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재미난 책. 공산주의 치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이렇게 통쾌한 풍자가 있었다니 역시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법으로도 막지 못하는 법이다. 체코 출신의 코스모폴리탄, 잘난 척의 최고 권위자 밀란 쿤데라처럼 조국에서 도망쳐 다른 나라 언어로 체코 체제의 부조리를 고발한 것이 아니라 프라하에 딱 개기고 서서 소설을 출간할 때마다 '출판금지' 조치에 얻어터져가며 꿋꿋하게 버티어낸 깡다구의 소설가. 우울이나 상실이나 소외나 실패, 하여간 체제로 하여금 도무지 기분좋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들을 해학과 유머 그것도 뼈있는 농담으로 얼버무리는 흐라발의 펜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그의 작품은 딱 두개, <영국...>과 며칠 있다가 읽을 단편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둘 말고 없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하나 더 있으나 지금 품절이고 언제 다시 찍을 지는 알 도리가 없다.

 '디테'란 이름의 키가 매우 작은 보통의 남자가 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이야기마다 "오늘 하는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로 시작해 "오늘은 여기까지. 재미나게 읽으셨나요?",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써 있다. 짧게 말해 한 인간의 인생 스토리인 셈. 가난한 시골 출신의 디테가 돈을 벌기 위해 프라하 호텔 견습 웨이터로 취직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웨이터란 직업은 본문의 첫 페이지에 나오듯이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으면서도 "모든 것을 봐야 하면 모든 것을 들어야"하는 직종이란다. 당연하다. 서비스 직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바로 이것. 아무것도 안 봤고 안 들었으나 모든 것을 보며 모든 것을 듣는 능력. 지금 쓴 문장을 잘 보시라. 처음의 보고 듣는 것은 과거의 일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보고 듣는 일은 현재의 것이다. 이거 잘해서 우리나라 서비스 업계의 최고 자리에 오른 사람이 누구? 그이의 이름은 잊었으나 기억하건데 전직 요정 삼청각 사장 언니. 많고 많은 요정집 가운데 독립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한 다음 유독 삼청각에 정치, 경제, 즉 권력자와 부르주아들이 모여든 건 우연이 아니었으니 그집에서 밥 먹고 사는 종업원 거의 다가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의 달인들이었던 때문이다. 그렇게 교육을, 지독하게, 받아서.

 디테가 진짜 생존했던 사람이라면 그이의 손금을 한 번 보고싶다. 손금이 어떻게 그어져 있기에 그리도 돈복이 터졌는지. 첫직장 프라하 호텔에선 기차 정거장으로 파견 나가서 프라하 호텔에서 만든 즉석 김밥, 떡볶이, 순대, 오뎅, 호떡, 이런 걸 파는 일을 맡았다. 처음엔 진짜 우연하게, 5만원 짜리를 낸 손님한테 줄 거스름돈을 막 세고 있었다. 근데 열차가 빽! 울더니 조금씩 덜컹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다. 왼손에 떡볶이 한 봉지를 들고 있던 손님이 한 번은 열차를 쳐다보다 한 번은 디테를 내려다보다 막 신경질을 냈고, 열차와 디테를 바라보려 돌리는 고갯짓의 사이클타임이 점점 빨라졌는데도 디테가 아직 거스름돈을 다 세지 못하자 욕을 한 바탕 쏟아내더니 기어이 포기하고 열차에 오르는 거 아니겠는가. 이거다! 이후로 순대 한 접시 먹은 손님이 만일 5만원짜리를 내면 일부러 허둥지둥, 거스름돈을 찾는 시늉을 내며 "일단 먼저 타세요. 그럼 제가 가져다 드릴 테니 창문 밖으로 받으시면 되잖아요." 라고 하면 영낙없이 손님은 일단 열차에 오르는 거다. 디테는 그래도 천천히 거스름돈을 세다가 드디어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손님이 창 밖으로 고개를 한 없이 내밀었을 때, 돈을 오른 손에 들고 뛰기 시작한다. 손님의 손이 돈에 닿을락말락 닿을락말락 하다가 기어이 손은 멀어지고, 그럼 그게 다 디테의 주머니에 들어가게 되는 건 물론이었다.

 당연히 이런 사소한 것 때문은 아니었다. 디테, 열 다섯 아이가 돈이 생기면 그걸로 뭘 하려고. 천만에! 디테의 직장이 동네에서 돈 깨나 만지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닌가. 그들이 사업계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하면 프라하 호텔에 와서 한 잔 거하게 들이켜고 꼭 가는 곳이 있다. 사청각. 한국에 삼청각이 있는데 체고에 사청각이 있으면 어디 덧나? 이름을 잊어서 그렇게 부르고자 하니 양해 바람. 디테가 곰곰 생각해보고 침대 밑에 꿍쳐놓은 지폐 꾸러미를 들고 어느날 하루 사청각에 들른다. 아, 돈의 힘이란! 자신이 프라하 호텔에서 손님에게 서빙하는 것과 같이 사청각의 주인이자 지배인, 그리고 종업원 아가씨는 디테를 천상의 하느님으로 여기면서 최고급 샴페인이라고 속인 탄산음료를 마시며 디테에게 청구서를 내민다. 어쨌거나 구름 속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환대 속에서 열 다섯살 총각 딱지를 뗀 디테. 이날 가슴 속에 굳은 결심을 하니, 바로 백만장자가 되자는 것.

 그리하여 드디어 프라하 최고의 호텔 '호텔 파리'에 입성한 디테. 여기서 홀 수석 웨이터의 밑으로 들어가는데, 수석 웨이터는 손님이 탁, 들어오면 척, 한 번 보는 걸로 손님의 고향, 직업, 호주머니 상태 등을 다 꿰뚫고 있는 거다. 하도 신기해서 수석님,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데요? 하고 물어본 디테. 수석 웨이터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내가 영국 왕을 모셨지."

 영국 왕을 모신 몸이란 것. 영국의 왕을 모셨기 때문에 그런 능력이 생긴 것이란 뜻인지, 왕을 모실만큼 능력이 있다는 것인지 아주 애매모호하지만 하여간 수석 웨이터에겐 특별한 이력이 있다. 영국 왕을 모셨다는 거.

 그게 뭘까. 다들 그런 거 하나 씩은 가지고 있을 거다. 내가 왕년엔 말야, 뭐 이딴 거. 나도 좀 있지만 이 책 읽은 담부터 다신 입끝에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걸로 끝이냐고? 천만에. 이제 겨우 이 재미난 소설 <영국 왕을 모셨지>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뿐이다. 진짜 재미는 위에서 얘기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니 그걸 즐기기 위해선 꼭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셔야 알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난 이 책의 십분의 일도 얘기하지 않았다.

 재미? 재미가 있기 때문에 근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이 책을 출판금지 시켰다고 생각하시나? 궁금하시지? 그게 뭔지,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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