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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부재중
안토니오 무뇨쓰 몰리나 지음, 박지영 옮김 / 레드박스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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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은 몰리나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다는 건 벌써 알았는데, 급기야 오늘 읽었다. 혹시 아직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를 모르시는 분이 있으면 냅다 책방에 가서 <폴란드 기병>을 사 읽든지,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시라. 책방에 ‘몰리나’를 검색하면 딱 세 작품이 뜬다. <폴란드 기병>, <리스본의 겨울> 그리고 <아내는 부재중>. 이제 나는 번역한 몰리나를 다 읽게 되는데, 그게 아쉬워, 뭐가? 몰리나를 다 읽어서 더 이상 이이의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워 여태 읽기를 머뭇거렸던 거다.
<아내는 부재중>의 경우, 한 페이지에 열아홉 줄밖에 담지 않은 널럴한 편집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134페이지에서 끝나는데,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구성을 감안하면 요즘 우리나라 출판업계에서 즐겨 이야기하는 경장편 보다는 단편소설로 구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독후감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건데, 몰리나 치고 재미가 별로다. 이 책은 어쩌면 다행스럽게 절판이니 뭐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덜 미안하겠지. 정말? 설마. 박하게 이야기하면 속으로는 캥긴다. 어느 경우도 마찬가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중심도시 하엔에 결혼 6년 된 부부가 살았으니 남자가 마리오, 여자가 블랑카. 때가 어느 땐데 여자 이름이 뒤에 가느냐고? 미안하게 됐다. 남자가 당연히 찐따라서 남자부터 먼저 소개하려고 그랬다. 좀 봐주라.
하엔도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닌데 하엔에서도 차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하는 산골에서 만날 손으로 빵을 쥐고 수프를 찍어 먹으며 자란 마리오가 어린 시절 아빠 손을 잡고 하엔에 와 터미널 부근의 식당에서 감자튀김과 달걀 프라이 두 개를 덮은 햄버거 스테이크를 먹을 때 처음으로 양손으로 포크와 칼을 쥐어 봤을 정도로 촌놈이었다. 그래도 공부는 곧잘 했는지 없는 집구석에서 학비와 기숙사비를 대주었을 턱이 없는데 하여간 하엔으로 유학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역시 돈이 없어 가지 않았다. 원래는 요즘엔 ‘건축기술사’로 호칭이 바뀐 ‘건축감리사’가 되고 싶었는데 그건 4년제 대학을 나와야 시험 치룰 자격이 있어서 대신 건축제도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거의 들어맞지 않는 혈액형 판단법으로 구분하자면 마리오야말로 전형적인 A형 인간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계속 연인 사이였던 자그마한 몸집의 줄리와 우리나라 유행가 제목처럼 “너무 오래 한 연인” 사이를 유지하다가 둘의 사이가 너무너무 덤덤하고 소가 닭 보듯 해 줄리가 질려서 “다른 남자가 생겨” 헤어지자고 일방적인 통보 끝에 갈라섰다. 마리오도 안다. 줄리가 진짜 다른 남자가 생긴 게 아니라 지긋지긋해서 도망간 거라는 거. 하여간 이렇게 다시 싱글이 된 마리오는 직장 상사 라기보다 선배의 총각파티 때 직원들과 몰려가 엄청 시끄러운 재즈 바에서 코카인에 취한 키 크고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니 이 여자가 바로 훗날의 아내 블랑카.
모범적인 A형 인간. 아침 여덟시에 출근해서 오후 세시 십분 전에 칼퇴근 해 집에 도착하면 12분 걸리니까 보통 세시 2분. 근데 횡단보도 걸리는 날이 많아 대개 세시 5분에서 10분 사이에 집에 들어온다. 회사에서 일곱 시간, 자는 시간 일곱 시간을 뺀 나머지 열 시간 동안 세상 모든 여자를 무시하고 오직 아내 만을 원하고,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남자. 이이의 직업은? 하엔 시청 공무원이다.
문제가 있다. 역시 비슷한 계급끼리 짝을 짓는 게 장땡이다. 블랑카는 하엔시 기준으로 엄청 부자집 따님. 가시 많은 생선은 물론 바나나도 오직 포크와 칼만 사용해 생선 가시를 바르고 바나나 껍데기를 벗긴다. 절대 손과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으며 아무리 많이 먹어도 잔잔한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심지어 중국요리를 먹을 때 생선가시를 젓가락으로 말끔하게 발라낸다니까.
어릴 때부터 부잣집 따님으로 생색내는 분야에 빠삭한지라 음악, 미술, 건축 등에 상당한 조예가 있고, 정말로 깊은 조예가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자기 필이 한 번 꽂히면 아무리 무명의 예술가라도 끝까지 뒷받침을 해주려 안달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리하여 마리오를 만나기 전에 나중엔 ‘지미 앤’이라고 이름을 바꿀 ‘나랑호’라는 화가에게 돈도 주고, 자기 집을 작업실로 내주고, 당연히 마음과 몸도 다 주었으며 그에 대한 대가로 술과 담배와 코카인 중독을 받았다. 이 와중에 착하고 성실한 마리오를 만난 것.
웃긴 것이 블랑카가 제일 싫어하는 직업이 공무원. 이이에게 공무원이라고 하는 건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 상상력 없이 꽉 막힌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그래도 살았다. 남편과 수프를 먹으면서 한 숟가락 뜰 때마다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마리오가 수프를 먹을 때 작은 소리를 낼 때마다 눈(깔)을 치켜뜨고 째려보면서, 주요리인 고기 요리는 절대로 자기가 움직이지 않고 마리오더러 가져오라고 열라 눈치를 주면서. 키스를 하더라도 입술을 여는 법이 전혀 없이. 그래도 마리오는 좋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모든 일은 전위예술가 루이스 오네시오가 등장함과 동시에 산산이 부서졌다. 루이스가 블랑카한테 자기 전시회의 시간제 큐레이터로 고용했고, 블랑카는 전에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프리다 칼로 전시회에 가자고 부탁했다가 마리오가 뺀찌 놓은 것 때문에 삐쳐 있다가, 사라졌다.
그래서 제목이 <아내는 부재중>.
마리오가 상심에 젖어 있던 어느 날, 복도 끝에서 마리오를 향해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초록 실크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고, 굽 낮은 신발을 신은 것이 블랑카하고 많이 닮았는데, 그래도 블랑카는 아니다. 마리오보다 키가 더 커서 몸을 약간 숙이며 키스를 했어도 역시 블랑카는 아니다. 블랑카와 나누었던 감미로운 첫 키스하고 입술의 감촉이나 체온은 같지만 하여간 블랑카가 아니다. 블랑카하고 다르게 이 여인은 키스하면서 입을 약간 벌려주었다.
그거야 뭐 부부간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결정적으로 다른 건 흐트러진 자세로 소파에 반쯤 누워 담배를 피우며 TV를 보고 있다는 것. 맨발을 드러내고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심지어 새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고 발에 가구에 부딪힌 상처도 없으며, 뒤꿈치 각질도 말끔하게 제거했다니, 틀림없이 블랑카는 아니다. 근데 닮기는 참 많이 닮았다.
이거 무슨 일?
역자 박지영의 말처럼 “외모만 같고 영혼은 다른 낯선 타인”일까, 아니면 “마리오가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거야 뭐 읽는 사람 마음대로다. 작가 몰리나한테 물어봤자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당신 생각이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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