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대답 민음의 시 125
김언희 지음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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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넘기면 스스로 쓴 서문이 나온다. 인용하겠다.



自序


이 시편들은 坐入用이

아닙니다.



 오른 쪽 맞춰쓰기로 한 자서에 나오는 한자말, 좌입용坐入用이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앉을 좌, 들 입, 쓸 용. 앉아서 들어가는 용도의 시들이 아니란 얘기. 네이버 사전 찾아봤더니 이런 단어가 없단다. 중국어 사전에도, 한자사전에도 없단다. 그럼 시인이 만든 말이다. 좋다. 시인이 시 쓰면서 단어 만드는 거는 특권이니까. 근데 좌입용이 뭘까? 이 시를 읽은 것이 2017년 3월 10일. 불과 이틀 전인 3월 8일. 나는 이 동네 종합병원에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았고 검진 항목에 위 내시경, 대장 내시경이 있었다. 아, 수면 내시경을 선택했지만 내시경 받는 도중에 잠에서 깨는 불상사가 벌어졌는데 하필이면 대장에서 용종 하나를 떼내는 순간이었다. 집게 비슷한 게 내 큰창자 속에 들어가 뭔가를 집더니 탁, 자르는 광경. 이어지는 출혈. 입엔 위 내시경 용 튜브가 삽입되어 있어 말도 못하고 간호사한테 손짓으로 수면약 좀 더 넣어달라고 시늉했다. 인간이 가진 신체 장기 가운데 유일하게 우주와 통하는 소화기관의 처음과 끝이 다 훤하게 뚫려있던 기억. 그러니 불과 이틀 후 김언희 시인이 말하는 '좌입용坐入用'을 읽으면서 '인간의 신체 기관에 밀어 넣는 용도'라고 퍼뜩 생각이 들던 게 어쩌면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자연스레 '좌약'을 사전에서 찾아봤다. "요도, 항문, 질 따위를 통하여 몸 안에 끼워 넣어 체온이나 분비물로 녹인 후에 약효가 나타나게 만든 약." 그럼 좌입용은 좌약과 비슷하게 "요도, 항문, 질 따위를 통하여 몸 안에 끼워 넣을 용도"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그 용도가 아니라고 했으니 적어도 시를 읽으면서 사람에게 약효나 즐거움이나 동감이나 시적 쾌감을 느끼게 해주지 않을 거라는 말인가 싶었다. 아, 미리 밝혀두지만 난 김언희 시인의 시를 생전 처음 읽는 거였다.

 '자서' 좌입용이 아니라는 말을 오래 궁리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드디어 책을 넘겨 첫번째 시를 읽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백 년 동안 장롱 아래 깔려 있듯이, 깔린 채 팔만 개의 막대 사탕을 빨듯이,


 예를 들면, 흡혈귀 이상으로 흡혈귀가 되어가듯이, 하루도 남의 피를 빨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예를 들면,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하나 남은 눈동자를 후벼 먹듯이, 하나뿐인 출구가 매독 걸린 입이듯이,


 예를 들면, 그것의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이것의 피를 묻히듯이, 뭔가를 안 하려고 뭔가를 하듯이,


 예를 들면, 주방 기구와 섹스하듯이, 너무나 모멸적인 섹스 파트너, 그것이 너를 삼키듯이 토해내듯이,


 예를 들면, 어제가 기억나지 않듯이, 어제 뭐 했지? 어제 뭐 했더라……? 1분도 기억나지 않듯이,


(전문. 13쪽)

(3연에 나오는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하나 남은 눈동자"는 마야코프스키의 <나 자신에 관하여> 중에서 나오는 시어라고 주註가 달려있다)


 아, 자서의 좌입용이란 단어를 해석한 것이 많이 틀리진 않겠다 싶은 느낌이 팍 왔다. 근데 문제는 시인이 이렇게 격렬한 단어들을 모아모아 도무지 뭘 주장하고 있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 '백년 동안 장롱 아래 깔려 있는 게 뭘까? 물론 백년은 오랜 세월을 의미하겠지. 그럼 거의 모든 집구석의 장롱을 내려다 보시라. 장롱의 짧은 다리 네 개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딱딱한 마분지나 포장지 접은 거, 아니면 나무 판자를 깔고 있을 거다. 그거 말하는 거야? 팔만 개의 막대 사탕은? 하나뿐인 출구라는 '매독 걸린 입'은 도대체 뭐야? 주방 기구하고 섹스를 해? 그게 너무 모멸적인 섹스 파트너야? 혹시 마스터베이션 하시는 건가요? 도대체 오리무중. 그냥 글 또는 시의 이미지만 느끼라는 이미지즘적 시는 아닌 게 분명하니 뭔가를 주장하고 있을 것인데 거 참.

 그럼 이거 한 번 읽어보실래?



 6

 아버지의 이름으로,

 촌충처럼 마디마디 끊어지는 이름으로


 미친 척 하면서 구매하고 미쳐가면서 지불하는

 빨간 고환, 파란 고환, 찢어진 고환,


의 이름으로


<후렴> 부분. 16쪽. "촌충처럼 마디마디 끊어지는 이름"은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란 시 중에서 나온다는 주가 달려있다)


 시집의 3부에 가면 시인이 집과 가정을 얼마나 황폐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보는지 나오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1부의 이 시에서 과연 시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촌충처럼 끊어지는 이름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인데 그게 돈지랄하는 색색의 고환들 심지어 찢어지기 까지 한 고환, 즉 아버지가 색동 칠을 했거나 다 헤져 찢어진 고환이란 말이다. 근데 아버지의 고환이란 자신의 생태적 출발지. 그리하여 자신의 비극을 이렇게 나타낸 거라면 그야말로 감정의 과잉일 것이겠지만 과연 그랬을까? (아, 순 우리말의 아름다움. '아버지의 색동 고환'보단 '아빠의 색동 불알'을 발음할 때의 숨 막히는 공명이여!)

 이 시인의 작품에서 수다하게 쏟아지는 것들을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구분하겠다. 첫번째는 참 난감한 단어들의 무차별적 사용. 용서하시라 그대로 인용하겠다. 자지, 보지, 불알, 고환, 질, 음부, 분비물, 똥, 등등. 물론 난 이 단어들을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전부 표준말이며, 비어도 속어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단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라고 말한 건 그냥 습관상 될 수 있으면 피해가며 사용하는 단어들이기 때문이지 다른 건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만인 앞에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김언희는 다르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레 쓴다. 두번째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다른 사람이 쓴 시, 가요(팝송이 됐건 뽕짝이 됐건 간에)의 가사를 과하게 자주 인용한다. 출처를 밝히고 기억나지 않을 땐 '갑동이의 시 어느 곳에서' 따왔다고 숨김없이 이야기 하지만 시인에게는 결코 마땅하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에 어느 시인이 그러던데, 시를 쓰기 위해 다른 시를 과도하게 읽는 건 바람직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이런 경우 때문에 그렇게 얘기했던가? 하긴 그 얘기 들은지 30년도 넘기는 했다.

 정작 내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지금부터. 남들이 쓰지 않는 단어나 그것들의 하드코어적 조합이 일으키는 교감작용을 사용했음에도, 김언희의 시는 극적인 고통이나 절망, 분노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 만일 있었다고 하더라도 너무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 솔직히 난 많은 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격렬한 단어가 마구 쏟아지기는 한데 그것들의 총합으로 만들어내는 '뜻' 혹은 '이미지' 그것도 아니면 시인이 지금 느끼는 '감정'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것도 제대로 감각할 수 없었다는 말씀. 그나마 3부에 가서 일관된 주제에 관한 시편들이 나열되었을 때는 좀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 좀 낫기는 한데 그래도.

 하나만 더 말씀드리자면,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시점이 2005년 3월. 내가 책을 산 것이 2017년 1월. 그럼 두 달 모자른 12년이 흘렀는데 놀랍게도 초판 1쇄다. 12년 동안 2,000부 가량 팔렸다는 얘기. 도대체 시인들은 뭘 먹고 사는 거야? 이슬?  당신이 시인이 아닌 걸 참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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