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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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한 책. <고야산 스님>과 <초롱불 노래>. 분량은 서로 비슷하다. 전형적인 일본식 기담.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단편들하고 어깨를 견줄 것들. 굳이 유럽 소설하고 비교하자면 소위 말하는 고딕문학 작가들 <피로 물든 방>의 앤절라 카터가 문득 떠오르는데(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에드가 앨런 포도 생각났다), 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하고 제일 가까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라서 일본인의 정서가 유럽인들의 그것보다는 내 심성에 가까운 것이 당연하여 같은 엽기 이야기라도 교카의 글들이 훨씬 더 매혹적이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엽기니 고딕이니 하다가 난데없이 매혹적이었다고? 이렇게 질문하실 수 있을 거다. 왜? 엽기라고 매혹적이면 안 된다는 법 있나? 한 번 읽어보시라. 내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아실 수 있을 터.

 고백하노니 이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거 참 일본 사람들 문장 하나는 진짜 뇌쇄적, 감각적으로 잘 만든다. <고야산 스님>과 <초롱불 노래>를 발표한 시대의 딱 가운데 조선에선 『만세보』를 통해 이인직이 <혈의 누>를 연재하고 있었다. 아 쪽팔려. 이거 참. 이즈미 교카가 1873년 생. 그의 문장은 모르긴 모르지만 19세기에 이미 완성을 하여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쓸 1900년과 1910년엔 아주 제대로 무르익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글은 자연을 이해하는 동양인들의 독특한 시선이 가득하다. 일본 특유의 괴기(좋게 말하면 환상)스러운 일화가 자연의 묘사 속에 용해되어 마치 예술지상 혹은 낭만성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하, 이렇게 쓰고보니 내가 뭘 아는 것처럼 쉽게 얘기하는 거 같아 차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근데 이렇게 문장이 짜르르하니 감각적으로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거 그거 대단한 거고 쉽게 이룰 수 없는 성취같은데 내가 일본 소설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있든지 아니면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문장을 이렇게 만드는 솜씨가 부럽겠지만, 나처럼 평생 독자의 즐거움만 누릴 사람들한텐 이런 류의 것들이 (이를테면 말씀입죠) 마치 진한 탕수육 소스처럼 너무 빨리 질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먹을 거리로도 난 단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단 맛을 즐겼다면 나처럼 술 좋아하는 인간들 40살 넘게 살기 힘들었을 거다. 독서도 뭐 비슷하지 않겠어?

 그러나 단 음식에 대한 호오, 통음의 즐거움에 관한 호오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듯이 이즈미 교카의 환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매혹적이고 몽환스런 문장에 관한 호오도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 아니겠는가. 좋건 싫건 반드시 한 번 직접 읽어보시고 결정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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