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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신 브라운 /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날개가 있네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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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두 편은 유진 오닐이 쓴 작품에 국한하자면 망작일세. 다른 극작가가 썼으면 훌륭한 작품이겠지만 천하의 오닐의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아, 오해하지 말기. 내가 최근에 본 연극이 몇 십 년 전 일이다. 이런 문외한이 하는 말이니 1도 믿지 않아야 마땅하다.
<위대한 신 브라운>에서는 노골적으로 탈, 마스크가 나오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날개가 있네>에서도 조현병이 심각한 여자 주인공 엘라는 콩고 탈을 보고 경끼를 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엘라의 진짜 탈은 그깟 콩고 탈이 아니라 흑인, 백인으로 세상을 가르는 인종의 문제, 그 문제에 함몰하여 빠져나올 줄 모르는 엘라 본인이 쓴 탈이다. 라고 나는 주장한다.
<위대한 신 브라운>에는 두 명의 탈 쓴 이가 나온다. 주인공 윌리엄 브라운. 애칭 빌리. 그리고 디온 앤서니. 두 명 다 출중한 젊은이들.
디온의 아버지 앤서니 씨는 큰 건축회사 사주. 몽상가이면서 예술적 기질이 넘치는 디온은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는 약한 자아를 감추기 위하여 매사 냉소적이고 자신감이 넘쳐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가면을 가슴에 달고 다닌다. 빌리는 자기 아버지 브라운 씨가 앤서니 씨의 도급업자로 시작해 동업자의 말석에 끼워주어서 그런지 디온에 대하여 열등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고 사실 실력도 디온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빌리는 자신감 넘치는 야심찬 모습의 탈을 지니고 있다.
두 등장인물은 늘 가슴에 달고 다니는 탈을 썼다 벗었다 하며 극을 이끌고 있다. 벌써 인물들을 열거하니 누가 더 우위에 있게 될 줄 딱 드러난다. 당연히 빌리. 속이야 어떻든 간에 겉으로 자신만만해서 신뢰감을 주는 빌리가 자연스레 성공해 앤서니 씨의 회사를 인수하고 사명을 “브라운 앤드 선”으로 고쳐버렸다. 이 동안 솜씨 좋고 머리도 좋은 디온은 빌리도 사랑해마지않는 마거릿과 결혼해 날이면 날마다 술과 도박에 미쳐 자기 재산을 홀라당 말아먹어 버렸다.
착한 마거릿이 디온에게 좋은 말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바가지를 살짝 긁는다. 디온은 진짜 싫었지만 빌리에게 가서 자리를 얻으려 한다. 그래서 마거릿이 빌리에게 가 자리를 부탁하고, 디온의 실력이면 속으로는 모셔오고 싶어할 정도라, 빌리는 버선발로 달려가 디온을 모셔온다. 디온의 직업? 건축사.
일찍이 고등학교 시절, 빌리는 마거릿의 그림자만 봤다 하면 선 자리에서 꼿꼿하게 얼어붙을 정도로 짝사랑했다. 그게 지금도 그렇다. 좋아했지만 고백하지 못했다. 마거릿이 예술가 기질이 넘치면서 어딘가 우울하게 보이는 디온한테 반해 디온과 사귀었고 결혼까지 했다. 빌리는? 탈을 쓴 빌리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서든지 디온의 탈을 빌리가 쓴다면? 당연히 마거릿은 빌리를 디온으로 알고 남편이니까 뭐든지 다 해준다.
여기까지 얘기해도 뭔가 일이 생기겠지? 맞다. 생긴다. 살인? 흠. 너무 나갔다. 그건 아니고 빌리의 집, 빌리의 응접실에서 세상 살 기력이 모두 빠진 디온이 팍 고꾸라져 죽었다. 심근경색이나 뭐 비슷한 거겠지. 여태 디온의 가슴에 매달려 있던 그의 탈. 그걸 빌리가 낚아챈다. 빌리는 디온의 시신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처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위에서 말했지. 빌리가 디온의 탈을 쓰면 마거릿, 십대 시절부터 자신의 몸뚱이와 다른 한 부분을 꼿꼿하게 만들었던 마거릿이 자신을 남편 디온으로 알아본다고. 그래서 디온의 탈을 쓰고 마거릿의 집으로 찾아가고 뭐 그렇다.
탈(mask) 이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주장한 건데, “마스크는 시인의 분기된 자아”로 시에 나타나는 시인의 비밀스러운 자아와 구분해야 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한국 예이츠 저널, 2019)
그러니 이 작품의 탈은 예이츠의 주장하고는 별개로 차라리 척 러셀이 감독하고 천재적인 코미디언 짐 캐리가 주인공을 한 영화 <마스크>의 스탠리 입키스와 더욱 유사하다. 탈을 쓰면 자신의 속마음, 실체와는 전혀 다른 인격으로 행위하고, 타인들도 자신을 완전히 타인으로 봐주는 것.
세상 사람 다 탈을 쓰고 살지만 아무래도 좀 과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날개가 있네>는 흑인 남자와 백인 여성으로 이루어진 부부 이야기이다.
백인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흑남백녀 간의 혼인. 반대로, 즉 백남흑녀는 그나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봐준단다. 물론 지금 시절이 아니고 20세기 때 이야기다. 1967년에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당대 특급 배우들인 스펜서 트레이시, 캐서린 햅번, 시드니 포이티어가 출연한 명작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나왔을 당시에도 흑남백녀의 혼인을 두고 난리가 벌어졌다고 들었다. 작품 속에서도 백인 아가씨의 부모,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햅번이 상당히 진보적 성향의 부부지만 열네 살이나 더 많은 흑인 홀아비 박사님을 사위감으로 데려왔을 때 처음엔 당황하고 이어서 결혼에 찬성하지 않았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하물며 이 희곡을 발표한 것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나오기 42년 전인 1925년이었으니 당시에는 어떠했을지 안 봐도 비디오.
주인공은 흑인 청년 짐 해리스와 백인 여성 엘라 다우니. 장소는 뉴욕.
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네 친구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 무대의 막이 올라간다. 어려서 아직 사춘기도 맞지 않은 짐과 엘라는 나름대로 첫사랑을 한다. 동네의 흑백 아이들도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고, 찬하다기보다 허물없이 지낸다. 아이들은 짐과 엘라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 나이에 맞게 놀려대고, 엘라는 애들한테 바락 화를 내니, 구석에서 그 모양을 바라보던 어떤 할애비가 이랬다지?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엘라 눈에는 도무지 짐이 차지 않았다. 예쁜 백인 여자애가 집에 돈 많고 똑똑해서 장래 변호사를 지망할지라도 흑인 남자애를 좋아하기는커녕 말 한 마디라도 나누고 싶겠냐고. 이미 사춘기를 훌쩍 지난 무렵인데. 엘라 역시 보통의 백인 여자애와 다를 바 없어 이미 백인 권투선수 쇼티한테 몸과 마음, 줄 건 다 준 눈치다. 당시에 가장 인기있던 스포츠가 복싱. 복싱의 인기는 이후 60년이 넘게 간다. 쇼티도 동네 여자애들은 다 건드린 모양이다. 이 가운데 하나가 엘라였을 뿐.
세월이 더 가면 엘라가 낳은 쇼티의 아이가 죽었다. 아이가 죽자마자 쇼티는 엘라를 모른 척해버렸다. 갑자기 자유로워진 쇼티는 다른 아가씨를 찾아가고, 절망하는 엘라 앞에 나타난 남자가 바로 더러운 흑인 짐. 짐 크로 해리스. 왜 하필이면 짐의 두번째 이름으로 ‘크로’를 붙였는지 거 참.
짐은 고등학교 시절에 유급을 한 번 먹은 것처럼 연달아 변호사 시험에 낙방중이다. 분명히 다 아는데 막상 시험장에 가서 답안을 쓰려면 머리 속에서 정답이 서로 막 헝클어져 조리있는 답안을 작성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매번 그랬다. 뭐 그럴 수 있지. 이럴 때 엘라를 만났고, 엄마와 누이동생 해티가 반대하는대도 불구하고 결혼해버린다. 그리고 곧바로 프랑스로 이민을 떠난다. 둘은 결혼 전에 미국 안에서는 흑남백녀가 도저히 살 수 없을 거 같아 그런 건 하나도 허물이 되지 않는 나라로 떠나 살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면 잘 살 것 같지? 파리에도 미국인은 득실거렸고, 거기서도 흑남백녀는 완전히 왕따를 당했으며, 따라서 엘라는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채 홀로 극한의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파리를 떠나 시골로 가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방안에 틀어벅혀버린 엘라. 이러다 사람 하나 잡을 거 같아서 이민 2년 만에 다시 귀국길에 오른다.
이미 정상궤도를 벗어난 엘라. 이제 유진 오닐은 자기 전공분야를 만났다. 약간 정신질환이 있는 여성. 그것도 혼인한 여성을 오닐만큼 잘 묘사하는 작가는 세상에 없으리라. 그리고 이건 비극으로 이어질 수밖에. 애초 오닐을 읽으면서 해피 엔드는 기대 난망이겠지만.
이 드라마가 사랑 이야기? 사랑을 못 이루게 하는 인종 문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심리적 궤멸을 향해 오랜 시간을 치닫는 불행한 여성의 궤적, 그리고 그것 때문에 희생당하는 주변 인물, 즉 오닐과 오닐의 어머니가 용해된 플라스크 속 액체인 듯했다. 뭐 그랬다는 거다. 믿을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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