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사실 창비시선 481
전욱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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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욱진이 누군가 했더니 한때 수필집 《선능과 정릉》을 쓴 시인이구먼. 선능은 올해 명예교수가 될 응식이네 2층집이 있던 동네, 내가 졸업한 대일고등학교가 저 정릉동 산 꼭대기에 있어서, 선능과 정릉, 두 능 다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곳이라 읽어볼 생각도 안 했던 책이군. 하긴 에세이 모음집이면 애초에 읽을 엄두를 내지도 않았겠지만. 전욱진의 “선능과 정릉’은 아마 우리가 ‘선정릉’이라 부른 삼성동 거기를 말했던 듯하다. 아니면 말고.

  별의 별 곳을 다 뒤져도 전욱진의 개인정보는 1993년 서울생이란 거밖에 안 나온다. 그럼 내 작은 아이하고 동갑일세. 왜 애꿎게 작은 아이 나이를 흘리는가 하면, 힘들여 시 쓴 시인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읽기는 어렵지 않게 읽히는데 정작 어떤 뜻을 전하려고 하는지 그게 매우 헛갈린다는 거다. 전田旭鎭 시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즘 책방에서 이름을 낸 시인들의 시집 거개가 좀 그런 편이라서, 혹시 시 쓰고 읽는 일에도 세대 차이가 있는 거 아닐까, 이런 난감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시를 전보다 확실히 드물게 읽는다. 가면 갈수록 시 읽기가 더 난감해진다. 그만큼 시에 대한 애정도 식어가는 것 같아 나도 아쉽다.


  이 시집의 시들이 다 어떤 뜻인지 모르겠다는 건 아니다. 가끔은 읽자마자 탁 이해가 가는 시도 있다.



  와사비



  물 맑은 냇가에서

  서늘하게 자라

  뿌리를 갈아 만들고

  일본산이 유명하다나요


  특유의 매운 맛과 향이 있는데

  혀가 아리고 콧등은 시큰하며

  눈에는 눈물이 핑 돈다면서


  그러니 많은 양을 한꺼번에

  입에 넣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적당하면 알싸함 뒤에

  은근한 고소함을 느낄 수 있지요

  흰 살 생선을 칼로 저미는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때 나란히 앉아

  그 얘기를 들으며

  함께 기다리던 사람과는 이제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었고요


  그때는 동그란 눈을 같이 하고선

  이게 생선의 비린 맛을 없애고

  과연 감칠맛은 살리는 거군요


  다시 와서 먹는데

  맛있네요  (전문. p.64~65)



  딱 그림이 그려진다. 일식집 바. 소위 ‘다찌’라고 부르는 곳. 좀 됐겠지, 전에 둘이 와서, 그게 옛 애인이 됐건, 그냥 친구가 됐건 하여간 둘이 와서 다찌에 앉아, 회를 떠주거나 초밥을 만들어 한 점씩 건네주던 요리사가, 이게 생와사빈데요, 하면서 이야기를 했겠지. 시집이 나온 게 시인이 스물아홉 살이니까 틀림없이 둘이서 일식집 다찌에 앉아 회 또는 초밥을 먹었던 것도 20대였을 거다. 그래 요리사가 설명해주는 걸 나름대로 재미있고, 새로운 지식이기도 하고, 또 진짜로 먹어 보니까 그럴 듯하게 맞는 말이기도 해서 딱 기억에 남았겠지. 그러나 그 사이에, 예전과 오늘 사이에 나 아닌 둘 가운데 하나가 내 곁을 떠났고, 오늘은 나 혼자 와서 회 또는 초밥을 먹었는데 외롭긴 했겠지만 맛은 그대로네. 하는 시. 이왕이면 전에 함께 온 사람이 옛 애인, 그냥 조금 사랑한 사람 말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죽고 살 만큼 사랑했던 이였으면 어땠을까? 뭘 어때, 그랬으면 아예 다시 와 볼 생각도 안 했겠지.

  이 시, 쉽다. 다 이랬으면 좋겠다.

  이런 시? 한 페이지만 넘기면 또 나온다.



  휴일



  거울 앞에 나 아니고 노동이 서 있을 때

  누군가 날 부르는데 노동이 고개 들 때

  곰살갑게 식탁 앞에 앉아 있을 때

  일인용 침대 위에 포개어 누울 때

  그게 나의 내부를 계속 궁금해할 때

  그래 나도 펑하고 보여줄까 고민할 때쯤


  쉬는 날이 온다


  정오쯤 일어나서

  햅쌀을 안치고


  거실 바닥 쓸고

  화분에 물도 주고 하는 날


  쓸모없는 나절을 꼭 보낸 다음

  사랑하는 소리를 듣고 내는 날


  노동한테 이겨먹기 위해

  내가 제일 가엽다는 생각 하나로

  누구 하나 미워할 필요 없이도


  간신히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날  (전문. p.66~67)



  이 시도 즉각 접수된다. 휴일 전경. 혼자 사는 청년의 휴일 하루. 아주 바람직한 청년이군. “거울 앞에 나 아니고 노동이 서” 있으면 내가 곧 노동이라 휴일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노동자 신분이겠군. 하여간 다각도로 싱숭생숭할 때 휴일이 온다나? 착한 청년이라니까. 오정쯤에 일어나 대강 얼굴에 물 묻히고 나가서 삼각김밥에 라면 사 먹는 게 아니라 햅쌀 안치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이런 청년 있으면 당연히 사위감으로 눈 여겨봄 직하다. 그리고 곧장 청소도 하잖아. 장가들면 아내 고생은 안 시키겠네. 이렇게 자잘한 거 해주는 남편이 진짜 귀염 받는 거다.

  그건 그런데, 다른 시들도 전부 이렇게 쉽고 편하지는 않다는 거.

  좋건 싫건 간에 오늘이 9월 1일, 하여간 어쨌거나 오늘부터 가을이다. 드디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왔다.” 그러나 아직도 겁나게 덥지? 좋다. 이 시집의 제목도 “여름의 사실”이니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를 기억하며 전욱진의 여름 노래 하나 들어볼까?

  여름은 장마전선이 북쪽으로 밀려 올라가면 그때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리하여,



  몬순



  실바람에 거뜬히도 걷는 이가 많은

  강변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

  그의 아들애로 보이는 사람도 있다


  손잡고 이어진 둘을 내가 지날 때

  자주 강을 건너는 기관차도 지나고

  어머니가 무슨 말을 들려주었는지

  아들애가 말 따라 큰 소리 내더니


  ‘따우 호아’는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아이 어머니는 ‘기차’라고 일러준다

  고향에서 쓰던 말인가보다


  그렇게 같은 말소리가 거듭

  어린아이로부터 생겨나더니

  강을 가로지르는 긴 빗소리

  불어오는 물바람도 미지근히  (전문. p.16)



  이 시도 수월하게 읽힌다. 난 어지러운 시는 이제 어려워서 별로 끌리지 않는다. 고르고 고른 시 역시 그래도 빨리 접수되는 시였구나. 이 대목에서 한 번 웃어야 하는데 시 읽는 소양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 거 같아서 웃는 것도 좀 민망하다. 

  근데 나로하여금 곤혹스럽게 만드는 게 2연 첫 행. “손잡고 이어진 둘을 내가 지날 때.”

  손잡고 이어진 둘은 틀림없이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 아들애로 보이는 사람이겠다. 그런데 내가 이런 둘을 지나가? 여기서 ‘내’가 ‘나의’ 즉 소유격 일인칭대명사? 아니면 강변이니까 강보다는 좀 작은 내川? 이건 좀 알아야 시를 그나마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모르겠다는 말이다. 다문화 모자가 등장하는 거야 뭐 제목을 “몬순”이라 해 놓았으니 제대로 된 몬순이 흔한 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기구일 터이니 알아듣겠는데, 그래서 강을 가로지르는 길고 긴 비, 몬순이 올 것일진대, 저 “이어진 둘”이 뭐냐, 이거다. 처음엔 “이어진 돌”이라 읽어 징검다리 비슷한 돌다리로 알았지 뭐야. 이런 형광등 같으니라고. 혹시 이어진 둘이란 것이, 동남아에서 온 어머니와 다문화가정의 아들. 그러니 이것도 우리나라의 아열대화 비슷한 걸 떠올리게 쓴 것일까?

  글쎄 이런 건 시인한테 물어봐도 안 가르쳐준다니까? 당신 생각이 맞습니다, 이러고 말 걸?

  하여간 장마, 이젠 기후변화로 장마를 극한 몬순이 끝나면 곧바로 들이닥치는 게 폭서다.



  폭서



  슬그머니 볕이 그늘로 들어온다

  팔월 목전에는 볕도 버거운가보다

  그늘은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

  처지와 사정을 서로 묻고 답하며

  처음 만난 사이에도 알록달록한데

  지나가던 바람이 어디 길을 묻길래

  책을 덮고 내가 먼저 가르쳐준다  (전문. p.17)



  이 시도 재미있다. 더 좋은 건 짧기까지 하다는 거.

  8월에는 볕도 버거워 그늘이 기꺼이 자기 자리를 내준다는 건, 그늘에 햇볕이 쳐들어와버렸다는 뜻이겠지. 덥겠다. 더워도 오지게 덥겠다. 8월 더위는 충분한 습기를 머금고 있어서, 축하합니다, 오후 세시 현재 습도 89퍼센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저 숨이 턱턱 막힐 터인데, 이상하게 시는 그리 덥지 않다. 그건 바람이 지나가면서 묻는 길을, 내가 책을 탁, 덮으며 갈 길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하여간 책을 덮으면서 길 가르쳐주는 일 하나는 시원하잖아.

  당신의 여름도 그나마 견딜 만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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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9-01 07: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트는 9월 1일에 업로드 했지만 사실 7월 초, 아직 장마가 시작하기도 전에 쓴 거라서, 9월 1일이면 당연히 늦더위가 여전할 줄 알았건만 어제 아침부터 지금까지 비가 와장창 쏟아져 하나도 덥지 않다. 사람이 천기를 미리 짐작하는 일은 얼마나 우스우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