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영시장 - 설재인 연작소설집
설재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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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생. 자랑은 아니지만 어려서는 머리가 커서 걸음마를 늦게 뗐다고. 뇌 용량이 크니까 공부를 제법 해 서울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특목고에서 수학교사를 몇 년 했다. 그런데 특목고 수학교사라는 직업이란 자라나는 청소년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라 염증을 느껴 아무 대책 없이 사표를 내고 말았단다. 그 후겠지? 20대 중반까지는 “운동이란 ㅇ”도 몰랐던 설재인은 어쩌다 보니 복싱을 시작해 지금은 복싱을 한 세월이 수학교육을 한 시간보다 더 길다고. 즉 지금은 뛰고 때리고 막고 피하는 소설가라는 말씀.

  책가게의 작가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말을 최대한 줄인 채 사람을 염탐하는 몹시 음침한 사람.”

  젊은 작가? 아휴, 아니다. 37세가 무슨 젊은 작가. 이미 완숙해서 전성기를 구가할 시기. 이 책을 냈을 때는 서른다섯. 소설쓰기 딱 좋은 시절일세.

  《월영시장》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이 또래의 작가군群이 쓴 소설책 가운데 오랜만에 “읽는 재미”가 쏠쏠해서 책 읽는 동안 기분이 좋았다. 저 오래전, 이 책보다 22년 전, 지금부터 24년 전 가상의 월영시장이 아니라 진짜로 영등포시장의 한 밥집 삼오식당의 “딸램” 이명랑이 쓴 명랑한 소설책 《삼오식당》이 딱 생각났다. 사는 모양이야 진짜 밥집 딸이었던 이명랑이 더 생명력이 있지만(삼오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뭐 하실까? 늘 건강하시기 바란다), 설재인은 또 다른 모양새로 통통 튀는 매력이 가득했다. 이런 소설을 좀 더 많은 작가들이 쓸 수 없나? 만날 우거지 궁상 떠는 모습만 보다가 없는 사람들의 따듯하니 눙치는 은근한 궁상을 읽으니 그것 참 괜찮네.


  월영시장은 작가의 말에 의하면, 서울의 가장 서쪽, 김포공항과 담벼락을 마주한 서울 S동의 시장을 모델로 해서 썼다고 한다. 설재인이 2023년 초에 “청년머시기임대주택”에 당첨되어 (아마도 무척 기뻐서 그랬겠지?) 직접 찾아가 본 S동, 머리 위로 비행기가 1분에 몇 대씩 낮게 날기 시작하는 곳에 S시장이 있었고, 그때까지 국밥이 6천원, 소주 한 병에 4천원 하던 식당이 있었는데, 오후 한시였나 하긴 오전 열한시면 어떻고 아침 다섯시면 어떻겠느냐만, 벌써 나이 좀 자신 아저씨들이 소주 또는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있는 모습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소설집의 제일 앞에 배치한 작품 <딸램들>의 주인공이 “40년 된 건물에 들어선 20년 된 자근포차”의 2년제 유아교육과를 다니는 “자근딸램” 동지. 동지. 사람 이름이다. 안동지. 즉 동지가 아니라는 뜻? 그건 아니고 그냥 동지. 나이 지긋한 거대한 몸에 커다랗게 외양으로 위압하지만 순하디 순한 사냥개를 끌고 산보를 다니는 가발의 사나이 김제혁 씨 같은 사람들이 이 몸집 작은 아이한테 “동지”라고 부르기 머시기하니까 그냥 “자근딸램!”하던 것이 모든 시장 사람들의 입에 붙어버린 거다.

  이제 20대 초반의 동지가 가게 자근포차에 들어서는 걸 딱 엄마가 보더니 하시는 말씀이:

  “너 어디서 처자고 지금 기어 들어와, 기어 들어오길.”

  동지가 냅다 내쏜다.

  “문자 보냈거든? 무려 어젯밤 9시에?”

  흠. 문득 궁금하다. 동지가 어젯밤 9시를 “어젯밤 아홉시에?”라고 했을까, “어젯밤 구시에?”라고 했을까? 어떤 경우라도 하여간 동지, 이 기지배가 외박하고 온 건 맞지? 그러나 기대하지 마시라. 진짜로 친구 집에서 공부하고 왔다. 시험이 낼 모레다. 비록 엉망으로 망칠 예정이지만.

  이 자근포차는 월영시장에서 아주 유명하다. 매일 아침 10시에 문을 열어서 다음 날 새벽 3시에 문을 닫는다. 설재인은 “아침 열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할까 “아침 십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할까? 아니면 자기는 “아침 10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쓰지만 독자는 “아침 열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읽어 주거나, “아침 열 시에 문을 열어서” 또는 “아침 십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읽거나 마음대로 하라고 신경쓰지 않거나, 어떤 경우일까? 아마 자기 소개에 “사람을 염탐하는 몹시 음침한 사람”이라고 한 걸 보니까 신경 안 쓰는 거 같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이 자근딸램도 불만이 많다. 20여 년을 불만 가득한 생으로 살았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애정부족. 자신이 스스로 진단한 병명이다. 동지가 어려서부터 부부는 아이 돌보는 건 다음으로 하고 아침 십 시부터 새벽 삼 시까지 문을 열기 위하여, 그것도 조리된 가공음식이 아니라 물론 햄 소시지 같은 반찬도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을 직접 조리해 장만한 음식을 내놓는 장사에 말 그대로 매진해왔기 때문이다. 만일 동지 자신이 다른 아이들처럼 어려서부터 부모의 지극한 관심 아래 성장했다면 자기가 이 모양 이 꼴로 컸겠느냐, 하는 게 불만 가운데 상 불만.

  근데 동지한테는 완전 골통 삼촌이 한 개 있다. 맞다 한 개. 멍멍이와 유사한 수준의 인간을 칭한다. 어떻게 딸 하나를 만들어 이름을 동윤이라고 하는데 지금 열 살. 학교도 보내지 않아 글씨도 쓸 줄 모른다. 때를 맞춰 마누라가 날랐는지 아이를 데려와 그냥 자근포차에 넘겨주고 가버렸다. 생각해보니 자기도 자기지만 동윤이한테 비교할 바가 아니다. 동윤이는 동지하고 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독자는 이 작품의 결말이 동지하고 동윤이가 화해하는 장면이 되겠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까?


  이렇게 주로 빈민들로 구성한 월영동. 공항과 담벼락을 맞대고 있는 수준이라 고도제한이 있어 고층 건물도 없고, 높은 아파트도 없는 동네. 1분에 비행기가 몇 대나 저공비행하는 통에 무지 높은 데시벨의 항공 소음과 함께 “언제나 비행기가 성교하는 인간처럼 배를 보이며 지나”가는 동네이니만큼 빈민으로 구성된 곳에 유일하게 사람들이 비비대는 곳인 월영시장. 당연히 땀냄새, 개 오줌냄새, 음식냄새, 건강원 개소주, 고양이소주, 염소소주, 장어소주의 배릿한 냄새, 요즘말로 빈티지, 옛말로 구제 옷에서 나는 곰팡이내 같은 것도 나겠지만, 역시 돋보이는 건 비행기 소음 아래에서 단련된 사람들의 지극히 우렁차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악쓰는 소리겠다.

  삶의 악다구니. 그러나 건강하기도 하다. 남을 돌볼 줄 알고, 오지랖 넓다는 지청구를 들을지언정 남의 사정 좀 알아야겠고, 당연히 참견질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오래 전에는 흔히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술 한 잔도 나눌 수 있고, 가끔은 멱살을 쥐어 틀고 쌈박질도 할 수 있지만 딱 그만큼 화해술도 한 잔씩 하던 사람들. 그들을 볼 수 있는 21세기 우리나라에 몇 안 남은 동네. 월영시장이다.

  한 배에서 나온 씨 다른 자매 형제 같은 작품들만 읽다가 설재인을 읽으니 그거 참 괜찮다.

  눈에 힘을 줘서 다른 설재인도 또 읽어봐야겠다. 이제 전성기를 시작했으니 더 좋은 작품, 계속 써주었으면 좋겠다. 글만 쓰면 된다. 영업은 독자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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