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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유령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최용준 감수 / 열린책들 / 202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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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제일 뒤에 “블라네스 1984”라고 작품을 쓴 장소와 연도가 쓰여 있다. 그런데 책은 2016년에 나왔다. 볼라뇨는 2003년에 바르셀로나에서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죽은 다음 14년 만이고 작품을 완성하고 부터는 무려 32년 만이다. 즉 사후 출간한 초기 작품이라는 뜻. 나는 이런 작품은 믿지 않는다. 볼라뇨가 <SF의 유령>을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마음에 들었거나, 돈을 받고 독자에게 팔 수 있는 상품이라고 봤다면 죽기 전에 벌써 책방에 깔려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면 작가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더 수정해야 할 미완성 작품으로 여기다가 눈을 감았겠지. 끝내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미완성인 채 남겨둔 작품. 몇 번 이야기한 거 같은데, 나는 대가들의 사후 출판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왜 읽었느냐고? 볼라뇨니까. 도서관에 책 있으니까 읽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볼라뇨의 시집 말고 소설책은 다 읽고 싶다. 품질을 떠나서 몽땅. 팬이라면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작품의 주인공은 칠레인은 칠레인인데, (볼라뇨처럼)아옌데 대통령을 참살하고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자마자 칠레를 떠서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두 명의 청년 한 슈레아와 레모. 한은 SF 소설을 습작하고 있고, 레모는 아방가르드 시를 쓰려 한다. 이들은 멕시코시티 외곽의 엘리베이터 없는 녹회색 8층 건물의 8층에 살며, 최고층 주민의 특권으로 당연히 옥상도 거의 소유한 것처럼 보인다. 나중에 레모의 친구들이 함빡 놀러 와 옥상에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짝을 이루어 화장실에 들어가 할 거 다 하고, 밤그늘이 제법 어두운 구석에 가서 서로를 실컷 더듬는 등 난장판을 벌이기도 한다.
레모는 176cm의 키에 청바지, 파란색 티셔츠 차림으로 아메리카에서 가장 긴 거리의 갓돌 위에서 햇살을 맞으며 서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그는 함께 칠레에서 도착한 룸 메이트 한에게 말한다.
“나는 신문 문예란의 시평을 담당하는 스타 기자가 될 거야.”
반면에 한은 죽자사자 SF 소설에 관심을 두고, 전세계, 특히 미국에 몰려 있는 SF 소설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팬레터를 보낸다. 한은 삼시 세끼 때문에 하루에 한 번 정도 식료품점에 가는 것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집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레모에게 시 창작교실에 다녀볼 것을 권유한다. 그리하여 출석하기 시작한 곳이 등단 시인 헤레미아스 모레노의 시 창작교실. 이곳에서 만난 멕시코 사내 호세 아르코. 기름에 찌든 청바지에 검은 가죽 부츠 차림의 낯선 사내. 그러나 헤레미아스가 비록 겉으로나마 예의를 차리는 될성부른 떡잎이었으며, 작품이 진행되면 레모와 함께 아방가르드 시 동인을 만들려 하는데, 이때 독자의 머리에 딱, 떠오르는 또다른 볼라뇨의 소설, 심지어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 그 책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 1920년대 멕시코 아방가르드 시 창작 소 그룹.
이것을 눈치채는 순간 <SF의 유령>은 재미없어진다. 놀랍게도 한 순간에 그렇게 되더라.
이제 스물한 살이 된 레모와 한은 멕시코 젊은이들과 어울려 시를 궁리하고, SF 소설을 쓰면서 앞에서 말했듯이 한쪽으로는 여자와 섹스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등장하는 여자들도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유사하다. 특히 나이든 노파 ‘에스트레이타’마저. 에스트레이타는 생활고에 허덕이는 늙은이면서도 젊은 아가씨 테레사, 앙헬리카 토렌테와 어울려 카페에 앉아 있다가 레모를 따라 나치의 군복 색깔과 똑 같은 녹회색 건물까지 동행해, 술 마시고 그냥 떨어져 자 버리기도 한다. 이 늙은이(와 비슷한 여성 인물)도 다른 볼라뇨에서 여러 번 본 적 있다.
그래서, 아니겠지만, 볼라뇨에게 <SF의 유령>은 훗날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쓰기 위한 스케치였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비단 <… 탐정들>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에서 몇 차례 등장한 사람들이 모인 듯한 기분. 볼라뇨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독일인 아르침볼드가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니까, 말 다했지. 하여간 대가의 사후 출판 작품은 조심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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