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피타 히메네스 대산세계문학총서 60
후안 발레라 지음, 박종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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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 '나'는 몇년 전 세상 하직한 대성당 주임신부가 쓴 종이뭉치를 발견한다. 뭉치의 첫장엔 제가題字임이 분명하게 라틴어로 "Nescit labi virtus" 우리 말로 "덕은 추락하지 않는다"라고 써 있는 건데 당시 스페인에서도 라틴어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 속에 앗뜨거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개봉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손에 들어온 거다. 근데 막상 종이 뭉치를 열어보니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조카가 삼촌인 주임신부에게 쓴 편지, 주임신부가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상황을 이야기한 것, 마지막으로 19세기 초반 소설의 에필로그 격인 이야기의 뒷담화.

 화자 말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독자 나도 책을 읽기 시작하면 목차를 빼고 본문에서 첫 문장으로 나오는 엄숙한 라틴어, "덕德은 추락墜落하지 않는다"를 보고 속으로 이거 또 기독교적으로 골아픈 얘기들 아닌가 싶어 좀 캥겼음을 굳이 숨기지 않겠는데 근데 조금 이상한 건, 기독교적으로 골아픈 얘기를 담은 책 껍데기의 제목을 그림에서 보듯이 저렇게 발랄하게, 십자고상의 피흘리는 기독과 비교하면 발칙하기까지한 글씨체로 했다면 정말 오랜만에 우리나라 메이저 레이블인 문학과지성사가 미친 척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잇, 초장부터 결론을 내버리자. 문학과지성사에서 만드는 대산세계문학총서 가운데 제목을 저 글씨체로 뽑은 것들, 읽지마시라. 두 권 읽었으나 다 꽝이었으니 다른 것들도 비슷할 거 아닌가. 물론 이 발언에 나는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겠지만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알량한 소신이 이러다 혹시 악플러로 고발당하는 거 아냐?

 이쯤에서 내 생활주변 실제 촌극 하나.

 난 유물론자.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그래서 종교는 명백하게 아편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이다. 근데 내 친한 술친구 하나가 천주교 환자다. 천주교 환자들은 (내 생각으론 그냥 미사에 참석해서 참회하고 용서받고 착하게 살면 되는 거 같지만) 미사 참여 말고도 신자들끼리 레지오regio 그니까 군대 용어로 연대 혹은 대대라는 이름의 집단으로 모여 실생활에서 서로 무지하게 가깝게 지내는데 단위조직이 한 열 가구 정도 되는 걸로 봐서 북조선의 5호감시제가 이 레지오를 본받은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바, 레지오 구성원들이야말로 영혼의 형제라고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 형제 가운데서도 좌장이며 돈도 많아 술도 자주 사주고 인심도 좋고 성격도 너그러워 존경받는 김모씨한테 결혼 적령기의 예쁘장한 딸이 하나 있었다. 딸도 당연히 모태신앙으로 낳자마자 세례를 받아 끊임없이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하는 은혜를 입은 바 적다고 할 수 없었으나 천주께선 김모양에게 순결의 미덕과 함께 젊음의 욕망을 함께 주셨으니 (원래 기독교 전 시대부터도 신들이란 것들은 꼭 그렇게 애매한 선물만 주는 걸 김모양은 몰랐던 거디다) 어느날 문득 김씨가 딸의 뒤태를 보니 몇 달 사이에 엉덩이가 펑퍼짐하고 옆구리가 두툼해져 여지없이 주리를 틀어버렸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이름이 뭐야? 아, 이름이 뭐냐는 수 세기에 걸친 질투의 물음. Il nome! 글쎄 누구야? 김모씨는 실제로 김모양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뭉텅 잘라버렸으나 결코 배부른 딸의 입에선 카시오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몇 주일 후 작년까지 자기 본당의 담임신부였다가 옆동네 성당의 담임신부로 옮긴 사제가 느닷없이 파계를 하고 김모씨에게 찾아와 자기가 김모씨의 사위임을 고백했고 김씨 가족은 그로부터 한달 후에 시골구석으로 이사를 했으며 또다시 한달 후에 김양의 결혼식이 저 먼 시골동네 성당에서 있었는데 평생 갈 거 같았던 영혼의 형제들 가운데 아무도 그들의 결혼을 축복하지 않았고, 김씨와 굳이 연락하려 하지 않았으며, 과거 본당의 담임신부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 참 대한민국의 종교인들은 어느 종교를 불문하고 대단하다, 대단해.

 하지만 가톨릭의 본산이자 아직도 그 자리를 하다못해 로마에게도 양보하고 싶어하지 않는 스페인은 좀 다르다. 내 말 못 믿겠으면 이 책 읽어보시라. 특히 대한민국식 가톨릭에 몰두하는 분들에게는 권하고 싶다. 다른 분들껜 그냥 19세기 독자의 입장에서만 기막히다고 할 수 있을 뿐, 지금 독자들에겐 굳이 이걸 고전이라고 읽어야되나, 싶은 책을 굳이 권하고 싶지 않다. 책 내용은 내 생활 주변의 한 코메디를 소개한 걸로 너무나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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