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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토럴리아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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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살아 있는 작가 가운데 미국에서 단편소설을 제일 잘 쓴다는 조지 손더스. 나도 이이의 《12월 10일》을 흥미롭게 읽고 관심을 갖게 됐다. 제일 잘 쓴다는 표현에 동의하는지는 다음으로 하자. 이 책도 손더스의 소설집. 82쪽 분량의 표제작을 포함해 모두 여섯 편을 실었다. 이 가운데 분량이 제일 많은 <패스토럴리아>를 소개한다.
망해가는 가상의 테마파크. 화자 ‘나’와 재닛은 저 원시시절, 동굴에 사는 구석기 혈거인들로 분장해 정말로 동굴에서 산다. 관람객은 입장할 때 받은 팜플렛을 통해 산 중턱의 동굴에 혈거인들의 주거지가 있는 걸 확인하고 ‘나’와 재닛을 구경하러 올 수 있다. 작은 문제 하나는 동굴까지 오려면 그리 짧지는 않지만 현대 도시인한테는 조금 부담스러울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 안에 진짜 모닥불을 붙여 놨지만 그래도 어두컴컴한 굴 속에 머리부터 디밀어야 하는데 머리 하나 디밀어 보는 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거기까지 기어올라오느라 흘린 땀이 아까워 주로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드디어 동굴 안으로 입장하면 가죽 옷을 입은 ‘나’와 재닛이 원시인처럼 방문객은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언어로 소통하면서 동굴벽화를 그리고 있거나 자잘한 풀잎 씨앗 같은 것을 고르고 있어야 한다. 이들이 무엇을 물어보더라도 현대어로 대답하면 규칙 위반이다. 원시인 컨셉.
예를 들어 관람객이 “동굴에서 지내면 용변은 어떻게 보나요?”라고 물었는데 “일회용 봉투를 설치할 수 있는 (좌변기 비슷하게 생긴) 틀이 있어요.”라고 대답하면, 동굴에서 나간 다음 관람객 설문지에 “아, 원시인들이 영어를 알아듣고 영어로 대답을 하는군요!” 하는 응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규칙 위반. 테마파크가 장사가 잘 되면 별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어도 여차하면 일신상 불이익을 받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나’는 아내 루이자와 아들 넬슨을 둔 삼십대 유부남. 넬슨이 좀 아프다. 그래서 보수가 좋은 이 일을 계속해야 하고, 발이 크고 얼굴은 작게 쪼그라든 파트너 재닛은 쉰 살이 되었건만 사고뭉치 아들 브래들리 때문에, 사고를 쳐도 보통 사고를 쳐야지, 그걸 합의하고 보석금을 내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다. 재닛 역시 일자리를 잃을 수 없는 처지. 세상 사는 일이 피곤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해? <패스토럴리아>의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
테마파크의 사장 노드스트롬은 ‘나’와 재닛에게 적지 않은 급여를 주는 대신 철저하게 원시인으로 살기 원한다. 원시 동굴에는 관계자용 대형과 소형 출입구, 이렇게 두 개가 있는데, 식량도 대형 출입구에 염소 한 마리를 밀어 넣고, 소형 출입구로는 토끼나 닭 같은 작은 짐승의 사체를 공급한다. 그러면 ‘나’는 흑요석 재질의 석기시대 칼로 가죽 벗기는 일을 하고 재닛은 불을 피워 고기를 삶는다. 매일 염소를 먹으니 재닛은 군 염소가 이제 “너무 지겨워서 비명이라도 지르겠어!”라고 ‘나’에게 불평한다. ‘나’는 이렇게 재닛이 영어로 말하는 것이 불편하다. 규칙 위반이니까.
근데 오늘 아침엔 염소가 오지 않았다. 메모 한 장만 달랑 보냈다.
“버티시오. 버티시오. 염소는 올 테니까. 젠장, 너무 오만해지지 마시오.”
노드스트롬이 보낸 메모. 이래서 오늘 아침은 굶었다. 점심과 저녁은 ‘예비 크래커’를 씹고 버텼다. 커피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예비 크래커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얼른 먹어야 한다. 이 와중에 재닛이 불평한다.
“내일도 염소가 없으면 나는 여기서 나가 언덕을 내려갈 거야. 하느님한테 맹세해. 두고 봐.”
또 영어다. ‘나’는 불편하다. 말이 그렇지 내려가긴 뭘 내려가? 목구멍이 포도청인 걸. 훌륭하신 아드님 브래들리가 편하게 내버려두겠다.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오후. 유일한 통신 시설인 팩스로 ‘파트너 일일 평가 양식’이 도착한다.
태도상 곤란한 점이 눈에 띄는가? (답변: 띄지 않는다.)
나의 파트너를 전반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가? (답변: 아주 좋다.)
‘명상’이 필요한 ‘상황’이 있는가? (답변: 없다.)
‘나’는 좋은 게 좋다. 재닛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 비록 재닛이 함부로 영어를 쓰고 근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평가서를 쓸 수는 없다. 봉급쟁이들 다 그런 거지 뭐. 근데 위에서 말한 가족 관람객의 질문, 당신들이 눈 똥은 어떻게 처리하세요? 이걸 그 자리에서 영어로 대답한 재닛을 노드스트롬은 벌써 알고 있다. 설문지를 통해. 그래서였을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원시동굴의 출입구에는 염소는커녕 토끼나 닭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흠. 고객설문지, ‘고객 간단 평가’.
전반적 인상 (답변: 완벽해! 아주 좋아!)
학습가치 (답변: 그들이 어디서 응가를 하는지 배웠다. 옛날이나 지금 모두.)
지금 ‘나’와 재닛의 가장 큰 골치는 “아무도 고개를 디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반적인 테마파크의 불황. 이 가운데서도 산 중턱까지 올라와 배우가 분장하고 있을 것이 뻔한 원시 혈거인을 구경할 정성이 없다는 점. 하긴, 이들보더 더 어려운 사람도 있기는 하다. 데이브 윌리. ‘지혜로운 산의 현자’ 역할. 이이는 끝장이 나버렸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관람객이 관람을 안 하려 한다. 이렇게 외딴 지역에 있는 사람이 끝장나면, 테마파크 근무자들만 이용하는 비관람객 전용 길에 이동주택을 가져다 가게를 차린 마티의 상점 역시 언젠가는 끝장이 날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대형 출입구에 염소가 한 마리, 소형 출입구에 토끼 한 마리가 왔다. 더불어 ‘배급’ 관련 메모도 한 장. 추가 식량인 토끼는 우리(테마파크)의 존중을 보여주는 표시로 보낸다. 그러나 결핍과 도전의 시기를 맞아 직원재배치 문제를 정리할 때가 왔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없어져야 한다. 그나마 좋은 건 누군가는 계속 있을 것이라는 점. 그것이 당신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니 제공하는 특식을 즐기고, 걱정하지 말고, 감독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연락이 오지 않으면 바람이 당신의 문간을 지나간 것이라나?
원래 딱 이럴 때 집에서도 문제가 생기는 법. 이른바 엎어치고 메침을 당하는 게 주인공들의 팔자거든. 외우내환, 불행은 한 번에 하나만 오지 않는다. 뭐 이런 거. 원래 몸이 좋지 않았던 ‘나’의 아들 넬슨은 이제 병원에 입원해 더 확실한 검사를 받고, 가능하다면 입원 치료를 해야 하고, 주책없이 현대 영어를 쏟아내다가 노드스트롬의 메모가 도착한 다음에 다시 웅얼웅얼거리는 원시언어를 사용하더니, 염병이나 하라는 심정으로 또다시 현대영어를 쓰기 시작한 재닛의 아들 브래들리는 직접 관람객의 자격으로 엄마의 직장까지 쳐들어와 자기가 사고를 쳐서 해결해야 하니 돈 좀 주십쇼, 해서,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로 떨어졌다. 이날 오후, 다시 도착한 파트너 일일 평가 양식. 이미 노드스트롬은 팩스 통신을 통해 ‘나’가 재닛에게 엉뚱하다 할 만큼 후한 평가를 해온 것에 경고를 날린 바 있다. 어쩔까?
‘나’는 평가서에 이렇게 답한다.
태도상 곤란한 점이 눈에 띄는가? (답변: 띄지 않는다.)
나의 파트너를 전반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가? (답변: 아주 좋다.)
‘명상’이 필요한 ‘상황’이 있는가? (답변: 없다.)
근데 언제까지? 과연 언제까지 재닛에 대하여 좋은 평가만 할 수 있을까? 노드스트롬의 연락이 ‘나’의 문간 앞에 머물러 주춤거릴 때까지? 지나간 다음까지? 연락이 그냥 문간을 지나가준대? 이것 참, 피할 수 없는 현대 봉급쟁이의 딜레마이긴 하지만. 어쩌면 인간이 동굴 속에서 벽화를 그리고 풀잎에서 씨앗을 고를 때가 제일 행복했을 수도 있다. 기껏 살아야 서른다섯까지 살았지만 복장 하나는 편했을 거 아니냐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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