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87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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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년은 당연히 1793년. 89년 바스티유 감옥이 깨지고 4년이 흘러 파리는 로베스피에르, 당통, 그리고 막강한 마라가 권력을 틀어쥐고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짜리몽땅 장 폴 마라는 한두 주 있다가 탕 속에 더운 물을 받아 느긋하게 전신목욕을 즐기다 젊은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가 찌른 단검이 심장에 박혀 죽을 처지였고(샤를로트 코르데는 소설에선 마라의 부하가 내리친 의자에 해골이 쪼개져 현장에서 즉사한다), 산악파 행동대장답게 쾌걸의 거한 조르주 자크 당통(책에선 '당똥')은 몇 달 지난 후 자신이 발의한 법령에 의거해 (그로부터 1년 후 로베스피에르가 똑같이 당했듯이)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예정이었다.

 한편 왕당파의 핵심멤버로 일찍이 런던으로 망명하여 왕권중심제의 부활을 위해 프랑스 브루타뉴 지역으로 잠입한 랑뜨낙 후작은 정작 자신은 종교에 별 관심도 없었으나 천주교와 왕정에 기반을 둔 이 지역의 농민군들을 규합해 세를 불린 다음 영국 정규군을 수입해와 혁명군들을 괴멸시키는 야멸찬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만 그의 나이 이미 80이 넘은 노인이라는 점과 하필이면 해당 지역의 정부군 또는 청군 또는 혁명군의 사령관 고뱅이 자신의 종손(형 또는 남동생의 손자)으로 자식 없는 이 노인네 후작의 상속권자라는 점. 고뱅 장군을 어려서부터 훈육하고 자유사상에 물들게 한 고상하고 박애와 평등정신 넘쳤던 사제 씨무르댕(어감이 꼭 욕하는 거 같긴하다)이 등장해 이 양반이 혁명공회가 엄정한 반란군 토벌을 위해 임명한 전권대사로 종조부와 종손간의 싸움에 꼽사리를 끼는데 씨무르댕은 이미 예전 자상하고 사랑과 평화와 박애정신과 평등의식이 넘치는 사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 혁명의 엄정한 완수를 위해 추상같은 법의 집행 하나에만 목숨을 거는 정치인으로 바뀌어 나타난 거다.

 그리하여 이 세 사람은 한 편은 한 명의 노인, 다른 한 편은 둘이서 힘을 합해 브루타뉴 방데의 한 고성, 랑뜨낙 후작이 일찌기 어린 종손 고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얼러가며 키운 '라 뚜르그'에서 서로의 목숨을 걸고 운명의 한 판 싸움을 벌인다. 누가 이겼냐고? 혁명군(정부군) 병력 4천명, 후작의 농민 반란군 19명의 싸움. 4천의 정부군이 19명에 불과한, 그것도 농민군한테 깨지면 아무리 소설이라도 그게 말이 돼? 당연히 정부군이 이긴다. 근데 그게 끝이야? 에이, 아직 남았지. 그것도 중요한 게. 절대 안 알려줄 마지막 클라이막스가.

 이렇게 방데 전투의 한 장면이 책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

 내가 읽기엔 하나가 더 있다. 그리고 비교적 일찍 2권의 중간쯤에 쫑이 나는 거다. 책에서 랑뜨낙 후작 역시 엄정하기 짝이 없는 냉혈한으로 나오는 바, 일찌기 아이 셋을 유괴하고 아이들의 엄마를 비롯한 동네의 모든 성인을 총살한 적이 있다. 근데 하늘이 그렇게 무심하지 않았는지 아이 엄마를 관통한 총알이 다행스럽게도 허파를 건드리지 않아 생명을 구하고, 당연히 아이들을 찾아 후작이 있는 곳, 그러니까 뜨거운 전쟁터 라 뚜르그를 향해 맨발로 걸어간다. 아이들은 성 안의 도서관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있지만 도서관에 뭐가 있냐하면 맨 종이와 양피지, 불에 잘 타인 인화물질. 여기다가 후작의 충견 이마누스는 성을 지키기 위해 화공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해놓은 상태.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들은 전혀 모른 채 두 사내 아이와 한 계집애는 정말 천진스러운 놀이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 아이들은 줄곧 그러듯이 탁자에 기어올라 책을 한 권 찢어발기기 시작한다. 그 책이 바르톨로메오의 순교에 관한 신학서적. 바르톨로메오가 누구냐 하면, 아르메니아에서 예수의 말씀을 전하다가 거기 종교 제사장들한테 찍혀 산채로 껍데기를 홀랑 벗긴 다음 십자가에 쿵쿵 못박고 그것도 모자라 대가리를 댕가당 잘라 죽임을 당한 성자다. 그 책을 어린 아이들이 발기발기 찢어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광경은 뭘 은유하고 있을까? 거의 무신론자 비슷한 위고가 다가오는 세대와 종교와의 결별을 그렇게 써놓은 것일까, 아니면 프랑스 혁명과 혁명/반혁명 전투를 바르톨로메오의 순교와 비교해 놓은 것일까. 그건 이 책을 읽고 당신이 판단하시라.

 위고의 마지막 작품. 반은 역사적 진실이고 반쯤은 허구겠지. 격동의 한 시기, 서로의 정의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영혼, 하지만 바보같기 그지없는 순진한 낭만주의의 끝판.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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