 짓밟히는 광경으로 (고의겠지? 설마 그 의견을 진짜 그렇게 읽고 의견을 내는 것이겠어?) 오독하는 지경에 다달아, 이이의 다른 시집 《피어라 돼지》를 5.18 문학상으로 찍어주었다고 한다. 물론 시인이 정중하게 사양하여 상을 받지 않는 코미디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왕 조류 인플루엔자로 인한 조류 살처분에 관한 시를 쓸 거라면 새에 관해 공부를 좀 하시지, 많이는 아니고 조금 안타까웠다. 아마 시인은 아직도 모를 것이다. 새의 수놈에겐 페니스가 없다는 걸. 평생 날아다니느라 조금이라도 몸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1년중 극히 짧은 시간에만 필요한 페니스 따위의 무게를 감당하고 1년 내내 비행할 이유가 없어서 스스로 페니스가 없는 방향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어? 근데 KBS 제1방송에서 송출하는 <동물의 왕국>에서 새들의 교미장면을 보셨다고? 아무렴. 새들은 그거 대신에 생식강이라고 하여 작은 구멍만 뚫려 있어서 유사시 암수 새들이 서로 생식강을 마주 대고 정액을 뿌리는 걸로 짧은 섹스를 마친다. 못 믿겠으면 하루종일 날아가는 새 쳐다보시라. 진짜 있는지 없는지. 시인은 2부의 <나무들 파티>에서 "청소부가 피티걸에게 꽃무늬 소파를 짊어지고 / 너의 그 넓디넓은 성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 청소부가 파티걸을 소파에 실어주었다 / 청소부가 파티걸을 숲 속에 버려주었다 / 파티걸이 무거운 소파를 숲 속에 내려놓자 / 새들이 소파에 오줌을 싸고 갔다" (<나무들 파티> 부분 82~84쪽)이라고 노래한다. 하지만 새들은 오줌을 싸지 않는다. 시인이 오줌을 누니까 새들도 오줌을 누는 거 같지? 시인은 요소를 방출하고 새는 시인보다 비뇨기적 측면에선 훨씬 진화하여 요산을 방출한다. 분뇨가 함께 배설되며 그래서 새똥이 언제나 묽은 거. 몰랐나보다.

 2부의 마지막 작품, 무려 35쪽에 이르는 장시 <맨홀 인류>를 아무 감흥 없이 읽고 3부로 넘어가면, 시인이 고등학교인지 대학인지 하여간 교사생활을 하는 장면, 자신의 학생시절과 비교하기도 하고, 요새 학생들 모습을 그리기도 하는 시들을 소개한다.

 김혜순 시인이 우리나라에서 방귀 깨나 뀌는 시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맨 앞에서 얘기하듯, 시인의 시들은 몇 개 간혹 읽기는 했지만 시집을 사서 전편을 다 훑어본 건 처음이다. 시가 대체로 길다. 사람마다 다 호오가 있겠으나, 시 독법에 관해 별 의견이 없는 내 생각으로 말하자면, 왜 언어를 낭비할까? 라는 의문. 물론 시가 잘 팔려서 아직도 왕성한 시 창작을 하고 있겠으나, 더욱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시들이 어째 인쇄기에서 팍팍 찍어져 나오는 느낌.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이건 시에 관해 전혀 조예가 없는 사람의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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