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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ㅣ 최측의농간 시집선 3
심재휘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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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토끼띠 문예콘텐츠 창작학과 교수 심재휘의 시집. 2002년 문학세계사에서 나온 책을 2017년에 복간한 시집이다. 출판사 “최측의농간”이 시집선 시리즈를 모두 일곱 권 찍었는데 처음 세 권은 이 시집처럼 이미 절판된 시집을 복간한 것으로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출판사가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이 2020년에 찍은 책이다. 짐작하건대 좀 어려운 처지를 당한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심재휘는 21세기 들어 우리나라 시들이 전위를 향해 용맹돌진하고 있는 가운데 전통적 시쓰기를 고수하는 몇 안 되는 시인 가운데 대표적 한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한테 익숙한 서정시인이라는 의미겠지. 이런 의미에서 제일 앞 순서로 실린 시 전문을 읽어보자.
남쪽 마을을 지나며
서러움 하나 간신히 빠져나갈
참나무 숲을 지나자 가을 저녁은
목화밭 너머의 봉분들과 참
다정해 보였습니다
마을은 낡은 그림자들을
탐스럽게 매달고 있었습니다
초행길이었습니다
엉겁결에 전생 하나를 밟고
신발이 더러워지기도 했습니다만
무덤 같은 신발로 오래 걷다 보면
낯선 곳에서도 겨울은 맞을 만합니다
단지 잎 다 진 키 작은 나무에
탐욕스럽게 매달려 있는 모과처럼
오늘과 나는 서로 이복형제 같아서
조금 서러웠습니다 (전문. p.13)
시를 척, 읽으면 탁, 하고 알 거 같다. 하지만 내가 읽기에 국한해 말하자면 문제가 있다. “오늘과 나는 서로 이복형제 같아서 / 조금 서러웠습니다” 제목이 남쪽 마을이라고 해서 참나무 숲이 있는 산골 지나 초행길 마을로 여길 수도 있고, 그걸 팍 확장해서 그냥 사람 사는 판이라 생각해도 괜찮을 듯하다. 근데 왜 오늘과 내가 이복형제 같았을까? 그게 왜 서러웠을까? 이복異腹이라니까 오늘을 낳은 엄마하고 내 엄마가 달라서? 그걸 앞에서 수식하는 절節이 있다. “단지 잎 다 진 키 작은 나무에 / 탐욕스럽게 매달린 모과처럼” 나의 또다른 고민은 이 절 앞에 “단지”는 왜 썼을까, 하는 것인데 그건 그냥 넘어가자. 그러면 [오늘 = 잎 다 진 키 작은 나무] 그리고 [나 = 탐욕스럽게 매달린 모과]라고 볼 수 있을까, 없을까? 만일 이 등식이 참이라면 바야흐로 시가 그리 쉽게 읽히지 않는다. 시절 또는 시간 혹은 63년 토끼띠가 지내온 현대사와 오늘의 간극이 존재해버릴 수도 있다는 거. 에이, 물론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쓸데없는 고민만 열라 하고 있으니 가뜩이나 없는 머리 숱만 더 듬성듬성해지지.
학교 졸업한지 몇 년인데 아직도 이렇게 시를 읽어야 하느냐고 타박하지 마시라. 이 화두를 깨지 못하면 시 맛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나? 물론 내 경우겠지만 시 한 수 읽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병맛이라고? 그럼 할 수 없고.
독자들이 이 시집에서 제일 인용을 많이 하는 시가 <편지, 여관, 그리고 한평생>인 것 같은데 전문을 인용하려면 좀 길다. 모두 7연으로 되어 있는 시. 이 가운데 처음 세 연만 가져와보자.
후회는 한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부분. p.18)
시를 읽는 건 독자 마음인데, 그렇다고 다 마음대로 느끼라는 건 아니지 싶다. 1연에서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이 어느 동안일까, 나는 모르겠다. 이 시에서 여관방의 이미지는? 피곤한 나그네의 심신을 쉴 수 있는 여관방이라기보다 뭔가 사연이 있어 머물 수밖에 없는 누추하고 슬픈 장소의 분위기가 풍긴다. 그러니 이 방에 머물며 많은 편지를 썼지만 편지들이 수신인한테 제대로 가는 대신 다시 시인이 머문 여관방으로 회송된 것. 이 시도 읽으면서 독자가 감지할 수 있는 건 이미지, 여관과 편지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일 뿐이다. 서정시의 외피를 입은 반half구상시라고나 할까? 물론 시를 읽으면서 메시지를 얻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이미지만 포착할 수 있어도 그게 어디냐. 다만 시의 무대인 여관이 아주 오래 전에 신경림이든가 정호승이 즐겨 쓰던 시어 “여관잠”하고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던 건 왜 그랬을까?
독자마다 시를 읽으며 느끼는 것이 다른 이유는 시인이나 독자나 다 개별적이기 때문이겠지. 그게 어떻게 교집합을 이루면 시인하고 궁합이 맞는 거고, 아니면 마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이 시는 읽으며 꼭 인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환자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스는 잠그고 나왔을까 또
난로는 켜 둔 것이 아닐까 병이
더 깊어지면 말입니다
발로 비벼 끈 담뱃불이나 이별 같은 것들도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데요 그게 말입니다
달아오른 난로나 끓어 넘친 가스레인지
한동안 외로움에 지지직거리던 TV의 마음에도
요새는 안전장치가 있어서 제풀에 꺼지더라
이 말입니다 새카맣게 타버리지는 않더란 말입니다
꼭 죽지 않을 만큼만 죽고 싶다가도
금방 멀쩡하더란 말입니다 신기하게도
다시 불이 붙더란 말입니다
세상 도처에 깔린 안전장치들
너무 안심이란 말입니다 (전문. p.69)
이 양반이 훗날 낼 시집 《중국인 맹인 안마사》에서 그러듯이 이 시집에서도 구질구질하게 첫사랑 이야기를 제법 한다. 왜 구질구질하냐고? 첫사랑. 그런 거 오래 기억하지 말라. 우연이라도 만나지 말고, 꿈에서도 마주치지 않는 게 신상에 편하다. 잠꼬대라도 했다가 옆에서 침흘리고 자던 마누라 들으면 곡소리난다. 정말로 다시 만나 사고치면 그거 보통 일 아니다. 농담이라도 입에 올리지도 말고 살아라. 근데 심재휘는 그러지 못하겠던 모양이다.
첫사랑
장충동에 비가 온다
꽃잎들이 서둘러 지던 그날
그녀와 함께 뛰어든 태극당 문 앞에서
비를 그으며 담배를 빼물었지만
예감처럼 자꾸만 성냥은 엇나가기만 하고
샴푸향기 잊혀지듯 그렇게 세월은 갔다
여름은 대체로 견딜 만하였는데
여름 위에 여름 또 여름 새로운 듯
새롭지 않게 여름 오면
급히 비를 피해 내 한 몸 겨우 가릴 때마다
비에 젖은 성냥갑만 늘었다 그래도
훨씬 많은 것은 비가 오지 않은 날들이었고
나뭇가지들은 가늘어지는 운명을 향해 걸어갔다
가늘어지기는 여름날 저녁의 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후로 많은 저녁들이 나를 지나갔지만
발아래 쌓인 세월은 귀갓길의 느린 걸음에도
낡은 간판처럼 가끔 벗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른 꽃잎에게 묻는 안부처럼
들춰 보는 그 여름 저녁에는 여전히
버스만 무심하게 달리고 있었다
이별도 그대로였다
비가 오는 장충동 네거리 내 스물두 살이
여태껏 그 자리에 서 있던 거였다 (전문. p.100~101)
스물두 살의 비 내리는 장충동 공원 바로 옆 태극당의 첫사랑 그녀. 이 첫사랑이 정말 첫사랑 그녀를 향한 것인가? 이렇게 묻지 말자. 그냥 스물두 살의 첫사랑이라도 충분히 좋으니까. 괜히 시인의 22세 시절, 재수없게 혁명과 투쟁의 구호와 분신 시위의 시대에 살던 책무 같은 걸로 포장하지 않아도 얼마나 어여쁘냐, 그렇지?
근데 그렇게 생각해도 좀 문제가 있다. 심재휘는 첫사랑도 참 여러 번 한다.
<자작나무 흰 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위하여 서울로 버스타고 올라갈 때 “그때 고향에 두고 온 것들 이를테면 / 눈 맞으며 손 흔들어주던 사랑도 이제는 / 쌓이고 녹고 하여 또 내일처럼 낡아갔는데”라고 노래하고, <나무 계단에 관한 오래전 이야기>에서도 “내가 손을 잡았던 사진관집 딸이 다만 어디쯤에서 홀로 늙어가듯”이라 노래했는데, 그것들은 사랑 아니었나?
하긴, 시인들한테는 다정도 병이니까.
심재휘를 읽으며 다시 느낀다. 시 읽는 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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