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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쉬트 07769 (양장) ㅣ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구소영 옮김 / 알마 / 202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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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 C, D, E, F, G, H
알파벳 H는 여덟번째 나온다. 독일지역에서 머리통 박박 밀고 검은 가죽 자켓을 입었으며 몸 일부에 피어싱을 한 건장한 청년이 울뚝불뚝한 이두박근에 88을 문신했으면, 그건 우리나라처럼 88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HH, 하일 히틀러, Heil Hitler를 외치는 네오 나치의 일원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마찬가지로 18이라 새겼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욕설이 아닌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의미한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이 사람들은 신발도 옆구리에 N자가 박힌 미제 운동화 뉴발란스 제품을 즐겨 신는단다. N이 ‘나치’의 첫 글자라서. 타이완 소설가 천쓰홍의 작품 <귀신들의 땅> 주인공 텐홍의 애인 T가 네오 나치의 일원으로 등장하면서 설명한 내용이다. 88은 <헤르쉬트07769>에 나온다.
보통의 독일인 또는 독일의 지배하에 있던 동유럽 몇몇 국가의 시민들에게는 이 네오 나치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집단행동, 반유대주의, 난민유입 반대, 테러리즘 같은 것을 상당한 위기의식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말한다. 화가 지망생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키 작은 군인, 히틀러 상등병의 집단도 처음엔 한줌밖에 되지 않는 볼품없는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실제로 네오 나치를 자칭하는 이들은 집단으로 움직이면서 군대 비슷한 조직을 구성해 폭력과 강도 등 불법행위도 서슴지 않아 시민들의 삶을 불편하게 한다니 생활의 큰 위협이긴 할 터이다.
구 독일의 동독 출신 사람, ‘오시’라고 낮추어 부르는 말을 간혹 듣는 이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서독 자유주의에 익숙하지 않아 생기는 자존감 결여, 상대적 빈곤감 등의 통일 후유증에서 아직도 ‘완전히’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작가는 이런 지역 정서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헤르쉬트07769>의 무대를 바흐의 출생지 튀링겐 자치주 내 가상의 작은 마을 카나로 정했다.
이 카나가 인구도 별로 없고 크기도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그래도 카나 오케스트라와, 분데스리가는 아니더라도 하부 축구 리그도 운영하고, 꽤 오래된 성당도 있는 곳이다. 한 시절 도자기 공장을 건설해서 모자라는 인력을 충원하기 위하여 형제의 나라인 공산주의 베트남 인들을 들여와 일을 시키기도 했지만 독일 통일 전에 사업이 번창하지 못해 지금은 거의 다 자기나라로 돌아가버린 상태이다. 그들이 살던 8층짜리 좁은 아파트 “호흐 하우스”도 공장과 더불어 낡아버렸지만 보수하고자 하는 마음도 별로 없어서 엘리베이터가 여간해 작동하지 않는다. 낡고, 생산품도 없는 산골마을. 자연경관도 그리 볼만하지 않아 간혹 관광객 몇 명이 와서 길어야 두세 밤만 자고 가는 곳. 이런 마을의 세계적 공통점이 하나 있다. 연령층이 높다는 것. 그래서 이들 주민에게 네오 나치의 출현은 더욱 두려움과 반발의 대상이었다.
근데 젊은 청년이 이 호흐 하우스 꼭대기 8층에 산다. 이이의 이름이 바로 플로리안 헤르쉬트.
카나에 있는 리히텐베르크 중등학교 건물에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교양 강좌인 시민대학이 개설되어 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늙은 쾰러 강사가 “현대물리학의 행로들”이란 제목으로 강좌를 열었다. 플로리안 헤르쉬트로 말할 것 같으면 일종의 유로지비 비슷한 면이 있다. 거대한 덩치와 상상을 불허하는 완력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이 여려 사나운 개와 모진 사람들을 무서워해 얼핏 보면 벌벌 떠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웃들이 힘든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군소리 없이 어떤 일이 됐든 깔끔하게 마무리할 때까지 성실하게 일을 끝내 거의 모든 사람들한테 바른생활 청년으로 귀여움을 받는다. 물론 대가로 소소한 먹을 거리나 편의를 얻기도 한다. 책 좀 읽은 사람들은 이런 인물이 등장하면 언젠가 한 번 거창하고 파괴적인 힘을 제대로 구사하겠구나, 생각하실 걸?
유로지비 비슷하다니까 머리가 좀 모자라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이 그런 거 같다. 본인도 알고 있어서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쾰러 씨의 강좌 “현대물리학의 행로들”을 수강했으며 강의 중에 ‘소립자의 놀라운 세계’가 인상 깊었는데, 얼마만큼이었느냐 하면, 진짜로 놀라운 세계라서 한 학기를 더 수강했다. 쾰러 씨도 흡족했겠지?
플로리안이 배운 바에 따르면 빅뱅 이전인가 이후인가 하여튼 그날 아침이나 저녁 때, 진공상태에서 10억개의 물질입자와 반물질입자가 서로 막 부딪혀 결국 제로, 진공을 만들고 있었는데, 10억 한 개 째의 물질입자가 말썽이었다. 이것과 대응해 공空, 없음의 상태로 이끌 반물질이 생성되지 않은 거였다. 그리하여 평형이 깨지는 결과의 중대한 파급력으로 이 잉여 때문에 급기야 세상의 종말이 초래될 수 있다는 급박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순진하고 성스러운 바보 플로리안 헤르쉬트는 이 문제가 하도 엄청나서 해결을 위하여 반드시, 적어도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다루어야 할 터인데, 독일 내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스스로 과학자이기도 했던 앙겔라 마르켈 총리 말고는 없었다. 그리하여 플로리안은 이런 내용을 꼼꼼하게 적어 앙겔라 마르켈 총리에게 길고 긴 편지를 부친다. 단 편지 봉투에 보내는 사람의 주소는 쓰지 않고 딱 이렇게 적어 놓았다.
“헤르쉬트 07769”
07769는 카나 지역의 우편번호. 카나에서 헤르쉬트는 딱 한 명, 자기밖에 없으니 만일 총리가 답장을 한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총리한테 굳이 자기 이름까지는 밝힐 필요 없겠지 싶다.
플로리안이 유로지비의 일원임이 분명하다. 그는 자기가 보낸 편지는 틀림없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읽어볼 것이고, 여사 또한 과학자이니 사안의 심각성을 단박에 이해해 자기 의견을 받아들여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토의할 것을 제안했거나, 벌써 비밀리에 전지구를 위협하는 평형의 깨짐 상태를 해결할 모종의 연구나 대처가 진행중일 거라고 여긴다.
플로리안은 작품을 시작할 당시엔 10대 후반으로 보인다. 카나에서 청소, 그냥 청소부가 아니라 특별 청소, 예를 들어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한 소위 그래피티 예술을 칭한 장난이나 시설에 어울리지 않는 바닥의 오염 같은 걸 전문으로 청소하는 업체의 사장 ‘보스’ 당연히 따로 이름이 있지만 그냥 보스라고 불리고 자기도 별명에 감정이 없어 그렇게 불리는 걸 받아들이는 보스가 예나의 고아원, 라니스 킨더하임에서 10대 중반의 건장하고 힘이 장사인 플로리안을 데려와 자기 조수로 삼았다. 당연히 변변치 않은 임금을 주고 잘 부려먹었지. 대신 호흐 하우스 8층에 작은 방을 얻어 주었는데 플로리안은 난생 처음 생긴 자기 방, 자기 집, 자기 영역이 그렇게 좋을 수 없어서 보스에게 충성을 다 한다.
다만 사리 판단에 문제가 있는 플로리안은 보스가 카나 지역의 대표적인 네오 나치, 이른바 군대의 대장 지위에 있는 줄은 모른다. 보스는 플로리안더러 자기 군대에 입대하라고 재촉하지만 그건 마땅하지 않다. 거기 가입하면 피어싱과 문신을 해야할 터, 플로리안은 특히 문신이라면 아주 질색이다. 겁이 난다. 거기 구성원들도 성격이 우락부락하고 거칠어 정이 도무지 가지 않는데, 몸집 작은 여자 카리가 특히 그렇다. 눈치 챘어? 나중에 카리하고 뭔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거?
카나의 나이 든 주민들은 플로리안을 좋아하지만 플로리안이 모시고 있는 보스는 철저하게 경계하고, 경원하고, 의심한다. 그가 데리고 있는 부대원들도 마찬가지다.
근데 카나를 포함한 예나, 아이제나흐, 에어프루트, 고타, 줄 지역에서 감히 이곳 출신의 대 작곡가 악성 바흐와 관계된 건물에 스프레이로 “우리”라고 쓴 옆에 늑대 대가리를 그리고 도망가는 일이 속출한다. 보스가 바흐 추종자이다. 감히 튀링겐의 아버지이자 독일 정신의 창조자이며 (플로리안 생각엔) 우주적 파괴의 궁극적 해결인 바흐를 훼손하려는 행위를 참지 못해, 자기 군대를 동원해 스프레이어를 잡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반면 주민들은 나치 아이들이 늘상 저지르는 테러의 일환으로 바흐와 성당에 낙서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당연히 지시는 보스가 한 것으로. 바흐를 연주하기 위하여 카나 오케스트라를 만든 보스인데도. 그때 워낙 네오 나치에 의한 파괴행위가 극을 달했기 때문에 그랬겠지. 이렇게 오해가 다른 오해를 만들고, 튀링겐 지역에서는 이 오해에 겹쳐 팬데믹이 창궐하기 시작한다. 카나의 산에서는 19세기 말에 멸종했으나 복원사업으로 개체가 생기기 시작한 늑대가 그곳까지 들어와 선량한 유대인 도서관 사서 링어 부인의 가슴과 목을 물어뜯었고, 아내를 보호하려던 링어 씨의 등짝까지 물어 부상을 입히는 일이 벌어진다. 엎친 데 덮친 꼴로 보스의 군대 가운데 제일 골통인 위르겐이라는 쓰레기는 보스와 플로리안의 단골 주유소, 휘발유보다는 커피가 맛있어 자주 들르는 아랄 주유소의 트란실바니아 출신 안주인 나디르를 겁탈했거나 하려다가 남편 로자리오가 휘두르는 쇠뭉치에 맞아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한다.
이게 작품의 모든 것이 크게 바뀌는 전환점이다. 이 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은 갑자기 바뀌는데, 작품이 바뀐다는 건 당연히 주인공의 성격이 돌변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보스와 군대는 쓰레기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자기편 위르겐을 위무하기 위하여 아랄 주유소를 폭발시켜버리며 이 사건으로 플로리안과 친했던 나다르-로자리오 부부가 불타 죽는다. 카나는 이제 안으로는 보스가 이끄는 군대에 의한 테러, 밖으로는 팬데믹의 확산, 역사적으로는 사라진 늑대의 출현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것이 묵시록적인 종말론?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그래서 플로리안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답장을 받았다는 거야, 못 받았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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