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게 하는 꿈이 있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629
이문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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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재. 1959년 김포생. 나는 서울 출생이지만 김포 사람이다. 시인과 성씨도 같다. 조부모, 부모도 김포 문중 납골당에서 사이좋게 한 방에서 명복을 누리시고 있다. 그래서 처음 이이의 시집을 읽었을 때부터 어어, 이거 혹시 우리 문중 사람 아녀? 이랬다는 거 아닌가. 근데 다행이다. 시집을 읽어보니 원래 평안도 웅진 사람인데 전쟁 때 부모가 형과 누나를 솔가하여 꽝꽝 얼어붙은 바다 위로 인천, 태안을 거쳐 저 남도 끝자락까지 피난을 해 먹고 살다가 김포로 옮긴 다음에 시인을 낳은 거란다.

  이문재는 1990년대부터 읽었으니 세월이 꽤 됐고, 기중 좋아하는 시인으로 시집이 탁 보이면 척 골라 읽는 수준이었다. 근데 이젠 그짓도 그만 해야겠다. 내가 만일 이이의 동생이라면 다시는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는 못할 거 같다.



  문자 메시지


  형, 백만 원 부쳤어.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야.

  나쁜 데 써도 돼.

  형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잖아. (문학동네, 《지금 여기가 맨 앞》, 2014)



  이문재는 문학동네 시집과 이번 시집 사이에 팍 늙어버렸다. 그래서 위에 소개한 문자 메시지를 보낼 생각도 안 할 거 같다. “형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잖아?”

  이 시집을 읽으면서 제일 읽을 만했던 것은 다른 시인도 아니고 무려 나희덕이 쓴 발문 “생각을 생각하는 시, 꿈을 꾸게 하는 꿈”이었다. 같은 시인 그룹의 선배 시인이 자기 시집에 발문을 써 달라고 하니 아무리 나희덕이라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겠지. 나희덕도 국문학 박사님이니 그럴 듯한 발문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그리하여 한 마디 꽝, 하는 데:

  “시집 제목부터가 재귀적 표현이다. 수록된 시들의 제목을 일별해보아도 ‘고통이 말해주지 않는 고통’ ‘혼자의 혼자’ ‘혼자 혼잣말’ … 등 동어반복과 재귀적 허용이 잦은 편이다. 시집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반복과 변주는 그야말로 ‘이문재식 문장법’이라고 부를 만하다. 1부만 해도 재귀적 문장이 수두룩하다.” (p.164)

  정말 그렇다. 그래서 책의 뒷표지, 가끔 책 판매를 위한 카피 역할을 하는 뒷표지에 뭐라 적어 놓았느냐 하면,


  꿈을 꾸게 하는 꿈이 있듯이

  시를 쓰게 하는 시가 있다.

  밥을 먹게 하는 밥이 있듯이

  삶을 살게 하는 삶이 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삶을 살도록 하는 죽음들이 있다.



  뭔 시집의 카피가, 말이 많았다.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시를 읽어보자. 다행히 짧은 시다.



  눈동자



  눈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눈동자다


  눈동자는

  다른 눈동자가 필요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눈동자는

  내 눈앞에 있는 다른 눈동자다 (전문.  p.11)



  원래 시인들이 하는 말이 이렇지 뭐. 그냥 내 앞에서 나를 봐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이렇게 한 거다. 사실은 나를 봐줄 필요까지도 없고 그냥 앞에 있어 주기만 해도 좋을 사람 하나.

  그러나 시집의 저 뒤로 가면 이 눈동자에게 작지 않은 일이 생긴다.



  눈동자 2



  눈동자가 위기에 처했다

  눈동자가 눈동자를 찾지 않는다


  눈동자를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다른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지


  눈짓으로 말한 적이 언제

  서로 눈빛을 마주친 적이 언제였는지


  눈동자가 위험하다

  눈동자가 눈동자를 잃어버렸다  (전문. p.125)



  에그. 시인이 좀 외롭구먼. 늙으면 다 조금씩 외로워지는 것이지 뭐. 하긴 시인이니까 이리 엄살도 떨고 그러는 거겠지만. 근데, 그래서 당신 눈동자가 잃어버린 눈동자는 몇 알이나 되는 거야? 같은 단어 이리 줄을 이어서 이게 시입네, 하니까, 재귀적으로 눈동자 눈알을 주욱 나열하니까 성질 좀 풀리시나 보다.

  초장부터 까탈을 부리는 건, 시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다. 확실하게 말하자. 지금 나는 이 시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했지, 조금도 시가 잘못된 것이란 의미는 담지 않았다. 틀림없이 시 읽는 수준이 별볼일 없어서 이렇게 말하는 용기도 있을 거라 여기면 정확하게 맞는 생각이다. 무엇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너도 봄날



  거울 속의 거울

  마주 보는 거울은 떼어놓기

  눈동자는 다른 눈동자와 마주 보게 하기

  눈동자 안에 다른 눈동자 빛나게 하기

  반짝이는 눈동자에게

  꿈을 꾸게 하는 꿈 말해주기

  시를 쓰게 하는 시 서로 읽어주기 (전문.  p.12) * 원문은 모든 행이 한 연인데 그냥 붙여 인용했음.



  단어를 연속해 가져다 놓음으로 강조의 의미도 줄 수 있고, 의미를 확장할 수도 있고 하여간 여러 시적 표현이 가능한 연상작용을 의도했을 수 있겠지만, 앞에서 눈알이 툭 튀어나오고, 몇 페이지 건너 다시 눈알이 툭 튀어나오고, 저 뒤에서 또다시 눈깔이 툭 튀어나오면 이거 뭐 가자미 눈깔도 아니고, 동태 눈알도 아니고, 죽어도 못 잊는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누이동생의 눈동자도 아니지, 많고 많은 눈동자에 뭐가 그리 좋은 것이 많다고, 서로 눈알끼리 마주보게 해야 하느냐는 것. 낸 앞의 눈동자 모두 선하고, 아름답고, 눈길만 닿았다 하면 찌르르 아랫배가 찌릿하고, 다 그럴 거 같지? 그 많은 눈동자 속에서 몇 알, 몇 쌍은 당신의 눈동자를 읽으면서 저걸 어떻게 뒤통수를 칠까, 몇 대나 때려줄까, 지갑에 얼마나 들었을까, 애먼 생각을 하는 눈알도 수다하게 있을 수 있다. 시인도 다 알면서 저리 예쁜 눈동자만 골라 생각하라고 하는 거다. 그게 시니까. 좀 독하게 평하는 거 같은데, 나는 한 마디로, 나희덕이 말한 재귀적 표현을 지극하게 싫어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쁜 말이 안 나가지.

  1959년생이니 이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자리에서는 은퇴를 했을 거 같고, 그럼 명예교수? 아, 그 참. 명예교수들이 문제라니까. 열라 시 쓰고, 공부하고, 발표하고, 제자들에게 만날 올림을 받으며 살다가 갑자기 툭. 여태 가오가 있었으니 무슨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도무지 뇌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황지우는 말했다는 거 아냐.

  “성님, 시는 이십대에나 쓰는 거 아뉴?”



  엄마 전화기



  엄마 전화기가

  여전히 살아 있다

  세상 떠난 지 1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원을 켜면 문자메시지가 와 있고

  부재중 전화도 제법 있다 어쩌다

  진동이 울리면 받을까 말까 망설여진다

  전화기가 죽으면 엄마가 또 죽을까 싶어

  충전을 계속하는데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죽은 엄마 전화기를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살아 있는 나 때문임이 분명하다 며칠 전에도

  너무 힘들어 엄마한테 문자를 보냈다

  나도 거기로 가고 싶은데 엄마 나 가도 되나

  답 문자 기다리는 대신 엄마 전화기 속으로

  이니셜과 별명이 많은 엄마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수백 번 넘게 열어본 우리 엄마

  그래서 그렇게 비상금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빠와 매번 심하게 다퉜고 그래서 그래서

  요양원에 있는 엄마의 엄마한테 달려갔고

  그래서 그날 새벽 차를 몰고 동쪽 바다로 향했고

  그래서 엄마가 그래서 엄마는 그래서 나도

  그날 이후 눈을 들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엄마 전화기를 버리지 못하고 겨우 견뎌왔는데

  이제는 안 되겠다 이렇게 한 살 더 먹기 전에

  죽은 엄마 두번째 생일이 오기 전에

  전화기를 엄마한테 돌려줘야겠다

  매번 다짐하곤 하는데 다짐하긴 하는데   (전문. p.24~25)



  이번 이문재 시집을 읽으면서, 이 시집을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 않기로 작정하게 만든 시. 이 시의 화자가 누굴까? 시인의 엄마? 시인의 아내? 아이쿠, 시인의 아내는 취소. 멀쩡히 살아 있는 분일 확률이 높은데 산 사람을 그리 말하는 건 사람 할 일이 아니다. 그럼 시인의 삶 속 특정한 여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는 늙은 시인의 어머니, 2년 전에 돌아가신 모친을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이 시를 언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문재가 환갑이 넘어 돌아가신 것 같다.

  그런데 이거 뭐 이렇게 궁상이야 싶다. 세상에 어머니 보낸 사람이 시인 한 명인가? 자실 만큼 자신 나이가 부끄러울 것도 같은데, 뭐 그렇다고 꼭 이렇게 내놓고 큰 울음을 울지 말라는 얘기도 아니지만, 아이고, 난 딱 싫다. “죽은 엄마”를 얼른 잘 보내드리는 것도 나이 든 자식이 할 일. 내 이야기를 해서 안 되기는 했지만, 난 죽은 엄마가 꿈에서도 잘 오시지 않는 게 그렇게 고맙더만. 생과부로 두 아들 키우느라 뼈빠지게 고생하다 간 엄만데도 돌아가시자마자 팍 보내드렸는데, 그것도 괜찮은 일이란 걸, 시인은 모르는 모양이다.

  시집 안 읽어본 분은 모르시겠지. 이 시집의 가관은 2부 이후부터 나온다.

  이미 55세도 아니고, 60세도 아니고, 65세 정년퇴직한 명예교수라는 분이, 뒷방으로 물러났으면 거기서 좀 고요히 여생을 즐기면 될 것을 세상살이 거의 모든 잡사에 끼어들어 한 마디를 하고 싶어한다. 그거 참.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세계정세 같은 거에 빠지지 않으려 하니, 나중에 시인의 엄마처럼 세상 등질 때 얼마나 아쉽겠느냐고. 제발 좀 그러지 마시라. 쓸데없이 말 많고 참견 많은 꼰대를 주책바가지라 하는 것도 아실 터인데. 오랜 팬이라서 이런 말도 올려주는 거란 것도 이해해줄 연치의 시인이라서 오랜만에 속 다 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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