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잠들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7
존 업다이크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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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다이크의 토끼 시리즈는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시 북부에 있는 브루어 지역이 무대이다. 근데 4부이자 마지막 편인 <토끼 잠들다>를 펴면 난데없이 사우스웨스트 플로리다 지역공항 인근의 딜리언 시가 등장해 독자를 잠깐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플로리다는 따듯한 곳. 나이 들어 겨울만 되면 뼛속에 냉기가 차는 돈 많은 늙은이들이 겨울 한 철 동안 몰려들어 사는 동네가 이 딜리언 시에 있다. 미국에서 돈, 하면 당연히 유대인 커뮤니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서, 골프장 등 휴양 시설을 완비한 클럽 하우스 비슷하게 지은 아파트의 소유자 대부분이 나이든 유대인 부부 또는 과부다. 이 아파트에 한 가구를 해리와 재니스 앵스트롬 부부가 구입해 1년 중 절반을 와서 지내고 있다.

  플로리다? 3부 <토끼는 부자다>를 읽은 독자는 플로리다 하면 그리스계 중고차 딜러이자 한 때 재니스 앵스트롬과 진한 연애, 잠깐이지만 동거까지 한 찰리 스태브로스가 (헤리의 아들 넬슨이 켄트 주립대학을 때려치우고 할머니 집으로 돌아올 때 동행한 여대생) 맬러니를 데리고 여행을 떠난 곳인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때 플로리다 지역이 해리의 머리 속에 콱 틀어박혔겠지. 3부의 시점이 1979년~80년. 4부는 1988년의 마지막 며칠부터 1989년 9월까지. 어느새 해리의 아들, 철없고 고집불통이고 자기 좋은 건 무조건 해야 하고, 다분히 우울증 증세가 있는 넬슨이 어느새 서른두 살이 됐다. 켄트 대학의 서무과 직원이었던 프루와 결혼하자마자 낳은 딸 주디가 벌써 여덟 살이다. 주디의 동생 로이가 네 살.


  넬슨이 처자식을 부양하는 한 가족의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게 만들려고 넬슨의 엄마 재니스는 재니스의 아빠, 해리의 장인, 넬슨의 외할아버지가 맨손으로 시작해 만들어 놓은 “스프링어 모터스”의 실제적인 대표 자리를 외아들 넬슨에게 넘기고, 여태까지 진짜 사장 노릇을 하던 남편 해리와 함께 1년의 절반을 저 멀리 떨어진 플로리다 끝자락에 있는 딜리언으로 가 부자父子의 물리적 거리를 확실하게 떼어 놓았다. 이게 가능한 것이 잰의 엄마이자 해리의 장모가 죽으면서 예상했던 것과 달리 모든 재산을 재니스한테만 주었기 때문이다. 스프링어 모터스의 사장이 누구든 관계없이 확실한 대주주, 실제적인 소유주가 재니스라서.

  그냥 펜실베이니아에 있으면 될 거 같은데 왜 플로리다까지 갔느냐 하면, 2부 <돌아온 토끼> 시절 집이 홀랑 타버렸을 때 해리의 집에 머물며 소년 넬슨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좋은 관계를 만들던 질이 죽는 순간, 넬슨이 불타는 집 속으로 뛰어들어 질을 구하려 했던 것을 끝내 못하게 말린 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은 깊고 깊어서 죽음이 부자 사이를 갈라놓기 전까지는 화해할 수 없는 골짜기를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해리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백이면 백, 넬슨까지 죽었을 터이지만 소년 넬슨은 그걸 이해할 정도로 여물지 못했을 시기였다. 이제 막 사춘기를 시작할까 말까 했으니까. 그날 이후로 넬슨은 점점 빗나갔다. 일찍이 농구선수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던 아빠 해리에 비하면 잘 생기지도 않고, 키도 작은데다가 그리 돋보이지도 못해 더 거리가 벌어졌을 수도 있다. 아빠 해리도 그런 아들한테 지기 싫어서 아들이 하는 행동이 (물론 엄청 문제가 많은 골통이기는 하지만) 마땅하지 않았을 터, 그때마다 격려를 해주고,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돕기는커녕, 그것봐라 이 한심한 놈아, 비슷하게 비웃고, 비아냥거리고 뭐 그러다가 나중엔 저절로 넬슨이 하는 말/주장/건의를 될 수 있으면 반대 방향으로 단정하고 싶어졌고, 저절로 그렇게 됐다. 스프링어 모터스에서 부자가 낯을 맞대면 날마다 그럴 터인데 엄마 재니스가 보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을 자리잡게 만들어주기 위하여 멀고 먼 플로리다까지 내려가게 된 것.


  그래서 막이 올라가면, 1988년 크리스마스 직후의 플로리다. 연말 연휴를 맞아 아들내외가 두 손주의 손을 잡고 부모를 뵈러 내려왔다. 이제 해리의 나이 쉰다섯. 며칠 있다가 쉰여섯이 된다. 사실상 은퇴한 상태로 하는 일이라고는 집 옆의 클럽 회원으로 날마다 자기보다 나이가 더 든 유대인 노인들과 골프를 치고, 게임에 져서 내깃돈 20달러를 건네주는 일이다. 190cm의 키에 104kg. 농구선수 출신이니 젊을 때는 얼마나 멋있었겠어? 농구와 배구가 실내운동이라서 농구선수, 배구선수들이 진짜로 보면 제일 멋있다. 지금이야 선크림 좋은 게 많아 그렇지 않지만 1970년대의 축구, 야구 선수들은(차범근, 이선희?) 몸이 새까맣게 타서 얼굴이 얼룩덜룩, 마치 야수 같았다. 그러나 세월은 해리의 옆구리와 배꼽을 앞뒤로 해서 부드럽지만 묵직한 피하지방을 달아 주었으며, 대장과 소장 사이에도 만만치 않은 양의 내장지방까지 덤으로 붙여 주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190cm에 104kg이면 그리 과하지 않건만, 당시엔 이게 심각한 과체중이었나보다(아닐 것 같다. 그것보다는 인슐린저항성에 관한 앵스트롬가의 숨겨진 내림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해리는 땅콩 박힌 초콜릿바 같이 달고 기름지거나, 소금 뿌린 콘칩 같이 짠 음식을 그렇게 좋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이 결과 이젠 포르노 잡지를 봐도 충동이 아니라 지루함을 느끼고, 공항에서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깜빡 기억나지 않아 손녀와 함께 그 큰 공항에서 길을 잃게 되며, 간헐적으로 가슴에 통증을 느껴 종말에 임박했다는 기분이 차가운 물처럼 뱃속에서 똑똑 떨어지는 느낌이 난다. 겨우 쉰다섯 먹은 중장년이.

  손녀 주디와 함께 공항에서 길을 잃었다고? 왜? 아들 넬슨은 손자 로이를 안고 혼자 뚜벅뚜벅 수화물 찾으러 떠나버리고, 아내는 며느리와 조잘대느라 정신이 없는데, 손녀 주디의 손을 잡고 공항을 빠져나가던 해리의 눈에 땅콩초콜릿이 포착되었던 거였다. 그게 먹고 싶어서 주디에게, 너도 먹고 싶지? 할아버지가 하나 사줄까? 뭐 이러다가, 결국에 하나 샀고, 먹었고, 주디와 함께 공항을 빠져나오다가 그만 일행을 놓쳐버렸다. 그래서 주차한 곳으로 직접 가려 일단 넓고 넓은 주차장에 나왔더니 글쎄, 차를 어디에 두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 거다. 넓고 넓은 주차장에서, 아무리 12월이라지만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의 땡볕 아래에서 말이지. 그래, 그래. 결국 식구들을 찾기는 했다. 초장부터 이산가족이 되면 안 되니까. 잔뜩 열을 받은 상태에서 아빠 해리를 발견한 넬슨. 어디 있었느냐고 불같이 화를 내는 거다. 아이, 씨. 뒤도 안 보고 먼저 걷던 건 넬슨이었음에도 “애 둘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짜증을 팍 내는데, 이게 송곳처럼 해리와 재니스의 아픈 곳을 찌르는 말이었던 걸 넬슨을 알았을까?

  1부 <달려라 토끼>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헤매던 재니스가 집 욕실에 실수로 빠뜨려 죽게 만드는 사고를 넬슨은 그리 깊게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겠지. 이제 4부가 되니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할 참. 넬슨에게 넬슨도 모르는 여동생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근데 조금만 더 읽어보면 이제 콧수염을 기르고 한쪽에만 귀걸이를 한 넬슨도 여전히 한심한 지경에, 한심한 짓만 골라서 한다. 훅, 빨아들이는 일. 뭘? 코카인. 자신은 결코 중독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만일 중독일지언정 코카인 중독은 알코올 중독보다 인체에 덜 해롭다고 침을 튄다. 코카인을 얇게 몇 줄 깔아놓고 그걸 한 줄씩 코로 훅 빨아들이면 몇 분 지나지 않아 곧바로 천사들과 함께 비행할 수 있다나? 넬슨이 전에 저 북쪽에서 프루, 멜러니와 행글라이딩을 즐길 때 히피들과 어울려 시작했을걸?

  이게 문제다. 넬슨의 코카인 중독. 그리고 조금 지나면 이젠 비싸디비싼 크랙으로 진화해 엄청나게 돈이 들어간다. 아들 가족이 플로리다에 온 1988년말에는 얼추 1만5천 달러의 빚이 있는 걸로 보인다. 초급 과장 정도의 1년 연봉 수준이다. 그러다 1989년으로 넘어가 아빠 부시가 대통령을 하는 동안에 넬슨은 과감하게 크랙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대충 20만 달러 가까운 돈을 스프링어 모터스에서 빼돌리게 된다. 근데 스프링어 모터스가 누구 것? 그래, 엄마 거다. 외할아버지가 애초에 자기 손자인 넬슨이 대를 이어 경영하기 바랐던 사업체. 지금은 창업자 프레드 스프링어의 외동딸인 재니스 스프링어가 소유주로 있는데, 엄마가 아들을 감옥에 보내기가 있기, 없기? 프레드의 외동딸이 재니스, 재니스의 외동아들이 넬슨. 3대로 이어지는 내리사랑. 눈물이 앞을 가리겠지? 이 와중에 해리 앵스트롬의 복장만 남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심장 동맥에 카테터를 끼우고 풍선을 불어 관상동맥을 80퍼센트 넘게 막고 있는 혈전을 밀어내는 시술까지 받아야 하는데, 이 정도면 해리가 오래 살지 못하겠다는 걸 당연히 쉽게 짐작한다. 당연히, 그리고 쉽게? 같은 말 반복.


  해리 래빗은 아들, 자기가 보기엔 재니스와 외조부모 등 외갓집을 빼다 박은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하는 짓이 영락없이 젊은 시절의 해리 래빗 자신인 넬슨, 하는 짓마다 사고를 치며 가족 전부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고 마는 문제아 아들과 화해할 수 있을까? 하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제아 출신의 갱년기 심장병 환자 해리도 마지막으로 한 방, 결정적인 사고를 칠 예정이긴 하지만.

  하여간 자칭 스웨덴인 해럴드 C. 앵스트롬. 서민 출신이었다가 장가 잘 든 세미 부르주아 백인 미국인. 한 세상 잘 먹고 잘 살다가 한 세상 접은 이야기. 특히 4부는 1~3부까지의 앞선 독서가 없으면 읽으면서 스토리 이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라.

  토끼 4부작 가운데 2부 <돌아온 토끼>와 3부 <토끼는 부자다>에 비하면 순한 맛이다. 왜냐하면 토끼가 근 10년 단위로 나이가 듦에 따라 한창 시절인 2부보다는 3부가 순하고, 3부에 비하면 4부의 해리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그러니 순할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토끼 4부작의 주인공 해리슨 C. 앵스트롬은 끝까지 기본적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어쩌면 성적 대상으로만 본다고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 물론 죽기 전의 토끼가 그에 대한 변명을 빠뜨리지 않기는 해도, 변명이 독자를 납득시킨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이 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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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12-30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별은 조금 과하다. 그렇다고 4별은 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