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을 헤치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8
아이리스 머독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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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리스 머독의 장편 데뷔작이라고 한다. 근데 난 이거 읽기 전에 <바다여, 바다여>, 정년퇴직해서 이미 늙은이가 된 교수가 첫사랑, 그녀도 늙어(늙은 서양 여인들의 특징인 것 같은) 코 밑 검은 수염이 돋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여인을 찾아 스코틀랜드 최북단의 바닷가로 이사해서 벌어지는 난장판이 딱 마음에 들어(왜 난 늙은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몰라. <콜레라 시대의 사랑>도 그렇고 <바다여...>도 그렇고 말씀이지), 이이가 쓴 <그물을 헤치고>도 꼭 읽고 말리라 작정했었다가 게을음에 관한 한 한 게을음하는 처지라 이제서야 읽게 됐다. <바다여, 바다여>와 이 책의 공통점을 굳이 얘기하자면, 여류작가가 남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에 목 매달다가 정말 죽기 일보직전에 득도를 한다는 것.

 머독, 이 여자가 마음에 드는 건, 잉글랜드의 철학자라면 세계 철학계를 앞자리에서 이끄는 유구한 전통과 광배를 둘렀을 텐데도 (잉글랜드와 쌍벽을 겨루는 프랑스 철학의 계승자 사르트르가 개떡같은 소설 속에서마저도 오지게 잘난 척하는 걸로 일관한 것과 비교해서) 전혀 어렵지 않은 문장들과 내용으로, 그리고 넘쳐넘쳐 흐르는 농담과 해학과 익살과 심지어 허언까지를 총동원하여 쉽게 읽히는 작품을 썼다는 거. 물론 소설 읽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궁합이 다른 어떤 것보다 앞에 서는지라 이런 평가 혹은 감상은 오직 나한테만 적용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물을...>의 주인공, 중요할 땐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만 사소할 땐 도둑놈이고 사기꾼이고 거짓말장이인, 지극한 게으름뱅이이자 세계사의 발전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유일한 계급인 룸펜 프롤레타리아 인텔리겐챠의 대표선수 제이크가 그를 둘러싼 주변인물들과 함께 런던과 파리에서 저지르는, 되돌릴 수 없는 젊음과 사랑의 뒤죽박죽, 그물처럼 얽히고 설킨 관계들이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크게 보면 사랑 이야기. A는 B한테 미친 듯 빠져있고, B는 C 없이 하루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으면서 A한텐 전혀 관심도 없는데, 정작 C의 모든 인생은 오직 D를 위해 있는 듯하지만 B가 자신한테 바치는 지극정성보다 아스팔트 위 푸짐한 개똥이 훨씬 중요하며, D의 뇌활동과 근육의 움직임은 자신을 머리 속에 슬어있는 이蝨하고 별로 차이나게 생각하지 않는 A를 위해서만 기능하면서도 C는 옆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잘 감각할 수 없다. 이런 얽힘. 이게 사랑의 경우만 그래? 사랑을 한 모티프로 해서 표현을 해놓았을 뿐 거의 모든 인간사에서 이런 짝사랑의 사이클은 오늘도 당신한테도 (아 죽일년!) 그녀한테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책에선 제이크-애너-휴고-새디. 이 네명이 사분의 사박자, 즉 행진곡 풍으로, 런던이니까 영국의 대표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가 작곡한 <위풍당당한 행진곡>의 속도감으로, 그러나 곳곳에 숨겨놓은 익살과 해학과 농담의 지뢰를 펑펑 터뜨려가며 서로가 서로를 향한 짝사랑의 그물같은 사이클을 펼쳐놓고 있는 가운데, 인생사에 도가 통한 철인, 마치 중국 청구땅의 풍산風山 위에서 구름 타고 노니는 신선 같은 이가 둘이나 등장해 독자로 하여금 그이들의 높은 도에 감탄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내가 여기서 어떤 풍모가 감탄할 만하더냐, 하는 건 얘기해주지 않겠지만 그 가운데 한 명의 직업에 관해서만 짧게 말해주겠다. 이름은 팅컴 부인. 직업은 구멍가게 쥔.

 아, 오늘은 스토리에 관해 너무 많은 말을 한 거 같다. 반성하겠다.

 하여간 재미나게 읽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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