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먼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7
에벌린 워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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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키득키득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그러나 웃음과 별개로 이 작품은 코믹소설이기는커녕 타락과 죽음과 절망과 방황과 몰락의 푸가. 잉글랜드 부르주아의 엄격함과 촌냄새, 완고를 넘어 옹고집에 가까운 전통에의 집착. 반면에 도시지향과 적극적인 사교생활에 대한 동경, 분방한 감정표출에 이은 이의 실행, 즉 불륜, 이어지는 가족 및 가정의 파탄 등 소설은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더욱 비장하게 흐르는 소나타 양식의 교향악. 하지만 군데군데 넘쳐 흐르는 해학과 골계의 카덴챠를 즐기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작가 에벌린 워의 솜씨는 알아줘야겠다.

 그의 이름이 재미나다. 토니 라스트. 라스트. 번역서라서 '라스트'의 영어 철자가 어떤지 몰라 아쉽지만 만일 'Last'라면 더욱 재미나겠다. 때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 세계 만방에 조금씩 인권과 평등의 의식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인데, 토니 라스트는 런던 외곽의 (조금 엉터리지만)고딕식 저택을 깔고 앉아 이걸 옛모습 그대로 유지하여 가문의 외형을 지속시키는데 인생의 중요한 의의를 두고 있는 작자다. 하지만 종전후 불경기가 전 지구를 덮쳐버렸고, 자신들의 생산품을 식민지역에 내다 팔아먹음으로 해서 불황의 여파를 최소화시키던 잉글랜드,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마저 그걸로도 숨을 돌리기 벅차게 되자 이젠 소득세, 재산세, 법인세 등을 인상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거의 불로소득에 가까운 상속세에 대하여는 무지막지한 세율을 때려버렸다. 결과, 대토지와 무지막지한 현금, 유가증권을 보유했던 부르주아와 귀족들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세금 안 내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 상속을 통해 유지해왔던 귀족계급의 몰락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몰락'이라도 그들의 몰락과 당신과 내 집구석의 몰락은 아예 의미를 달리한다. 그럼 우리집처럼 됐을까? 나하고 걔네들하고 이젠 정말 평등할까? 이딴 생각 마시라). 이런 의미에서 주인공의 성씨가 '라스트'인 건 매우 의미가 있지 아니하느냐 하는 의견. 자본주의는 수백년 동안 자본주의를 키워온 태생적 부르주아와 귀족들까지 먹어 치워버린 것이다.

 1930년대 혹은 조금 전 연대의 잉글랜드. 런던 외곽 헤턴에 있는 라스트 씨네 저택. 토니 라스트는 지역에서 소작인으로부터 받는 소작료로 자신 스스로 노동할 필요가 1도 없는 말 그대로 세속 귀족의 장자. 당연히 동생들은 라스트 장원 옆동네에서 장자세속에 대해 조금도 불만없이 스스로 열심히 땅 파먹고 산다. 세상 신경쓰기 싫고 오직 유전 비슷하게 갖추게 된 형질만 지금처럼 유지시키기만 하면 침상에 누워 자연사할 때까지 세상 걱정 아무것도 할 필요없는 신세 편한 인간이지만 인간사 그렇게 좋을 수만 있을까?

 부르주아도 아니고 부르주아 근방에서 떨어지는 떡고물로 연명해가는 런던 최고의 찌질한 남자 존 비버라고 있었다. 이 찌질이의 이름도 매력적이다. 비버. 냇가에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을 잔뜩 모아 댐과 집을 지어 섬처럼 생긴 그 집에서 안락하게 살지만 냇물은 자연적인 통로를 잃어버려 지형을 가끔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포유류. 자연은 어떻게 될지 전혀 가늠하지 않고 오직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연못을 흐름을 바꾸는 짐승. 그걸 자신의 성씨로 가지고 있는 인간이 등장한다. 하지만 진짜 비버처럼 부지런하지도 못한 이 무능력하기 짝이 없고 생기기도 변변찮고, 말주변도 지극하게 없는 인간이 바로 존 비버다. 정상적인 사람은 인간군상에서 적어도 하나는 제대로 알아본다. 존 비버같은 찌질한 것들. 얘기도 안 통하고, 그래서 친구들의 논쟁에 절대 끼어들지도 못하는데, 누구 하나가 친구들 전체를 향해 "낼 한턱 낼 테니 우리집으로 몽땅 와!" 하면 절대로 빠지는 법 없는 지지리(속어 "찌질이"의 어원, 지지리) 궁상.

 이 찌질이가 어느날 토니 라스트의 헤턴 저택을 방문하는 영광을 누린다. 근데 세상일 정말 모르는 거다. 누가 봐도 찌질이를 넘어 상찌질이인 존 비버를 눈여겨 바라보는 고귀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토니 라스트의 사랑스런 아내 브렌다 라스트.

 여기까지.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위의 것을 읽으신 분은 자연스레 선량한 브렌다 라스트 여사와 찌질한 존 비버가 화끈하게 불륜을 저지르게 될 것이란 건 충분히 감을 잡으실 수 있을 터. 그럼 됐다. 이 정도만 힌트를 얻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이 책을 읽어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절대 놓치지 못하는 건, 존 비버와 브렌다 여사의 분탕질을 알아챈 토니 라스트 선생이 난데없이 아마존 탐험을 결정하고 실행해버리는데, 옥의 티 하나 짚어보면, 아마존 탐험 중에 목마르면 그냥 아마존 강물 떠 마시는 장면이 숱하게 나온다. 에벌린 워 자신이 오지탐험을 즐겨 했는지는 모르지만 했다해도 적어도 아마존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존 강물, 못 마신다. 가 봤냐고? 그건 아니고, <호랑이가 제 세상인 나라>에서 브라질 작가 장마리 블라 드 로블레스가 분명하게 말했다. 식수가 떨어지면 아마존 강물 위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목말라 갈증으로 죽던지 아니면 강물을 원대로 퍼먹고 끝없이 설사를 갈겨대면서 죽던지라고.

 그리고 아마존 탐험의 의미는 알겠는데(세상 어디를 찾아봐라, 이상향이 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지 탐험 분량이 과하게 많다. 근데 이건 내 의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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