왑샷 가문 몰락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3
존 치버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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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왑샷 가문 연대기>를 읽어보신 분은 치버의 <왑샷 가문 몰락기>를 그냥 건너뛰기 힘들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만큼 재미나는 연작 장편. <....몰락기>에선 <...연대기>의 주인공 리앤더가 한편으론 난데없이 엉뚱하고 한편으론 낭만적이다 싶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후 그의 늙은 여동생 오노라 왑샷이 조그마한 시골 바닷가 세인트보톨프스의 막강한 유지로 등장한다. 저 대서양 건너 영국의 록스포드에 살았던 빌로우스 여사, 시도 때도 없이 충실한 하녀 플로오오오오오렌스! 를 외치면서 동네 경찰서장, 주임목사, 학교 교장, 상인연합회장 등의 의견을 여지없이 묵살해버렸던 빌로우스 여사와 무지 비슷한 캘릭터라고 생각하시면 오차 없을 듯. 하여간 세인트보톨프스의 레이디 오노라 왑샷한테는 조카 둘이 있었는데 둘 다 죽은 리앤더의 아들들로 일찌기 왑샷 여사께서 둘 다 대처로 나가 반드시 성공해 금의환향하라는 엄명을 때려놓은 상태. 그래서 큰 조카 모지스는 도시로, 작은 조카 코벌리는 핵폭탄(을 은유하는 극한 냉전시대의 가공할 만한 무기)을 연구하는 사막 근처 기지에 직장을 얻어 생활을 하는데, 제목이 '몰락기'라고 했으니 궁극적으로 둘이 인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망가뜨리느냐 하는 데 촛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결론을 말하면 왑샷 가문은 말 그대로 산산히 부서져버린다. 정말? 아니, 천만의 말씀. 생물학적으로 몰락이라고 함은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가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단어인데, 오노라 여사는 뭐 그렇다고 쳐도 조카 둘 다 어쨌든 자신의 Y염색체를 이어나가는 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사회적으론 모지스의 경우, ………… '작가 치버와 비슷하게' 라고 그의 망가지는 과정에 관해 몇 줄 썼다가 지웠다. 사실 이 재미있는 소설의 제목이 '몰락기'라고 되어 있지만 않았다면 오노라의 두 조카가 망가지는지 성공을 하는지 내색도 하지 않고 시침 뚝 떼고 독후감을 쓰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그건 일찌감치 글렀다. 하지만 어떻게 망가지는지에 관해서는 '양심상' 여기다 밝힐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오노라 왑샷 여사의 몰락에 관해선 뭐, 이 정도야.

 그녀는 난데없이 탈세의 죄목으로 인생이 끝날 위기에 처한다. 옛날 여성 오노라는 많은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 가볍지 아니한 세금을 내야 한다는 걸, 당연히 이해는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비슷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돈을 받는 게, 내가 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데 뭐 어때서? 이 의미가 아니라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도무지 진짜로 실행할 생각은 못하는 딱 그런 세대의 대표선수였다는 의미. 그리하여 동네에 같이 늙어가는 지방판사의 조언을 듣고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니 바로 해외도피. 그러나 다 늙은 할머니가 홀로 해외도피를 한 들 그게 맘먹은 대로 쉽나? 이제는 바닷가의 쓰러져가는 집에서 유령으로 출몰하는데 만족하는 그이의 동생 리앤더 왑샷을 만나러 가는 길 말고는 남지 않게 된다.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리앤더의 유령. 모잽이 수영으로 저 먼 바다로 헤엄쳐간 리앤더는 자신이 살던 집에 가끔 출몰해서 아들 둘이 똑같은 지분을 갖고 있는, 한땐 제법 규모도 크고 가격도 만만치 않던 집의 월세값 혹은 집값을 뚝! 떨어뜨리기만 한다. 유령출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둘째 아들 코벌리가 하루는 영 터무니 없는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옛 고향을 한 번 들렀다가 우연히 옛집에서 하루밤 잠을 자러 들렀는데, 왑샷가문이 뭔 햄릿 가문인 거 처럼 코벌리의 아버지가 쿵쿵쿵 마루장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코벌리 앞에 우뚝 섰다가 또 쿵쿵 걸어가지만, 확실한 건 코벌리는 죽었다 깨도 햄릿이 아니라서 아버지의 유령을 보자마자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쳐버렸다는 얘기.

 근데 여태까지 이 재미난 책의 스토리와 등장인물에 관해서만 열나 이야기했다. 하지만 진짜 이 책을 재미나게 하는 건 스토리보다도 무수한 문장들과 단락에서 마구 쏟아지는 해학과 풍자와 시절의 그리움과 익살과, 코미디 속에 잠들어 있는 비극성, 이런 것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비록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 치버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반 가량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반 정도만 제대로 잡아챘다면 기꺼이 이 책을 읽고 다른 이한테도 권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책을 읽는 진짜 이유는 스토리와 그 속에 스파이처럼 잠입해 있는 시절과 감정들을 나꿔채는 일일진대, 치버의 <왑샷 가문 몰락기>는 이런 면에서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즐기기 전에 <왑샷 가문 연대기>를 먼저 경험하시는 편이 매우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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