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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의자 1 ㅣ 세계문학의 숲 36
일리야 일프.예브게니 페트로프 지음, 이승억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평점 :
이 책의 초간본이 나온 해가 1928년. 우리나라에서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은 김학준이 1970년대에 쓴 <러시아 혁명사>. 그야말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강 보면,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볼셰비키를 필두로 전쟁 반대를 위한 대규모 파업을 강화, 확대하였으며 나아가 군대도 이에 호응하여 수많은 군발이들이 탈영,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와 같은 구호 "빵을 달라!"는 기치 아래 썩을대로 썩어버려 땅 속에 묻힐 시간만 기다리고 있던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고 1917년 10월 혁명을 완수한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들어보시라. 1905년, 10월 등 많은 작품이 러시아 혁명을 위해 만들어졌다. 특히 러시아 정교회 첨탑에서 경종이 난타하며 혁명의 절정에 이르는 순간의 묘사나 혁명의 순교자를 위한 조종 등이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진정한 혁명이란 감동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대한 혁명의 완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정을 지지하는 반혁명 백군이 러시아 전역에서 붉은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인민들은 이 와중에 극도의 굶주림을 겨우 겨우 이기며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는 것을 보다못한(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개떡같은 소설 <닥처 지바고> 참조) 소비에트 정권은 어이없게 1921년 한시적으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허용해버리고 만다. 수난을 다 견뎌내고 갓태어난 혁명의 씨앗이 이제 겨우 제 자리를 찾은 몇년 후, 백군을 깡그리 소탕하고 시장경제도 다시 원위치 시켜 안정적 체제를 확립한 1920년대 중반, <롤리타>를 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네 집구석 같은 구 러시아의 귀족들은 이제 파리 등 유럽과 아메리카로 망명 또는 이민을 떠나 구체제적 공,후,백,자,남작의 쓰레기같은 옛추억을 저작하거나, 그냥 소비에트에 남아 옛 영광과 재산을 몽땅 몰수당하고 그들의 눈으로 보면 곤충과 하나도 다를 것 없었던 평민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고 지내는 처지에 이른다. 그러나 인민들은 1921년 시장경제의 일시적 도입으로 소비에트가 주장한 '부의 균등한 분배'가 개떡같은 꿈속의 속삭임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너나 할 거 없이 일확천금, 물질만능의 이상향을 꿈꾸게 된다.
이 시점에서 탄생한 소설, <열두 개의 의자>.
구체제의 대귀족 출신이어서 당시엔 귀족회의 의장까지 지냈으나 시간이 흘러 1927년 현재, 혁명정부에 의해 완전 알거지가 된 신세. 이제 구청 호적계에서 인민들의 출생과 혼인과 사망을 장부에 기록하는 나이먹은 말단 회계원에 불과한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 보로뱌니노프. 그에겐 진실로 불행하게도 부양해야 하는 군식구가 하나 딸려 있기도 하니 바로 이미 죽은 마누라의 친엄마, 즉 장모 클라브디아 이바노브나 페트호바. 노파는 몰락한 대귀족의 후예답게 하루 온 종일 불길한 시선으로 좁은 아파트를 배회하며 예전이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요리, 빨래, 청소 등 집안 살림을 직접해야 하는 치욕을 죽음으로 어서 끝내고 싶어....할 거 같지? 천만의 말씀. 노파의 행동 하나 하나엔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러운 음모가 담긴 듯, 기나긴 복수의 일념 하나로 생을 이어가는 듯한 고집스러움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독한 인간이라도 제까짓 것이 시간을 이길 수 있나. 드디어 숨을 거두어야 하는 순간. 하나밖에 없는 친척으로 사위를 불러 생각지도 못한 유언, 또는 비밀을 털어놓는데,
"사위, 옛날 우리 잘 나가던 시절에 말야, 불상놈 같은 빨갱이들이 우리집에 처들어와 온갖 재산을 다 뺏아가던 전날 밤에 있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느냐 하면, 가지고 있던 모든 보석, 다이아몬드 브로치, 에메랄드 팔찌, 큼직큼직한 진주 목걸이, 역시 다이아몬드 반지 세 개, 하여간 온갖 보석들을, 우리집 응접실에 있던 똑같이 생긴 열두 개의 의자 중에 하나, 똑바로 들어, 독일제 의자 생각나? 그 의자들 말야, 바로 그거 열두 개 중에 하나에, 쿠션 속에다 숨겨놓고 감쪽같이 꿰매논 거야. 그걸 찾아. 그때 돈으로 금으로 만든 장식 빼고 보석들만 쳐도 7만 루블어치란 말야."
이걸 들은 월급 40루블을 받는 봉급쟁이 사위. 당시 7만 루블이면 현 시가로 치면 무려 15만 루블이다. 한 푼도 안 쓰고 312년 반을 모아야 하는 거대한 돈. 사회주의 세상에서도 돈이란 건 굉장한 권력이자 행복의 전제조건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유혹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장모의 숨이 넘어가니, 생각도 하지 않던 최고급의 관을 써서 장사를 지내놓고 그동안 꿍쳐놨던 돈을 박박 긁어 예전에 장모와 자신이 살던 저택을 향해 떠난다.
하지만 독실한 장모께서 운명을 코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정교회 신부에게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죄를 참회하면서 그만 숨겨둔 보석과 열두 개의 의자가 어디 있는지에 관해 다 뽀롱을 내버리고 숨을 거둔다. 혼인을 할 수 있는 러시아 정교회 신부 표도르 이바니치 보스트리코프 역시 마누라 몰래 꿍쳐두었던 금화와 지폐를 몽땅 꺼내 열두 개의 의자를 향한 대장정에 오르는 거 역시 물론이다.
그러나 평생 폼이나 잡을 줄 알았던 귀족계급 출신의 무능하고 힘도 없고 세상살이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우리의 이폴리트 혼자라면 열두 개는 커녕 하나의 의자라도 제대로 손에 넣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하늘의 도움으로 구세주 처럼 나타난 희대의 사기꾼 오스타프 벤데르.
자, 이들이 펼치는 희대의 풍자극이자 희극 소설 <열두 개의 의자>. 일리야 일프와 예프게니 페트로프, 두 사람이 서로 뇌를 모아 어떻게 하면 희극적 풍자가 제대로 나타날지 궁리하며 으쌰으쌰 힘써 써낸 재미난 소설. 러시아 사람들한텐 훨씬 더 재미났을 소설. 이들이 어떻게 의자를 위해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하고 서로 반목하다가 화해했을까. 찾은 보물은 얼마나 눈이 부셨을까. 온갖 것들, 다 직접 확인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