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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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휴, 세월이란. 에코 읽은 지가 벌써 8년이 됐다. 이이의 마지막 소설 작품이라는 <제0호>는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세월만 잡아먹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 초판이 2018년 말이네. 그러면 내가 “이젠 움베르토 에코는 읽을 만큼 읽었다.”라고 뻥치고 다닐 때쯤. 그러니 나온 줄도 몰랐지.

  움베르토 에코. 무지하게 재미있다. 그런데 읽기는 쉽지 않다. 마음 단디 먹고, 각도 좀 잡고 읽으면 한 해 여름밤 정도는 책임질 수 있는 즐거운 지옥을 만날 수 있는 작가, 기호학자, 수수께끼 내는 스핑크스이자 미학자. 왜 “즐거운 지옥”이냐고? 그거야 읽어보시면 알지.

  우리나라에서 움베르토 에코, 하면 역자 이윤기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이윤기의 번역이, 세상에나,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더 빨랐다는 거 아닌가 말이지. 이윤기가 얼마나 이에 대해 자랑을 해댔는지 아직도 모습이 눈에 훤한 거 같다. 모쪼록 영혼이나마 평화 속에서 쉬고 있기를.

  근데 엉뚱한 곳에서 일이 벌어진다. 우리나라의 속도전에 기겁을 한 단체가 있었다. “일본 에코 학회”. 이윤기 번역의 <장미의 이름>이 나오고 아마도 1년 이상이 지난 후에 일본어 번역판이 나왔는데, 에코 학회가 보기에 그것도 매우 빠른 번역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리하여 일본 에코 학회가 정기 학회를 열면서 우리나라 U. 에코 대표선수로 이윤기를 초청했다. 아마도 이윤기, 안 갔을 걸?

  내가 놀라 자빠진 건, 아다시피 이윤기는 이탈리아어를 못하는데도 <장미의 이름>을 그리 빠른 속도로 번역했고, 그리스어도 모르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순식간에 번역하는 놀라운 신공을 자랑했던 인물. <장미의 이름>의 영어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중역본이었을 걸? 아니면 Sue me! 이탈리아어를 일본어로 직역한 일본 에코 학회보다 더 빨리 번역본을 깔아 놓은 이윤기와 열린책들의 신공이여, 영원할지어다. 비행기 타고 일본에 가면 에코 학회에서 한 마디 해야 할 터, 아마 천하의 이윤기도 조금 쫄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안 갔을 거 같다. 아니면 말고.

  왜 애꿎게 이윤기 타령인가 하면, 이 책 <제0호>의 역자 이세욱 역시 이탈리아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정도는 아닌 거 같아서. 서울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주로 프랑스 책을 번역한 베테랑이다.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미셸 우엘벡 등을 번역해 돈을 좀 만졌을 테고, 이탈리아 작가로는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아름다운 소설 <이런 이야기>와 움베르토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와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등을 번역했다. 그렇다고 내가 이이의 이탈리아어 직역을 믿는 건 아니다. 못 믿을 확정적 증거도 없지만 우리나라 출판계와 열린책들을 보아 그렇게 생각한다. 2018년에 나온 책이면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어 전공자들이 번역을 시작했을 땐데 왜 중역을 의뢰했을까? 특히 이탈리아어 번역은 글 좋은 사람도 꽤 있었을 텐데. 뭐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 한 마디 했다. 책 부록 “옮긴이의 말”이 좀 아니꼽기도 했고. 뭐 사는 일이 다 그렇지.


  작품은 1992년 6월 6일, 토요일 오전 여덟 시에 시작한다. 주인공은 이탈리아 남자로는 색다른 이름 ‘콜론나’인 50세 남자. 자칭 루저. 콜론나의 불행은 할머니가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혼용하는 지역인 트렌티노 알토 아디제 지방 사람인 것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할머니한테 독일어를 배우고 날로 쓰매 편안하게 됐기 때문에, 대학 1학년 때 학비를 벌기 위하여 독일어 책을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고, 독일어 사용자가 별로 없어서 영어나 불어 번역보다 높은 보수를 즐겼으며, 자연스럽게 독일어를 전공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늘 좋은 일만 있으면 책 읽는 사람 언짢을까봐 대학에서 제일 권위적이고 학점 짜고, 질투 많은 늙다리 꼰대 디 사미스 교수를 만나게 됐다. 이 양반의 강의 주제는 “루터가 성서를 어떻게 독일어로 번역했는가?”였다. 루터가 16세기 초 사람. 그럼 중세 독어잖아?

  견디다 못한 콜로나는 교수에게 하이네 작품에 들어있는 아이러니에 관해 학위 논물을 쓰겠다고 제안했다가 주위의 권유를 듣고 포기했다. 아예 학업 자체를 포기해버렸다. 번역 일을 하면 책 속에 다 쓰여 있는데 뭐 하러 돈 들여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 하는 의문이 들어 핑계 김에 때려 치웠다. 이후 스위스 알프스 지방에서 진짜 돌대가리를 위해 가정교사를 하다가, 돌대가리의 엄마, 위 앞니가 뻐드러지고 코 밑에 수염이 숭숭 난 엄마가 지긋이 손을 잡고 한 번 하자는 걸 뿌리쳤더니 다음날 바로 해고당한 후부터 싸구려 글쟁이 일을 시작했다. 좋은 말로 프리랜서. 주로 지방신문에 공연과 순회극단에 관한 기사와 평을 팔았다.

  이후 이 도시 저 도시 옮겨 살다가 문제적 인물 시메이가 불러 쉰 살의 나이에 밀라노로 온 거다. 시메이가 콜론나의 오랜 출판계 관련 일을 한 경력, 대학출판사의 교정작업과 일반 출판사의 원고 채택, 심지어 대필작가 이력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쉰 살, 우리나라 같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나이 탓하며 채용을 꺼릴 만도 한데, 그를 불러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한 권 대필하라는 청탁을 하는 거였다. 그것이 두 달 전인 1992년 4월 4일, 월요일. 앗차, 너무 나갔다.


  6월 5일. 그러니까 어제, 콜로나 주변에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거,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엣다 모르겠다. 콜론나의 진짜 직업이 시메이의 이름으로 회상록을 한 권 써주는 건데, 겉으로는 시메이가 새 신문을 만드는 단체의 이른바 데스크 역할을 하는 거였다. 근데 이 신문사, 아직까지 정식 신문사는 아니고 준비 모임 혹은 예비 신문사의 직원 한 명이 밀라노의 골목에서 등에 칼을 맞아 피살당한 시체로 발견됐고, 그리하여 직원 전부 경찰로부터 신문을 받았으며, 여차하면 다른 직원을 포함해 콜론나 역시 다음 피해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집에 들어와서, 술도 세지, 위스키를 반 병이나 꿀꺽꿀꺽 마신 걸로도 모자라, 엣다 모르겠다,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싶어 컵에 물을 받아 수면유도제 스틸녹스를 삼키고,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졌다가 오늘, 6월 6일 오전 여덟 시에 일어난 터였다.

  근데 수도가 나오지 않는다. 개수대도, 세면대도, 샤워실에도, 심지어 변기도 물이 안 나온다. 화들짝 놀란 콜론나. 우왕좌왕하다가 옆집 아줌마랄까 할머니네 현관을 두드려 “이 집도 물 안 나와요?” 물었고, 아줌마랄까 할머니가 원 별 말을 다, 하면서 무작정 콜론나의 집으로 밀고 들어오더니, 저 깊숙한 곳에 있는 배수 꼭지를 틀어 시원하게 물이 나오게 하는 거였다.

  앞에서 썼지? 어제 밤에 분명히 컵에 물을 받아 스틸녹스를 한 정 먹고 잤다고. 그럼 이게 무슨 일? 설마 형체도 드러내지 않고 집안에서 이상한 장난을 친다는 집요정 폴터가이스터의 해코지? 아닐 걸? 어제 신문사 직원을 죽인 일당 가운데 몇 명이 틀림없이 콜론나의 집에 잠입해 집안을 뒤졌을 거다. 한 사람이 죽었고, 사람들을 모은 시메이는 벌써 모습을 감추었는데, 이 마당에 그들이 나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닐 듯하다. 목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하다. 집 밖에 나가는 건 위험한 일. 뒤져보니 주방에 크래커 몇 상자와 고기 통조림, 어제 마시다 남은 위스키 반 병이 있다. 죽음의 공포가 기억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콜론나는 두 달 전, 4월 6일부터 믿을 수 없이 상세하게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시메이 주필을 처음 만난 날부터.


  시메이는 신문은 신문인데, 결코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콜론나가 할 일은 창간하기로 해놓고 신문을 내기 위해 1년간 준비작업을 하면서 겪은 일을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신문의 제호는 “도마니Domani” 내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콜로나가 쓸 책의 제목도 <내일을 알려면 어제를 보라>.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 좀 골치 아프지? 결코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창간하기 위하여 1년 동안 진행하는 작업이라니.

  시메이가 주장하기를 자기 신세도 콜론나와 별로 다르지 않단다. 절대로 나오지 않을 신문이 곧 나올 것처럼 사업을 벌이는 책임을 맡은 자. 퓰리처 상 후보에 오를 만큼 저널리즘에서 업적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루저. 그저 잡지사 편집장이었던 인물.

  그가 제안하는 콜로나의 보수가 엄청나다. 1년 동안 매달 현금 6백만 리라. 장부에 기입하지 않고 현금으로 주겠단다. 즉, 세금이 한 푼도 없다. 게다가 책의 원고를 완성하면, 다시 말해 창간 준비 활동을 끝내고 6개월 이내에 다시 현금으로 천만 리라를 추가로 주겠단다. 그러면 1년 반 사이에 현금 8천만 리라가 넘게, 세금 한 푼 없이 챙길 수 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이미 나이든 콜로나는 남쪽의 편안한 작은 섬으로 이민을 가 남은 여생을 조용히 살 수 있겠구나. 얼른 미끼를 문다.

  그러나 이 책의 진짜 핵심은 음모론.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가장 큰 음모론이라면 누구? 당연히 두체Duce. 베니토 무솔리니. 이이가 정말 파르티잔한테 잡혀서 총살당한 거 맞아? 총살 이후에 밀라노 광장에 시신으로 던져졌다가 성난 군중의 발길질에 시신마저 훼손당한 채 다시 주유소 철골에 거꾸로 매달린 후에 매장당한 것이 틀림없냐고. 혹시 그 무솔리니는 독재자가 자신을 닮은 대역 아니었을까? 아돌프 히틀러가 지하실에서 권총자살한 시신을 누가 본 적 있어?

  혹시 소비에트 연방의 유럽 적화를 저지하기 위하여 극우 성향을 가진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미국을 비롯한 진영에서 비밀리에 살려 두었다가 민중들의 화가 삭은 다음에 다시 전면에 내세우든지 아니면 정신적 지지대로 명성만 유지한 채 제2의 반공세력 또는 파시즘, 나치즘으로, 소비에트 측의 진출을 방지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히틀러는 나이가 많아 일찍 죽어 틀어졌지만, 적어도 무솔리니는 1970년에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극좌 테러, 극우 테러가 극에 달했을 때까지는 아르헨티나쯤에서 살아 있었을 지도 몰라.

  당연히 사실과 다른 그냥 음모설이다. 그뿐이다. 하지만 말을 이렇게 만들어 확장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해도 재미는 있다. 한 번 읽어보시라. 이 책 이후에 움베르토 에코는 단 한 편의 소설도 더 쓰지 않았으니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볼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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