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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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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읽는 제니퍼 이건으로 이렇게 단정하면 곤란하지만, 이이의 작품을 더 재미있게 해주는 진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범죄. 아주 대놓고 범죄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내 경우에 이건을 읽은 코스가 자잘하고도 상습적인 좀도둑질로 시작해, 각종 지능적인 사기를 거쳐 이번에는 합법적, 반쯤 합법적, 완전히 불법적 업소를 거느리는 폭력 조직까지 발전하면서 재미의 도를 높여갔다. 당연히 범죄가 스토리 라인은 아니지만 하여간 재미를 증폭시키는 인공조미료 역할을 단단히 한다.
책에서 제일 먼저 소개할 인물은 에디 캐리건. 이름만 봐도 탁 아일랜드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일랜드에서 결혼해 딸 브리앤을 낳고, 브리앤의 엄마가 죽고나서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도착한 아버지는 외로운 곳에서 혼자 살 수 없어 여인을 만나 에디를 낳았다. 그리하여 브리앤과 에디는 이복 남매. 훗날 친남매보다 더욱 돈독한 정을 쌓고 살지만 어릴 때는 그럴 기회도 없었다. 에디의 엄마도 에디가 네 살이 되던 해에 티푸스에 걸려 생을 마감해버렸다. 아버지는 어린 두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브리앤을 뉴저지에 사는 외가에 보내고, 에디는 뉴욕 가톨릭 소년 보호소에 들여보냈다. 가슴이 천 길 나락으로 떨어졌겠지만 그때뿐, 에디의 인생에서 다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소년 보호소에서의 에디. 가톨릭 집안의 아이들을 모은 보호소니까 주로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가정의 아이들일 터인데, 아일랜드 아이들이 대다수인 것 같다. 남자 아이들이 모인 아동 보호소는 작은 정글. 이곳에서는 저절로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할 수밖에 없다. 에디는 완력 보다는 사슬을 감은 문 틈새로 빠져나가는 능력, 원숭이처럼 가로등을 기어오르는 능력, 후디니 같은 탈출 묘기에 능했다.
보호소 아이들은 열 살이 넘으면 낮에 밖으로 나가 자잘한 일을 해 돈을 벌기도 했는데, 에디는 좀 먼 동네에 가서 우연히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휠체어를 탄 노신사 드비어 씨를 만나 말동무도 해주고 카드 게임인 세븐카드 스터드도 배운다. 드비어 씨가 에디의 숨겨진 또다른 재주를 발견했는지 자신이 밑돈을 대주고 작은 포커게임판에 입성시켜 게임을 하게 하고, 매일 전날 한 게임을 복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드비어 씨는 신사. 그는 에디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1920년대니까 감안해 읽자.
“절대 사기는 안 돼. 단 한 번이라도. 사기는 어린 여자의 처녀성 같은 거야. 한 번 했건 백 번 했건 차이가 없다고. 타락한 건 마찬가지야.”
이 시절에 에디는 보호소 동기 가운데 중요한 두 명이 이스트 강에 빠진 것을 건져 목숨을 구해준다. 존 더넬런과 바트 시헨. 둘은 성인이 되어 대공황 시절에 존은 부둣가의 작은 보스이자 도박판을 관리하는 하급 갱단 두목, 바트는 주검사 사무실 소속 검사. 에디는 이들과 달리 보호소에서 나온 후에 보드빌에 관심을 두어 그곳에 진출, 작은 쇼에 출연해 보호소에서 계발한 자기의 재주를 공연하면서, 아름다운 코러스 겸 백댄서 애그니스와 사랑에 빠져, 미네소타에 사는 처가 식구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맏딸이자 작품의 주인공 애너를 낳고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답지만 자기 몸을 거의 운신도 하지 못하는 장애 아이 둘째 딸 리디아를 낳는다.
원래 성실한 성격의 에디는 극장주의 눈에 띄어 극장 하나를 관리하면서 주식에 관심을 두어 주식 중개인이 되고자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이때 신용거래로 주식 매수와 매도에 뛰어들어 큰 부자는 아니지만 아일랜드인 커뮤니티에서는 부자 소리를 듣는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대공황. 한 방에 거덜이 난 캐리건 가족은 집도 작은 아파트의 6층으로 이사하고, 근사한 차도 팔고, 갖고 있던 거의 모든 것을 팔며 하루하루 지내게 되는데, 왕년에 목숨을 구해준 존 더넬런의 수하에 들어가 이것저것 심부름을 하며 푼돈을 벌다가 존의 한참 위 보스인 덱스터 스타일스에게 발탁되어 주로 돈 세탁에 관계된 일을 하며 다시 넉넉한 생활을 잠깐 누린다. 스타일스 씨와의 면담에서는 그의 철학대로 가족을 데리고 스타일스 씨 집을 방문했는데 이때 에디와 함께 간 가족이 에너 캐리건, 맏딸이었고, 스타일스 씨는 한 겨울에 추위를 무릅쓰고 맨발로 맨해튼 비치에 발을 담근 에너가 아마도 마음에 들어 에디를 고용한다.
에디는 열한 살 때 휠체어의 노신사 드비어 씨한테 어쨌든 사기 행각은 하지 말라는 교훈을 배웠던 터. 그간 스타일스 덕분에 잘 먹고 여유있게 살고, 무엇보다 둘째 딸 리디아를 위하여 전신 마비용 휠체어를 사 줄 수 있었지만 늘 자신의 일이 법 앞에 떳떳하지 못했던 것이 찜찜했던 모양이다. 존 더넬런의 출연 목적은 에디와 딸 애너가 덱스터 스타일스와 관계를 맺게 하는 것과 비슷하게, 바트 시헨을 구해준 건 에디와 스타일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해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게 만드는 데 있다. 결국 에디는 바트 시헨에게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이탈리아 갱단의 고위 세력가 덱스터 스타일스에게 터미네이션을 당한다. 에디 자신도 결국 그렇게 될 줄 알고 가족에게 쇼핑백에 가득 든 현금과 예금통장을 남기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후, 온몸을 철제 체인에 감겨 무척 깜깜한 3월의 맨해튼 앞바다에 산 채로 수장을 당하는데, 보드빌 시절에 에디가 뭘 공연했다고? 후디니가 뭐?
작품의 주인공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이제 열아홉 살이 된 에너 캐리건이 브루클린 해군 공창에서 거대 군함에 쓰일 부품 규격을 재는 일을 하다가, 잠수해 선박을 수리하거나 조사하는 다이버 일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기어이 다이버가 되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여태 소개한 내용은 에너가 아직 어린 시절에 국한한다.
애너가 하고 싶었던 다이버는 1940년대 초반의 미국에선 여성이 진입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제니퍼 이건은 앤드리아 모틀리 크랩트리라는 퇴역 육군 여성 심해 다이버를 발견하고 이이를 모델로 해서 어떻게 다이버가 될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를 비롯해, 다이버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 당시 여성으로 과정을 감당하는 동안 가장 큰 장벽으로 여겨졌던 것을 충분히 취재했으리라. 여기에 독후감 초두에 썼듯이 인공조미료를 듬뿍 뿌려주기 위하여 이탈리아계 갱단의 최고 우두머리, 아마도 아흔 살은 넘은 듯 보이는 미스터 Q씨와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인 Q씨의 바로 아래 직급 정도로 보이는 덱스터 스타일스를 등장시킨다.
덱스터 스타일스 역시 맨해튼 비치에서 이탈리아 음식점을 열었던 평범한 이탈리아 가정의 아들로 일찌감치 하이틴 시절에 Q씨 수하에 들어가 힘 깨나 쓰다가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여성 해리엇 베링어와 결혼한다. 덱스터도 훌륭한 갱 조직을 운영했지만 오랜 세월 그렇게 잘 나가게 된 건 처가집인 베링어 가문의 막강한 정치적, 경제적 끗발과, 베링어 가문과 Q씨의 묵언에 의한 이해관계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덱스터가 아무리 갱이지만 그래도 사나이답고, 자기 나름대로 의리 같은 것이 있더라도 미국 작가의 작품 속에 갱단 두목도 아니고 두세 번째 두목이라면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곱게 살아있기 힘든 문학적 운명에 처해있기 십상인데 이 작품에서도 그럴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안 가르쳐드린다.
하여간 세월이 지나 자기가 처단한 에디 캐리건의 맏딸 애너, 일찍이 자기 집에 온 애너를 품평하기를, 용감하고 강한 아이라고, “얘들이 우리보다 더 강해요. 쟤들이 그걸 모르니 우리로선 다행이지요.”라고 했던 건 이미 잊었지만, 다이버가 되고 무엇보다 특별나게 아름답지는 않아도 충분히 성인이 된 다음에 덱스터 나이트클럽에 와서, 아무도 함부로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덱스터의 테이블에 턱 나타나서, 그의 뇌리에 에너를 고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젊은 여성이 한 시절, 그렇게 믿고 일을 맡겼던 에디 캐리건의 맏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있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내가 스마트폰 앱 북적북적에 별 다섯을 채우지 않은 것은, 예상했던 미국식 결말을 향해 착착 다가가기 때문이다. 마지막 반전이 혹시나 있을까 싶어 휙휙 날아가는 심정으로 후다닥 읽게 만드는 필력이라 할지라도,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소설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미국식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허탈해지는 심사를 숨기지 못하겠더라고.
작품 속에서 미국 상선이 독일 유보트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당하는 장면도 나온다. 침몰하는 엘리자베스 시먼호에서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한 선원들은 여지없이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 꼴이 났더라도, 독자는 정의로운 미국인이 결코 인육 섭취 같은 극단적인 생존을 거부할 것이란 것도 알고 있고, 중요한 등장인물은 결국 끝까지 생존해 평온한 삶을 유지하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가 기대했던 긴장감은 아쉽게도 애초에 1도 없었단 거다.
씩씩하고 강인한 애너가 사랑이라기보다 한 순간의 욕정에 더 가까운 심정으로 살아생전 처음으로 맛본 엑스터시를 수반한 진짜 섹스를 통해 임신을 했을 때도, 다이버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임신중단을 결심하고, 공창에서 만나 친구가 된 넬을 통해 산과 의사를 찾아가 클로로포름 마취를 위해 마스크를 덮는 순간까지, 독자는 용감하고 강한 애너가 끝내 안 그럴 줄 알면서, 결국 출산을 선택할 줄 알면서도, 임신중단 수술을 받기 바랐지만, 제니퍼 이건은 단칼에 독자, 나의 바람을 거절해버렸다. 미국의 독자는 아직까지 속으로는 임신중단을 원하지 않거나, 적어도 임신중단 시행을 내놓고 이야기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보수적인 나라가 미국이잖아.
만일 유럽의 여성작가였다면,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였다면 아마도 단칼에 처리해버리고 말았을 거 같다. 왜 애너는 여러 사람 힘들게 출산을 선택했을까? 미혼모이며, 고모 브리앤의 도움이 없으면 결국 다이버 일도 중단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태였음에도. 혹시 모르지. 제니퍼 이건도 그걸 바랐지만 애너 캐리건이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을지도. 내가 임신중단을 지지했던 건, 만일 당사자 애너가 내 딸이었다면, 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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