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0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정영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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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쓴 <사탄의 태양 아래>를 읽고는 말입니다, 제목을 먼저 좀 보세요, 사탄의 태양 아래, 세기말의 음산한 풍광이 팍 떠오르면서 진짜로 흥미진진한 잔혹, 엽기 르와느를 기대했더란 거거든요. 근데 읽어보니 우와 세상에나, 그렇게도 진지한 종교소설이 있을 수 있는지, 스스스로 고행을 달게 행하는 수도사들, 이 우울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고 경건하고 성스런 수사들 보면서 혹시 얘네들 이거 완전 피학성 성애자들 아냐? 이런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자기 몸에다가 얇고 질긴 철사를 꽁꽁 감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시간 날 때마다 채찍으로 자기 등짝, 허벅지, 가슴, 배를 힘껏 갈기는 행위. 이거 정말 기독교의 하느님이 저 구름 위에 있다면 말씀입죠, 정말 그분께서 자기 자식들이 스스로 이런 고행을 받는 걸 보고 좋아할까요? 아직도 진행중인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성당. 세상의 다른 구석에선 (주로 피부색 진한 인종들이) 처절하게 굶어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려무비하게 천상을 향해 오늘도 솟구치고 있는 건축물을 기독교란 종교의 하느님이 보면서 즐거워 하겠습니까? 600년에 걸쳐 당대 인류의 모든 화려함으로 장식했던 쾰른 성당의 고딕 첨탑을 보며, 너희들이 나를 위하야 집을 지어 바치니 내가 흡족하더라, 라고 했겠습니까? 가우디나 쾰른 성당의 차디찬 바닥에 납짝 엎드려 이마빡을 댄 수사들의 고독, 그가 엎드린 한 평 또는 두 평을 위해 그는 자기 몸에 몇 차례나 채찍질을 했을까요. 이런 삿되고 잡스럽고 지옥의 유황불에 빠질 만한 생각이 마구 돋아 다시는 조르주 베르나노스를 읽지 않겠다고 각오를 했었는데 어디 세상 살이가 그런가요. 그의 다른 책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고르고는 이거 또 지독한 수행과 고행과 신의 유무에 관한 의심 뭐 이딴 거 나오지 않을까, 심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 숨기지 않겠습니다.

 아니나 다르겠습니까. 첫장을 넘기면 제일 먼저 나오는 장면. 사람들이 우연히 만났는데 만일 그들이 공교롭게도 둘 다 천주교 신자라면 서로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렇습니다.

 "본당이 어디세요?"

 만일 제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본당? 본당? 분당은 알겠는데 본당이라니. 혹시 본관을 얘기하는 거 아냐? 이렇게 짐작해서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을 겁니다.

 "예, 경주 김갑니다."

 가톨릭 신자들한테는 본당이라는 것이 뭐 내 식대로 얘기하자면, 마음의 고향과 비슷한가 봅니다. 누구는 미아리 텍사스가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고, 누군 신도림 초등학교가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던데 그런 것들 보다는 "쇤네 본당은 공주 중동성당이구먼요." 또는 "전 강원도 영월성당입니다."라고 하는 게 보기도 좋고, 의미도 있고, 듣기도 좋고 뭐든지 다 좋군요. 하필이면 공주의 중동성당이고 영월성당이냐고요? 결혼식 구경하느라고 가 본 곳들입니다. 뛰어봤자 벼룩이지요 뭐, 헤헤헤.

 하여간 책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본당 운운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당연히 책 제목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시골 신부를 만들어야 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책 앞대가리에 원래부터, 어릴적부터 없이 살다가 머리 하나 좋아 공부 잘해 신부가 된 경건한 젊은 사제가 시골 본당의 담임신부로 부임해오는 걸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제일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사탄의 태양 아래>에 하도 데서, 이 책도 그러려니 했던 걸 굳이 숨기지 않겠습니다. 세상 일이란 것이 다 그렇듯 책 읽는 것도 그래서, 베르나노스에 대한 쓸데없는 선입견은 책의 앞부분을 읽을 때까지 여전히 팽만했고 그래서 읽는 행위 자체가 무지하게 지겨웠습니다. 왜냐하면 건성건성 읽었기 때문이지요. 페이지 진도는 나가지 않지, 하는 얘기라고 무지하게 경건하기만 한 기독교 얘긴데 애초에 기독교에 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그럴 만하기도 했겠습니다. 당연히 셀프 변호이긴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정도 읽어나가니까 말이죠, 금새 문장 하나하나가 이렇게 아름다운 말, 언어로 만들어져 있다는 걸 알아챈 겁니다. 특별하게 수식하지도 않고, 어떻게 보면 유치하겠다 싶은 좋은 뜻의 언어들로 만들어진 문장. 그런 문장들이 모여 이룬 문단과 또 그런 문단들이 계속해가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생과 행위와 사고와 인식에 대하여 선의와 중용과 화해 같은 기독교 윤리들 속에 자연스럽게 묻혀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지 뭡니까. 기독교 윤리라고 얘기했지만 사실 기독교 윤리가 우리 생활 속에서 관습적으로 서로 권장하는 사회 윤리가 차이가 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책을 쓰는 사람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외피를 덮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도 기독교 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냥 삶을 아름답게 사는 윤리일 겁니다.

 물론 그런 것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기독교 사제가 중심에 있으며 본당 신부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교구민들과의 관계, 사건들ㅡ 이런 건 당연히 기독교 아니면 생길 수 없는 것이고, 그게 책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연스럽게.

 만일 당신이 기독교, 잠깐. 요샌 기독교, 라고 하면 주로 개신교를 얘기하고, 지금 거론하는 기독교는 천주교라고 해야할 거 같은데, 천주교와 개신교의 구분은 철저하게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 즉 저같은 유물론자들에겐 전혀 구분할 필요도 없고 그걸 의도도 없기 때문에 그냥 기독교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얘기를 다시 이어가지요.

 만일 당신이 기독교 신자라면 이 책을 즐거이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면, 이 책을 더 즐겁게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자신이 여태까지 관심 없던 분야에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떠셔요? 한 번 읽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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