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름
체사레 파베세 지음, 이열 옮김 / 녹색광선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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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베세의 책이 나왔다는 걸 알자마자 득달같이 희망도서 신청했다가 벌써 신청한 이용자가 있어서 이제야 읽었다. 이 책 이전에 두 권의 파베세를 읽었는데 둘 다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레우코와의 대화>가 신선해 늘 기억하겠다 마음먹었다가 순식간에 잊고 지낸 것이 미안해 더 찾게 된 거 같다.

  1949년 작품 <아름다운 여름>은 1950년, 잊지 말자 6.25가 터진 해에 이탈리아의 최고 문학상이라고 일컫는 스트레가 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광고를 읽고 더욱 기대가 부풀었다. 그러면, 기대가 크면 위험하다. 그걸 알고도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었으니 정작 읽고 난 다음에 흠, 기대가 너무 컸군, 이러면서 좀 불만을 갖는 것도 이해가 가지? 뭐 사는 게 다 그렇잖아.


  열여섯 살 아가씨 지니아의 성장소설은 아니고, 젊은, 젊어도 가장 꽃다운, 물론 1950년 이전의 시각으로 볼 때 가장 꽃다운 젊음을 구가하는 소녀의 한 시절 이야기. 당연히 첫사랑과 첫경험. 그리고 자기 마음 같지 않은 사랑.

  구태여 스토리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1940년대 후반. 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괜히 쌍코피만 터진 패전국으로 아직 회복되지 않은 체제 안에서 열여섯 살의 청소년들은 학교 대신 공장의 직공이나 정비공 등으로 돈을 벌어야 했고, 기존 윤리도 급격하게 변화하던 시기를 맞아 방황했던 청소년들의 초상.

  주인공 지니아는 아직 부모의 간섭을 받아야 마땅한 청소년이지만 안타깝게 부모는 세상에 없다. 오빠 세베리노는 발전소에서 중앙 스위치를 담당하는 야간 전담 근무자. 우리나라에는 교대근무가 보통이지만 서양에는 아예 야간근무를 조건으로 근로계약을 맺는 일도 흔하다. 이 말은 오빠가 회사에 출근하는 밤에 지니아의 활동이 자유롭다는 뜻도 된다. 지니아 역시 학교 대신 시내에 있는 부티크 숍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 자기 옷, 화장품, 액세서리 등을 사는 데 쓴다. 아무리 오빠라도 이런 용처로 돈을 달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 세베리노는 낮에 잠을 자기 때문에 지니아가 점심을 차려주고, 설거지와 집 청소를 전담한다. 이런 일이 즐겁기도 하다. 안주인처럼 혼자서 집을 꾸미는 일. 생각보다 괜찮은 모양이다. 물론 당신이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194X년의 지니아 한테.


  지니아의 친구로 로사, 티나, 클라라 등이 있다. 얘네들하고 밤에 춤추러 나가면,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남자애들이 둘이서 들판에 가자고 한단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보리밭에 함께 가자”는 뜻이다. 마음이 여려 들판에 가자는 걸 싫다하지 못하는 로사가 하루는 공장에서 도망쳐 지니아한테 와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떻하니, 나 임신한 거 같아 무서워 죽겠어.”

  지니아는 동요한다. 친구들 모두 여기까지는 아니지만 원인이 되는 행위는 해 본 것 같은데 자기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든다. 다행스럽게 로사는 그냥 기분이 그랬다는 것이고 별 일 없다. 괜히 소외된 듯한 감정이 들었던 지니아는, 그래도 열여섯 살이면 너무 빠르다고 믿기로 한다. 그렇게 스스로 설득하건만 마음 한 구석의 굴욕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은 친구 사귀는데 나이 차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열아홉에서 스무 살 사이의 아멜리아는 키가 크고, 엉덩이 부분이 풍만하다. 말처럼 갸름한 인상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외모의 아가씨. 지금은 실직 중이다. 아멜리아가 지니아에게 접근한다. 암만해도 오빠 세베리노한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읽힌다. 그러나 아니다. 알고 보면 정확하게 실직도 아니다. 나름대로 일 해서 적지 않게, 물론 충분하지는 않지만 많이 모자라지도 않는 돈을 번다. 나쁜 직업도 아닌 것 같다. 바로 모델. 희한한 걸음걸이로 런웨이를 누비는 모델이 아니라, 얼굴이면 얼굴, 몸이면 몸, 대개는 얼굴을 포함한 전신 그림을 그리기 위한 예술 모델. 옷을 입기도 하고 누드 모델이기도 하다. 다 한다.

  시절은 여름. 아멜리아는 덥다는 이유로 스타킹을 안 입는다. 예쁜 원피스만 입는다. 제법 날이 지나 지니아가 보니까 아멜리아가 겉으로는 명랑해 보여도 사실은 꽤 처량한 처지인 것 같다. 스타킹도 덥다고 안 입는 것이 아니라 없기 때문이고, 늘 예쁜 원피스만 입는 것도 옷이 그거 단 한 벌밖에 없기 때문인 거 같다.

  그럼에도 지니아는 하루에 겨우 한 두 시간 모델을 해주고 돈을 제법 받는다는 것에 혹해서 자기도 한 번 모델을 할 수 있을까, 말을 보탰다가 정말로 바르베타라는 이름의 회색 턱수염을 기른 뚱뚱한 남자 화가의 아뜰리에에 가서 얼굴 모델을 해본다. 화가는 싸가지없게 스케치를 여러 번 하더니 모델료 대신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퉁 쳐버린다. 아멜리아가 말한다. 앞으로 바르베타는 모델로 너를 계속 찾으려 할 거야. 아이스크림으로 모델료를 대신할 수 있는 너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이렇게 해서 지니아는 또래의 친구들, 다리를 절고 집에는 먹을 것도 하나 없는 티나, 당구만 잘 치는 백수 피노와 들판에 나갔다가 임신했는 줄 알고 벌벌 떠는 로사, 별 존재감 없는 클라라와 약간의 거리감이 생기고 줄곧 아멜리아와 함께 하기 시작한다.

  모델 아멜리아. 당연히 이런 저런 화가와 친한 사이이고, 화가 가운데는 젊은 화가도 있다. 포르투갈에서 온 로드리게스와 이탈리아 시골 출신의 귀도. 여자 모델 두 명과 귀도의 집에서 사는 두 남자가 서로 어울리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지니아와 귀도는 서로 사랑하게 되는데, 뭐 사랑이 다 그렇지. 40년대건 2020년대건 비슷하겠지. 사랑하다가 이런저런 사달도 만나고, 젊은이들이니 사달의 충격파도 그만큼 크겠고, 실수도 하겠고, 뭐 그러면서 자라는 거라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역자 이열이 사진작가인 모양이다. 이 책이 그가 번역한 첫 문학작품. 내가 주장하는 바, “번역도 습작이 필요하다.” 그냥 해보는 말이다. 다른 상도 아니고 스트레가 상을 받은 대표작인데 어찌 다른 작품보다 덜 재미있게 읽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해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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