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의 이편 펭귄클래식 11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화연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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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뭐해먹고 살까, 깊게 고민하다가 사실 할 줄 아는 것이 글 쓰는 거 뿐이라 프린스턴 다닐 때 써놓았던 잡문들을 모아 순서대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엮어보니 거 참 그럴싸한 성장소설 한 편이 되는 거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선수이자 이후 등장하는 비트세대의 아버지 격인 천재작가 피츠제랄드의 첫 장편소설이며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낙원의 이편>. 혹시 아는가, 당신 또한 글쓰기 솜씨에 있어 후대의 전범이 될, 그러나 아직 이 후진 세대엔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한 작가 지망생인지. 그러니 여태 써놓은 것들이, 당신이 지금 새삼스레 읽어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어 차마 불태우지 않으면 참기 힘들 지경이라도 절대 delete 버튼 누르지 마시라. 어느날 때가 되어 그것만 엮어놓으면 군데군데 짜깁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억의 인세가 굴러들어올지. 이 외람된 독자가 당신의 행운을 진정 바라고 있음을 기억하시라.

 혹자는 <낙원의...>를 자전소설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피츠제랄드가 아마 44살에 알콜의존증에 이은 심장마비로 죽었는 바, 명색이 '자전'소설이라면 적어도 환갑은 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게다가 이 작품을 쓴 것이 겨우 24세. 에잇, 그럼 내가 위에서 말했던 '성장소설'이라고 해야지. 옛 선배들은 보통 일찍 죽어서 그런지 다들 일찍 까졌다. 아아, 좋아 좋아, 좋은 말로 해, 지금보다 훨씬 조숙했다. 책의 주인공 에이머리 블레인의 7할은 스콧 피츠제랄드인 것처럼 보이고, 그 나이에 벌써 대학졸업, 1차대전 참전, 한 번의 취직과 사표, 네 번의 연애, 친구 네명의 죽음(1명은 사고사, 1명은 행방불명, 2명은 전사) 참 복잡한 세상을 살았다.

 허위의식과 사치와 방만과 게으름과 가톨릭스러움과 오만의 집합체인 언짢은 의미로써 부르주아 정신의 정수를 지닌 어머니 비어트리스(아, 이름 정말 멋있다) 블레인의 오소독스한 교육환경 하에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의 주인공 에이머리는 이후 기숙학교와 프린스턴을 거치면서 책의 1부 제목이기도 한 '낭만적 에고티스트'로 성장한다. 근데 에고티스트, 이기주의자이긴 한테 낭만적 이기주의자라. 어머니로부터 이기주의자가 되기 위한 바람직한 교육을 받았기는 한데 빅토리아 시대를 넘어선 (아메리카를 포함한) 서양에는 바야흐로 사회주의 혁명의식과 1차대전을 향한 모종의 불길한 활발, 개별감정의 무거움 등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냉풍과 열풍이 교차하듯 변혁기를 맞아 이기주의자이긴 하지만 어머니 비어트리스 시절과는 달리 변혁으로 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낭만적 이기주의자로 변한다. 시절에 의하여 빅토리아 시대와 시대의 정신을 옥죄고 있던 볼트는 이미 풀어져버렸던 거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에도 정신적 환절기가 닥치고 하필이면 딱 그때를 골라 청춘시절을 보내게 된 피츠제럴드와 일당들. 한편으론 불우하고 한편으론 모든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도 온갖 변화에 직접 참가하게 되지만 경험이란 것이 늘 그렇듯 겪었다 해도 남은 것도 없고 시절에 내가 남긴 것도 없으며, 오직 청춘만 소비된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걸 자각하게 된 작가 그리고 에이머리 블레인. 그들을 우리는 잃어버린 세대라고 칭한다.

 선량하기만 하고 전적으로 자기중심적, 극단의 에고티스트였던 어머니 비어트리스로부터 동전 몇 푼만을 상속받고 이제 주머니에 겨우 24달러만 남아 스스로가 가난의 위치에 떨어졌을 때,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선수 페츠제럴드, 그가 뉴욕의 가난한 이웃을 보면서 솔직하게 말한다.

 "에이머리는 이전에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중략) 오 헨리는 이런 사람들 속에서도 낭만과 연민과 사랑과 증오를 찾아냈다. 에이머리 눈에는 오로지 천박함과 육체적인 더러움과 어리석음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자책이란 것을 몰랐다. 또 자연스럽고 순수한 감정에 대해 자신을 탓하는 법이 없었다." (386쪽)

 자신이 가난으로 떨어진 다음에도 그에게 가난은 오직 천박함과 더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스스로 천박하고 더럽고 어리석게도 가난에 빠져들었음에 불구하고 그는 자책하지도 않으며, 그가 가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감정. 진퇴양난의 갈림길에서 그는 잠시 앉아 있는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이때쯤 에이머리 혹은 피츠제럴드가 이 책을 썼을 거라고.






* 근데 써놓고 보니까, 내가 도대체 뭘 주장한 거야? 난필증이야? 쪽팔려. 그래도 안 지우고 내비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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