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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48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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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1853년 모스크바 외곽의 밀림 속에 있는 휴양지 쿤체보에서 시작한다. 있는 집 도련님들이 커다란 피나무 아래 누워있거나(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베르세네프), 엎드려 있다(파벨 야코블레비치 슈빈). 베르세네프는 대학을 3등으로 졸업하고 잠시 쉬고 있다. 역사와 철학 중에 하나를 더 공부하여 장래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목표를 위하여 5년 후에는 독일의 대학에서 박사논문을 통과시킬 예정이지만 아직은 그저 꿈만 꾼다. 슈빈은 나이가 어느 정도 차 고아가 되었다. 어머니가 죽으면서 사촌 동생인 안나 바실리예브나 스타호바에게 슈빈을 잘 돌봐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해 스타호프 집에서 대학을 다녔다. 원래는 의학을 공부했지만 1년 만에 자기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중도작파, 모스크바 미술계에서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젊은 조각가 신분이다. 작품이 시작하기 바로 전에는 어린이와 산양山羊 부조작업을 하다가 노대가들과 고대 미술품을 보고 낙담해 깨 버렸다. 자신의 예술 외에 여자의 아름다움만 사랑하는 예술가. 최근이지만 이중에서 처녀의 아름다움에 집중하고 있다. 보이나봐? 척 보고도 처녀인지 아닌지. 2백년 전 예술가답게 어딘가 한 군데 좀 삐딱하고 괴짜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중요한 조연급답게 귀여운 골통 비슷하다.
반면 베르세네프는 학교 다니며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했는지 이제 당분간 무위, 안일한 생활, 맑은 공기, 목표달성(우등졸업) 이후 허탈감을 달래는 휴식, 친구와의 가벼운 대화 등을 위하여 최근 쿤체보 숲 속의 다차를 하나 얻었다. 다차는 러시아에서 유행한 휴양지 건물. 부르주아들은 자기 다차가 있는 게 보통이었고 그 정도가 안 되면 베르세네프처럼 한 채 임대하면 된다. 도스토엡스키의 작품들 특히 <백치>에서 페테르부르크 인근의 다차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남자만 두 명 소개했다. 그러면 이제 여자가 나와야겠지? 이 둘을 갈등의 국면으로 치닫게 만드는구나, 독자한테 이런 생각, 오해, 짐작이 들게 만드는. 그렇다. 나온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스타호바.
먼저 결혼 전 이름이 슈빈이었던 옐레나의 엄마 안나 바실리예브나에 관해 조금 언질을 드린다면, 슈빈의 5촌 이모 정도의 족보 자격으로 그를 키웠다 할 만한 은인. 일찍이 슈빈에게 예술 공부 또는 견식을 넓히기 위하여 이탈리아 여행을 권하며 큰 돈을 준 적 있지만 슈빈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좇아 소아시아 그러니까 우크라이나에 가서 돈을 탕진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슈빈은 진심으로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존경하고, 은인으로 생각하지만 아름답지는 않아서 속으로는 그냥 암탉으로 여길 뿐이다. 진도가 나갈수록 선한 19세기 부르주아 여인의 전형을 연기한다. 결혼해 딸 안나 하나만 낳고 단산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긴 했다.
아빠 니콜라이 아르툐미예비치 스타호프는 저 위대한 1812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퇴역 대위의 아들이다. 귀족의 혈통이 흐르지만 끈 떨어진 갓 신세. 아시다시피 러시아에는 이런 빌어먹는 귀족들이 무척 많다. 이 가운데 한 가문의 아들로 성장한 퇴역 중위. 이이에게는 큰 꿈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유리한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일곱 살 때 고아가 되었지만 꽤 많은 영지와 저택, 귀금속 및 보석, 그리고 상당 수준의 현금을 상속받은 아름다운 아가씨였을 때 큰 파티장에서 뒷다리 제치기에 성공해 꿈 하나를 이루었다. 딸 옐레나 이후 후사가 없자 그걸 핑계로 독일 태생 과부와 긴 연애를 하고 있다. 그 과부가 자기 친지에게 쓴 편지에 그를 “나의 멍청이”라고 비웃는 건 5년 후 호호 할배가 되어 걷어 차일 때까지 알지 못했다. 왜 비중이 별로 없는 아빠를 들먹였느냐 하면, 투르게네프하고 가족 구성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해서. 작품 속 누군가 작가를 닮을 수 있는데 그게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또는 니콜라이 아르툐미예비치 둘 가운데 한 명인 거 같아서였다.
일단 안드레이 베르세네프와 파벨 슈빈 둘 다 옐레나를 연모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파벨은 감정이 안드레이보다 월등하게 분방하여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불쾌함이나 역겨움을 주기도 한다. 바로 어제 그런 장면을 하필이면 옐레나 앞에서 저지르고 말았다. 집에 옐레나 말고 다른 젊은 아가씨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독일 아가씨 조야 니키티시나 뮬러. 러시아계 독일 처녀이다. 스타호바네 다차에서 옐레나의 말동무나 하라고 데려왔는데 정작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불러 자기 옆에만 앉혀 놓는다. 밤이 시작되는 훈훈한 저녁 무렵, 분방한, 책이 끝날 때까지 결코 난봉꾼 수준까지 치닫지 않는 그저 분방한 파벨 슈빈이 집 복도 어두컴컴한 곳에서 조야의 두 손을 붙잡고 손등에다 열렬히 키스하는 장면을 옐레나한테 들켜버린 거다.
근본적으로 옐레나는 예술 방면으로 자질이 있는 편이 아니다. 예술보다는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은 학문이 훨씬 맞는다. 그러면 당연히 역사 또는 철학을 더 공부할 안드레이가 더 어울린다. 어제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평소 파벨 생각도 그랬다.
농촌에 기반한 부르주아 가운데 한 명인 이반 투르게네프답게 여기까지 모든 장면이 자연, 학식, 예술, 이탈리아, 프록코트, 드레스, 피아노 연주 같이 벨벳 같은 부드러운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스타호프네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베르세네프가 자기 다차로 돌아간다. 그의 뒤를 헐레벌떡 좇아오는 파벨. 그러더니 베르세네프 입장에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는 고백을 한다.
“안드레이, 나는 옐레나를 사랑한다네. 그러나 옐레나는 자네를 사랑하지.”
안드레이는 조금 놀란다. 자기가 옐레나를 사랑해? 맞다. 그것 때문에 여태까지 속으로 일종의 과호흡증을 앓았다. 그런데 옐레나도 나를 사랑한다고? 아, 이렇게 행복할 수가.
하지만 파벨이 그녀를 사랑한다니. 파벨은 나 역시 옐레나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사랑을 파벨에게 양보해야 하나?
파벨 역시 진실한 친구. 자신이 옐레나에게 맞지 않는 점을 이야기한다. 자신은 옐레나가 보기에 너무 경박한 젊은이라고. 그녀는 진지한 사람, 양심적인 과학 신봉자의 대표자라면서. 또 앞에서 말한 조야의 손에 키스한 장면. 그것보다 바로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파벨이 조야에게 험담을 해버렸던 모양이다. 분방한 성격이니 그럴 수 있지만 옐레나가 보기엔 역겨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슈빈은 그만, 안드레이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하니 정작 안드레이가 민망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작품이 중간 정도까지 진행되었을 때, 안드레이가 모스크바에 들를 일이 생기고, 거기까지 간 김에 유일한 학교 절친 드미트리 니카노로비치 인사로프를 만난다. 불가리아 사람.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 허덕이며 사는 불가리아의 독립을 위하여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원래는 학문을 하고 싶어 모스크바에 왔지만 조국의 부름이 자신의 공부보다 먼저라고 생각해 귀국했고, 혁명을 준비하다 상당한 수준의 고초를 겪어 목 주변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 일단 불가리아에서 탈출해 모스크바로 돌아와 러시아 내 불가리아 동포를 집결하고 국내 혁명전선 동지들에게 여러 지령을 내리는 중추 가운데 중추로 활약하는 인물이다.
당연히 자금이 충분하지 않아 작은 방 하나를 얻어 궁상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 짠해서 안드레이는 자기가 지내고 있는 다차에서 여름을 날 것을 제안하고, 인사로프는 자기가 쓸 방값을 자신이 내는 것을 전제로, 즉 친구의 호의를 무상으로 받기를 거절하는 조건으로 다차에 들어온다. 그리고 옆집, 스타호프 다차에 가서 인사를 하고, 저녁을 먹고, 대화를 하고, 대화는 대화인데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답게 세상 누구보다 진중하고 설득력 있는 논조로 깊은 대화를 전개해 나간다.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딱 눈치 채시겠지? 우리의 안드레이와 파벨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리라는 것을. 처음에야 옐레나를 포함한 스타호프 사람들이 보기에 인사로프는 배운 것만 많지 저 변방 중의 변방, 심지어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머리속에서는 시베리아 옆에 있는 줄 아는 불가리아 촌놈이고, 생긴 것도 잘 생기지도 않았고, 얼핏 보기엔 그저 그런 보통 체격에, 조금 있으면 불가리안지 뭔지 하여간 다시 돌아갈 청년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가, 집안에서 딱 한 명, 옐레나는 그의 진중함과 정의로움에 빠져버리기 시작한다. 퐁당.
철의 사나이 인사로프. 그도 사람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옐레나를 사랑하게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사로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옐레나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할 일, 그냥 할 일이 아니라 조국의 해방시키는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바, 과업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인사로프는, 중간에 분방한 파벨이 다리 역할을 해서 어느덧 둘의 사랑을 둘 다 알게 된 상태가 되자마자, 다차가 있는 쿤체보 숲을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쿤체보와 모스크바. 백 베르스타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가 둘의 사랑을 흐리게 만들 수 있을까? 하여간 이들의 앞에는 러시아가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에 코가 깨질 예정인 크림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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