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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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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생 어드리크는 1972년 다트머스 대학에 입학했는데 이때 아홉 살 연상의 인류학자, 작가, 원주민 연구 프로그램 책임자인 마이클 도리스의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동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가방끈을 늘리는 동안 도리스의 뉴질랜드행 등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문학적 파트너십으로 단편소설을 함께 쓰며 연인의 관계를 돈독히 해 1981년 결혼에 이른다.
이때 도리스가 한부모가정 자격으로 입양한 세 자녀가 있었고, 어드리크와의 사이에도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태아 알코올 의존 증후군이 있는 입양한 첫째는 23세에 차에 치어 사망했다. 4년 후에는 입양 셋째 사바가 아버지 도리스를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했고, 이 사건으로 부부는 별거에 들어가 다음해인 1996년에 이혼했다. 1997년에는 마이클 도리스가 자살했다. 이후 입양 딸이 도리스가 평소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으며 루이스 어드리크 또한 학대를 방관했다고 증언했다.
<그림자 밟기>를 읽고 루이스 어드리크를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이 책이 어드리크 부부와 입양한 삼남매 이야기 가운데 성적 학대를 제외하고 픽션을 더해 쓴 소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주민 출신 인류학자, 작가 대신 적어도 미국 내에서는 잘 나가는 화가로 바꾸고, 남편에 의한 아내에 대한 가스 라이팅을 더 구체화한 작품으로.
작품의 주인공은 아이린과 길버트 부부. 길버트는 작품 속에서 약칭 ‘길’이라고 불린다.
만일 내 생각대로 루이스 어드리크가 위 세 입양아와 부부 사이를 소재로 소설을 썼다면 아이린은 자신을 모델로 한 치파웨족 인디언. 길은 클라스마족, 크리족, 자기 땅이 없는 몬태나 치페와족이 뒤섞인 혈통이라 미국 당국으로부터 원주민 등록이 미루어지고 있는 1/4 원주민이다. 원주민 등록을 하면 미국 정부와 원주민 협약 상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심지어 대학에 진학할 때에도 우선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 길은 그걸 받지 못한다. 그래도 그림을 그리고, 비싼 값에 미국 전역으로 팔려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것 없이, 부자는 아니지만 콜로라도에서 궁상스럽지 않게 살고 있다.
아이린은 19세기 아메리카 원주민을 그린 화가 조지 캐틀린에 대한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결혼 후 아이 셋을 얻어 첫째가 특히 과학에 천재가 있어 대학 강의를 듣는 13세 플로리언, 둘째가 원주민적 삶과 생존에 관심이 많은 11세 딸 리엘, 막내가 6살배기 아들 스토니. 이 가운데 둘째 리엘은 배 아파 난 딸이 아니라 친척이라고 했으니 입양한 모양이다. 입양과 관계없이 동등하게 키운다. 하지만 리엘은 부모와의 사이에 얇은 막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실제 생활에서 전남편 도리스가 어드리크보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 아홉 살이 더 많다. 아이린과 길 부부도 정확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지만 나이 차이가 좀 있다. 모임에서 길이 아이린을 만났고, 둘은 첫눈에 호감이 생겼으며, 길은 아이린에게 모델을 해달라고 제안했다. 이때 아이린은 대학에 다니고 있을, 다니기 시작할 때였는데 학비는 집이나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더라도 당장 돈이 아쉬워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아무리 화가 앞에서 예술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남자의 시선이 머무는 공간에서 누드로 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길은 아이린에게 다가와 피부, 윤곽선, 머릿결, 젖꼭지를 유심히 바라볼 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했다. 길을 처음 보는 순간 호감이 있었던 데다가 훌륭한 매너까지 가지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이린. 이들은 머지않아 연인관계로 접어들고, 원래는 에드워드 호퍼를 연상시키는 화풍으로 인디언보호구역과 풍경으로 시작했다가 아이린을 만나고 아이린의 초상과 인물화로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만 말이 초상화이지 아이린의 모든 모습이 다 그림으로 그려져 미국 각지를 돌며 전시를 하고 있었던 거다. 당연히 다수의 누드도 들어 있고, 그냥 포즈만 취하지 않고, 샤워하는 아이린, 누워 엑시터시를 감각하는 아이린, 술이 꽐라가 되어 충혈된 눈과 풀린 몸가짐의 아이린, 섹스 후의 젖은 몸을 적나라하게 벌리고 있는 아이린, 엉덩이 사이에 꽃 한 송이를 꽂고 엎드린 아이린, 하복부와 벌린 허벅지 마치 <세상의 탄생>과 흡사한 특별 부위만 노출한 아이린. 이런 그림만 있다는 게 아니라 이런 그림들도 아이린의 초상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이 인터넷 검색만 하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큰아들 플로리언은 어머니의 초상화를 잔뜩 검색해 보고 있다가 아이린에게 들켜 화들짝 놀라 삭제하기도 했다.
“괜찮아. 그림인데 뭐. 그러나 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이린이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였다.
길은 확실히 화가로의 재능이 있다. 하지만 재능은 그를 천천히 따분한 인간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정말 인생의 따분함을 느끼기 시작하자 감정을 만회하기 위하여 더 일에 몰두했고, 성공과 관계없이 과로로 녹초가 된 밤에는 처음에는 가끔, 그러다가 차츰 자주 과음을 하기 시작했다. 부창부수라, 아이린도 길을 따라 어느덧 술을 많이 마셨고, 당연히 알코올 의존증을 겪게 되었으며 이것으로 남편을 지치게 만들었다.
남편을 지치게 만드는 범 가운데 하나. 일찍이 첫 아이 플로리언을 낳은 1994년. 길은 아이를 키우면서 기념이 될 만한 일기를 써보라고 두꺼운 표지의 빨간색 일기장을 사주었다. 아직까지 쓰고 있다. 몇 권이 되겠지. 똑 같은 빨간색 표지의 일기장. 이 가운데 최근에 쓰고 있는 건 오랜 서류를 모은 캐비닛의 뒤쪽에 보관하고 있다. 아이린은 속으로 말한다.
“당신은 오랜 수색 끝에 이 일기장을 발견했을 거야. 내가 바람 피우는지 알아내려 읽었을 거고.”
상대가 바람 피우는지 배우자가 의심한다면 다 된 부부다. 이 집도 그렇다. 부부가 차츰 권태로워지고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그래서 상대를 지치게 만들면 별 생각이 다 들게 되리. 그리하여 남편 길은 (어드리크의 전남편 도리스처럼)아이린과 아이들을 몇 번 때렸고 (그러나 리엘을 성추행하지는 않았으며), 이건 미국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경찰에 고발하기 전에 심리상담사에게 상담을 받았다. 이후 손찌검은 하지 않지만 살면서 큰 소리 한 번 치지 않을 수 없고, 위협적인 몸짓 역시 한 번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인데, 결국 다시 한번 큰아들 플로리언의 머리통을 후려갈길 예정이다.
이미 가정, 특히 부부 사이는 다 된 것으로 판단한 아이린은, 남편 길이 읽고 있다고 확신하는 빨간 색의 일기장에 소설 한 편을 쓴다. 세 아이 전부 아버지가 다른 남매. 특히 막내는 부부가 프랑스 여행 중에 만난 남자와의 베드씬까지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사실이 그렇냐고? 천만에. 아이린이 딱 한 번의 혼외정사로 혼인의 순결을 깨뜨리긴 했지만 안간힘을 다해 그 실수를 잊고 살려 애쓰며 살고 있다. 길은 성격이 지랄 같아서 문제이고 신경정신적으로 작지 않은 결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혼인의 순결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오히려 자신의 순결함이 배우자의 그렇지 못함을 캐려고 하는 집착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길은 아이린이 씨 다른 아이 세 명의 자녀를 만들었다고 확신하지만, 어떻게 아느냐, 그걸 알게 된 내력은 결코 밝힐 수 없다. 아내가 쓴 일기를 읽었다고 자백해야 하니까.
아이린의 고민. 이혼을 원하지만 진심으로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이 바람을 피웠다고 남편이 믿게 빨간 표지의 일기책에 불륜 소설을 쓰지만 정작 이혼하면 먹고 살 일이 걱정이다. 그렇다고 조지 캐틀린에 관한 논문에 열심인 것도 아니다. 박사가 되어야 취직할 수 있다며 이혼에만 집착할 뿐 이혼 후 아무 계획이 없다. 남편이 자기가 불륜행각을 벌였다고 믿게 만들려고 일기장을 통해 가스라이팅을 감행한다. 아빠한테 얻어맞아 혹이 난 플로리언의 이마 사진을 찍었지만 보관만 할 뿐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결말이 그 꼴이 나는 거다. 어떤 꼴인지 알려드리지 않겠지만.
남편 길이 왜 자신의 외도를 의심하게 되었을까에 관한 묘사는 1도 없다. 신경정신적 질환인 편집증, 즉 의처증이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면 아이린이 벌인 단 한 번의 외도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내 추측은 알고 있다는 데 한 표. 이혼 경력이 있는 루이스 어드리크는 전적으로 아이린 편이다. 그걸 읽는 독자들도 어드리크의 문장에 현혹되어 전적으로 복장이 터진다. 뻥!
그러면 아이린의 진짜 모습은? 은행 창고에 있다. 미니애폴리스의 웰즈 파고 은행. 안전보관소 데스크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안내원이 지하 층의 은빛 창살을 열고 보관함 앞까지 데려다 준다. 그러면 아이린이 핸드백에서 자신의 열쇠를 찾아 보관함을 꺼내 열쇠를 비틀어 그 속에서 파란 공책을 꺼내 책상에 놓고, 자신은 의자에 앉아 진짜 자신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 책은 남편이 보라고 쓰는 열린 빨간 일기와 진짜 자신의 내면을 밝히는 닫힌 파란 공책으로 구분한다.
망조가 든 가정. 심리상담사 앞에서 씨 다른 아이들 때문에 대판 부부싸움을 하고, 그날 밤 길은 창문 밖으로 자신이 그리고 있는 모든 그림을 던져버린다. 피 같은 술병도. 그것이 쌓인 눈 속에 퍽퍽 꽂혔으니 다음날 우연히 이 집 앞을 걸어갈 노숙인이 있다면 얼마나 횡재 같았을까? 그리고 다음 날 길은 자진해서 신경정신과에 입원한다. 집안에 평화가 찾아오지만 수입은 발생하지 않는다.
몇 달 후, 길이 퇴원해 집에 돌아온다. 신경이 죽은 듯한 길은 오랜만에 가족 동반해 6월의 호숫가로 피크닉을 떠나고, 소설 <그림자 밟기> 역시 대단원을 향해 막바지 스타트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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