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 - 어두침침하고 우울하게 내리는 긴 장맛비
백민석 지음 / 예담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세월 정말 빠르다. 가장 최근에 읽은 백민석이 벌써 8년 전 이야기. 도서관 서가를 거닐면서도 백민석의 책을 보면,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분이 들어 아무 생각없이 지나쳐왔건만, 지금 독후감을 쓰려고 보니, <공포의 세기> 독후감을 쓴 것이 벌써 두세 달 모자라는 8년 전, 2018년이다.

  사실 그래봐야 백민석의 책은 꼴랑 두 권 밖에 읽지 않았다. 제일 처음에 읽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 하도 머리에 남아서 그저 늘 본 거 같은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것도 10년 전 이야기라 스토리는 거의 날아갔고 작중 aw라는 이름의 도련님만 딱 남았다. 여기서 aw가 뭔지 모르시지? 난 안다. 근데 말 못한다. 옛 인터넷 동무님께서 비밀댓글로 알려주신 것을 밝힐 수 없다.


  《수림愁霖》은 단편소설 아홉 편을 모은 소설집이라고 읽어도 좋고, 서로 인연이 닿는 사람을 좇아가는 연작 장편으로 읽어도 좋다. 연작인 건 확실하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을 때는 제일 앞에 실린 것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야 하지, 사정 때문에 중간에 실린 것부터 팍 읽어버리면, 뭐 큰일이야 있겠느냐만 그래도 덜 좋을 것 같다.

  소설집의 첫 작품 제목이 표제작 <수림愁霖>.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는 수림을 “어두침침하고 우울하게 내리는 긴 장맛비”라고 설명했고, 예담 출판사도 이 해석을 책 표지에 박아놨다. 그냥 단어 그대로 “수심에 찬 긴 장마”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수愁’에 어두침침하다는 뜻은 없잖아?


  한자어 수愁는 근심, 시름을 말한다. 네이버는 뜻 풀이에서 이 愁가 가을 秋 아레 마음 심心을 붙였는데, 왜 가을이 되면 시름이 깊어질까? 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①가을걷이가 끝나면 관청에서 세금을 걷으러 오니까 ②곧 닥칠 겨울 날 생각해서. 그래서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며 수심의 계절이라고 설명했지만 내가 주장하는 바, ③곡식을 거두어 함포고복 한 번 하려할 때를 딱 맞춰서 오랑캐와 향토 비적들이 쳐들어오니까, 이게 빠졌다. 그래 겨울에 쳐들어온 오랑캐한테 절세 미녀를 바치고 억지로 고비사막 밑으로 끌려간 왕소군은 봄이 되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노래를 했겠지. 근데 愁는 문자가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는 다음으로 하고, 참 아련하게 쓸쓸한 말 아닌가 싶다. 앞에다 슬플 애哀 자 하나 붙이면 뭐 앙가슴이 찢어지지. 애수.

  서론이 길다. 소설집 읽고 독후감 쓰면 대개 분량이 짧더라고. 그래서 지나가는 말을 좀 붙였다.


  《수림愁霖》이 책의 제목이며 제일 앞에 배열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게다가 연작 소설. 책 속의 모든 이야기는 이 단편 <수림>에서 시작한다.

  <수림>의 주인공은 확실하게 그렇다, 라고는 나오지 않지만 한 시절에 바바리맨(책에서는 판초맨) 경력이 있는 것 같은 성추행범 전과자. 정확하게 설명하면 밀폐 또는 공개 장소에서 한 여성에게, 또는 밀폐나 공개 장소건 간에 여러 여성에게 자기 생식기를 훌렁 내놓고 성적 요구를 했다는 죄목으로 빵에 다녀오셨다.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당연하게 이혼당했고, 아내는 아이가 성추행범 아버지를 두었다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 남자의 접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아이를 만나고 있으면 주변 20미터 안에 전 아내, 아이의 엄마가 자기가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게 기척을 낸다.

  다시 취직한 회사에서 과장급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사람이 좀 굼뜨지만 일처리나 인간관계에 모자람은 없이 둥글둥글하니 잘 살고 있다. 지역사회 봉사활동 커뮤니티에 가입을 해 주로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 모임에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자를 만나, 여자가 수시로 연락을 해 그나마 친하게 지내지만 결코 딱 그어버린 선을 넘지는 않는다. 자기도 자신이 성적 이상심리가 있으며 그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언제 갑자기 폭발할 지 모른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신경정신과 개업의를 방문하여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지만 이이의 나날과 정서와 실제의 날씨는 언제나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두번째 작품 <비와 사무라이>의 주인공은 <수림>에서 남자와 함께 봉사활동을 다닌 젊은 유부녀. 서른은 넘은 것 같다. 우울증이 심해 혹시 무슨 일을 저지를까봐 남편이 좀 더 환경이 좋은 한강변 아파트로 무지하게 무리해서 이사했다. 부부는 서로 상희하고 합의하여 아이는 조금 더 있다 가지기로 해, 단 둘이서 산다.

  시작하자마자 여자는 15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창문을 활짝 열고 베란다 난간에 손을 얹고, 배를 대고, 허리를 굽힌다. 난간을 바르쥐고 점점 더 길게 허리를 펴니, 이제 베란다 바닥에 붙어 있는 여자의 신체는 오른쪽 발가락 두 개밖에 없다. 둔치로 내려가는 공원을 보려 한다. 정확하게는 공원에 노숙인들이 있는지 없는지 보기 위하여. 또는 개나리나 목련이 피어 있는지 보려고. 개나리와 목련 가운데 어느 꽃이 먼저 피더라? 궁리하면서.

  남편은 정확한 사람이다. 아침에 시간되면 일어나 정확하게 출근해서, 칼퇴근 후에 집에 들어오면 오후 7시에서 7시 20분 사이. 야근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잔업이라는 것도 없다. 부서 회식 같은 특별한 일이 있어도 1차에서 밥만 딱 먹고 빠져나온다. 7시 10분. 평균 귀가시간. 앞뒤 오차 10분. 귀가 시간은 정규분포. 남편은 겁난다. 갑자기 아내를 잃을까봐. 그래서 봉사도 하고, 건전한 단체이니 남자를 포함한 건전한 다른 사람들과도 교류해보라 권한다.

  하지만 독자 눈에는 아무래도 조금은 가식 같기도 하다. 봉사단체에서 같이 일한 남자와 함께 셋이 저녁 식사를 한 적도 있지만 속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겠지.


  세번째 작품 <검은 눈>. 시작하자마자 서산의 갈숲에 SM5를 끌고 들어가 수면제를 왕창 먹고 잠들기 전에 번개탄을 피워 자살한 남자가 등장한다. 이이가 누구냐 하면, 바로 앞 <비와 사무라이>에서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여자의 전 애인. 죽은 사람은 지금 이혼 숙려기간이다. 딸 둘과 함께 서산에 왔다가 딸들은 부두에서 놀라 하고 자기는 차를 끌고 들어가 죽어버렸다. 원래는 함께 죽으려다 자기 혼자 죽었는지, 처음부터 자기 혼자 죽기로 하고 죽기 전에 딸들과 마지막 소풍을 간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앞에서도 우울증 여자하고 문자 연락을 가끔 했지만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 직업은 소설가.

  부모를 가장 크게 엿먹이는 방법은 게이가 되는 거라고 보니것은 말했다. 게이가 될 깡다구가 없으면 예술에 종사하겠다고 작정을 하는 게 제일 좋은 대안이란다. 이런 진실을 지금 소설을 쓰는 이 남자의 애인은 안다. 애인은 시를 쓰는 시인. 일찌감치 시인으로 등단해서 한 시절엔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강사 자리도 하나 얻지 못했다. (책의 뒤편으로 가면 문창과 2학년 시 강사는 한다.) 하지만 소설가 남자한테는 그것도 부모 속을 썩일 방법이 아니다. 직장을 얻기는커녕 평생 돈을 벌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는 부르주아의 자제. 커다란 오피스텔에 혼자 독신을 유지하며 사는 건 틀림없이 이 오피스텔에 들어와 기꺼이 자기 침대를 덥혀줄 여자들한테 과시할 목적이다.

  하지만 이런 도련님들도 지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 있으니, 결코 사랑하지 말 것. 그러나 소설가 남자는 불행하게도 시인 여자를 사랑했으며, 시인 여자는 매우, 매우 야물딱지게 소설가 남자를 걷어 찼다. 걷어 찬 이유는 내 입으로 말할 수 없다. 직접 확인하시기를.


  다음 작품은 시인 여자가 강사가 되고, ‘나른 보이’라는 별명을 갖는 남자 제자를 만난다. 그 다음 제자는 나른 보이의 조현병이 가볍지 않은 어머니, 또 그 다음엔 나른 보이의 어머니와 아마도 <수림>의 남자에게 심리 상담을 해주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다시 그 다음엔 신경정신과 전문의와 원조교제를 하는 별명 ‘링고’ 여고생. 또 다음엔 링고네 학교와 옆 학교에 출몰하는 판초맨. 그리고 다시 장맛비. 장마, 긴 장마. 습한 날씨와 구름과 심지어 바다의 용오름까지. 글을 습기차고, 답답하고, 우울하고, 뭔가 맺혀있고, 비장하다. 워낙 입 거칠기로 호가 난 백민석 답게 묘사 역시 적나라하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적나라하다.

  잘 읽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