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마르 열린책들 세계문학 173
나기브 마푸즈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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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중원문화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나기브 마푸즈의 소설 <우리동네 아이들> 정성호 번역을 사서 아직 표지도 들추지 않았는데 민음사가 같은 소설을 배혜경의 번역으로 발매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정성호를 경원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정성호는 영문학 전공으로 이집트 소설가의 작품을 중역한 것이고, 배혜경은 직역을 한 것. 당신 같으면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더구나 정성호 역은 중역본, 훨 먼저 발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격까지 비싸다. 정가 기준 1권은 2,000원 2권은 1,500원. 왜 열을 내느냐 하면, 세계 유수의 선정기관들이 빠짐없이 마푸즈의 <우리동네 아이들>를 100대 소설이라느니 하는 목록에 빠짐없이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아시리라. 내가 속물이란 걸. 그러니 배가 아프겠어 안 아프겠어. 읽은 결과, 아담, 모세, 예수, 모하메드, 그리고 (백퍼 내 생각으로)니체, 다섯 인간(또는 요괴인간 또는 반인반신 또는 하느님의 아들 또는 사람의 아들 또는 망치를 든 철학자)에 관한 우화적 구라를 푼 책. 중역이라서 그랬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으나 <우리 동네...>가 그리 특징적으로 다가오지 않아 그의 다른 소설 딱 한 권을 더 읽고 마푸즈를 계속 읽을지 때려 치울지 결정을 하고자 선택한 것이 바로 <미라마르>였던 거다.

 책을 딱 펼쳐보니, 아, 멀리 아득한 동경을 담은 도시 알렉산드리아.

 그곳에 한때는 고급 팬션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이제 많이 쇠락한 하숙집 미라마르. 역시 한 시절 기품있는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광휘가 넘쳐흘렀던, 그러나 이미 늙어 어깨가 굽고, 화사한 금발은 틀림없이 염색을 한 것이고, 손과 팔뚝의 살갗 아래로 정맥이 비치고, 입가에 주름이 낀 것으로 보아 적어도 예순 다섯살은 돼보이는 마리아나, 숱한 세월동안 한 남자로 하여금 가슴 속에 품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그리스 출신의 마리아나가 미라마르 팬션을 여전히 운영하고 있다.

 비록 어느 한 순간은 마리아나를 추억하지 않았겠지만 수십년의 세월 동안, 1919년 영국의 식민지배에 항거하기 위해 민족주의 혁명에 기꺼이 몸을 던졌으나 1952년 이름도 수상한 나세르와 자유장교단에 의한 쿠데타로 정치적 지위도 잃고, 아울러 명성과 재산까지 몽땅 털려버린, 그러나 남은 재산을 남은 생애만큼은 여유있게 쓸만큼은 되는, 그리고 더 남은 것이라고는 푸른 눈의 그리스 미인 마리아나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밖엔 없는, 퇴직 정치인 아메르 와그디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미라마르 팬션에 드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수십년의 그리움이여. 하지만 세월은 흐르는 것. 시간의 손톱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간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들은 전혀 옛시절의 연정을 다시 이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명한 늙은이들. 그들은 그저 가끔 시간이 나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같이 듣고, 지중해 날씨를 즐기며, 밤의 대화를 한다.

 나세르 정권은 시류 속에서 약한 수준의 사회주의를 채택, 일단의 부르주아들이 갖고 있는 재산을 몰수하는 작업을 진행하였지만, 거의 모든 부르주아들은 재산의 많은 부분을 이미 다른 곳으로 빼돌린 상태. 언제나 부르주아들은 그냥 앉아서 당하진 않았던 거다. 겉으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해 거덜이 난 것으로 보이나 사우디 아라비아로 시집간 딸에게 많은 재산을 빼돌린 것처럼 보이는 거덜난 구닥다리 부르주아 톨바 마주르끄가 또다른 하숙인으로 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거기다가 여태 숙박인 하나 없던 팬션에 갑자기 세 명의 젊은 손님이 들이닥치니, 말로는 넓은 땅을 몰수당하지 않고 지켜냈다고 하는 지방 유지이자 자칭 부자(같이 보이는) 호스니 알람. 고위 경찰로 막강한 권력을 향유하는 형을 둔 사회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이자 약간의 정신질환, 그것도 (내가 보기엔)심각한 범죄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평소엔)선량하기 그지없는 정신질환자 만수르 바히. 그리고 잘 생긴 건달이자 놈팽이이자 쓰레기, 그래서 가히 한 소설의 주인공 감이긴 한데 이 소설에선 주인공의 자리엔 오르지 못하는 사르한 알베헤이리.

 노인 셋, 젊은이 셋. 이렇게만? 하나 빠진 게 있다.

 그건 바로 아름다운 젊은 여성. 오라버니가 이빨 다 빠진 동네 할아비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신의 땅까지 포기하고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쳐 미라마르 팬션에 하녀로 취직한 조라.

 그리하여 작품은 조라를 둘러싼 진짜와 가짜 사랑. 이를 둘러싼 눈길들의 안타까움과 냉정함의 교차로 구성되어 있다. 젊은이들의 혼돈과 사랑, 이를 둘러싼 이집트 현대사의 암울한 정경, 이런 풍경들이 소설 속에 섞여 알싸하게 만든다. 결국 마푸즈의 소설을 더 읽을지는 이이의 작품을 하나 더 읽어본 후 결정하기로 했다.

 재미있는 책.



 * 참고로 이집트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해준 소설이 있어 소개.

  

   치과의사 알라 알아스와니가 쓴 소설 <시카고>. 겁나 재밌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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