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여자의 세상 - 스즈키 이즈미 프리미엄 컬렉션
스즈키 이즈미 지음, 최혜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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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스즈키 이즈미에 관해서 대략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책 뒤에 실린 ‘작가연보’를 바탕으로 보자.

  1949년 시즈오카현에서 요미우리 기자이며 태평양 전쟁당시 미얀마 종군기자였던 스즈키 에이지의 딸로 태어났다. 현립 이토고교에 다닐 때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졸업후에는 이토시청에서 근무하며 동인활동으로 소설을 발표했다.

  1969년 스무살에 도쿄로 와서 모델, 바의 호스티스를 거쳐 성인영화계에 들어가는 한편 소설 작품이 소설현대 신인상에 응모해 총 756편 가운데 최종 후보 8편에 오른다. <처녀의 장난> <눈 뜸> <매춘폭행백서> <여성성장기> <절묘한 여자> <정염∙여인도> <이유 없는 폭행> <돈의 노예> 등의 성인영화에 본명 또는 가명으로 출연한다. 연극 <인력비행기 솔로몬> 공연에도 출연하는 한편 잡지 《11PM》 등에 누드 사진을 싣는다.

  자신이 쓴 희곡 <어떤 예감>이 실제 공연된다. 스즈키 이즈미 역시 다른 연극에 출연하고 낭시 국제연극제에 동행해 파리, 암스테르담에 체재한다.

  1973년에는 재즈 뮤지션 아베 가오루와 만나 약혼하고 이듬해 아베와 동거 중 크게 다투는 과정에서 왼쪽 새끼 발가락이 잘린 해프닝이 벌어진다는데, 이즈미의 수필에서 자신이 잘라 버렸다고 고백한다. 1976년에 장녀 아즈사를 낳았지만 아이의 아빠 아베 가오루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다음 해에 이혼한다. 1978년엔 전남편이자 딸의 친아빠인 아베 가오루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하고 1986년, 딸이 열 살일 때 스즈키 이즈미 역시 자기집 2층 침대에 팬티스타킹으로 목매달아 자살해버리니 이 때 나이가 36세 7개월이다.


  어떤 의미에서 스즈키 이즈미는 작가라기 보다 누드 모델, 성인영화 배우, 색소폰 연주자와 결혼과 이혼, 발가락 절단 소동, 자택에서 팬티스타킹으로 목매 자살 같은 색다른 에피소드로 이름이 높았을 거 같기도 하다. 이이는 1976년부터 82년까지 주로 SF 작품을 썼는데, 내가 읽어본 소감은 SF, 과학 픽션이라고 하기엔 좀 덜 과학적이라서 그냥 상상으로 외계인과 우주 같은 것이 나오는 공상소설로 보아야 마땅할 것 같다. 시대가 시대라서 페미니즘 작품도 들어 있을 것 같은데, 당시는 ‘우먼 리브woman lib’라는 말이 ‘페미니즘’에게 자리를 넘겨주던 과정이라 현대의 페미니스트가 생각하고 바라는 페미니즘 의식에 까지는 미치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표제작 <여자와 여자의 세상>이 어쨌거나 가장 페미니즘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품이다.

  세상에서 남자를 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인류는 원래 여자들에 의하여 경영되는 사회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가끔 남자가 눈에 띄기 시작했고 이들은 현생 인류와 다른 외모, 다른 성격, 다른 판단력을 지녀 세상을 끔찍하게 바꾸어 놓고 말았다. 사람이라면 생각하지 못할 기계장치, 서로가 서로를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장비를 만들어 서로 죽이면서 힘을 과시하기도 했고, 석유와 석탄을 과도하게 태워 지구를 엉망인 상태로 만들어 놓아 석유가 거의 고갈되어 지금은 거의 모든 에너지를 태양광에 의해 조달할 뿐이다. 밤이 오면 어둡고, TV 시정은 단 두 채널로 하루에 서너 시간씩 한정적으로 시청할 수 있다. 차를 타고 다니는 건 아주 특별한 경우인데, 항차 비행기는 어떻겠나. 외국에 다녀오는 사람이 생기면 신문과 TV에 출연해서 인터뷰까지 하는 세상이다. 일본만 그런 게 아니라 전 새계적으로 다 그렇다.

  이제 남자들은 거리에서 볼 수 없다. 만일 거리에 남자라는 아종 인류를 발견하면 즉시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그러면 당국은 남자를 체포해 지하에 넓게 만들어 놓은 특수 거주구역, 일종의 게토로 보내 그들끼리 생활하게 만든다. 여자가 남자를 볼 수 있는 건 고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딱 한 번 거주구 관찰학습 기회가 딱 한 번 주어진다. 그곳의 남자들은 백이면 백 다 위축된 자세, 특이한 냄새, 기이한 골격, 판판한 가슴, 좁은 엉덩이를 가진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전혀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이 여자와 여자의 세상에도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한다. 당연히 여자끼리 하는 거다. 만일 어떻게 남자가 하나 있어서 여자 부부가 하는 일을 남자하고 같이 하면, 재수없어서 부자연스러운 임신, 즉 태내수정을 하기도 하는데, 이게 발각나면? 여자는 평생 교도소 같은 곳에 감금된다. 자연스러운 임신이란 여자끼리 결혼해서 정상적인 성생활을 즐기다가,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생길 때 손잡고 병원에 가야 한다. 그러면 국가가 알아서 ‘네코’의 자궁에 아주 작은 올챙이 한 마리를 착상시켜준다.

  ‘네코’는 여성의 생식기를 일컫는 pussycat에서 유래한 바텀역, ‘다치’는 큰칼 대도大刀에서 유래한 탑 역할의 여성을 뜻한다.

  여기까지는 게르드 브란튼베르크가 쓴 <이갈리아의 딸들>과 유사한 면이 많다. 사실 스즈키 이즈미의 활동시기가 브란튼베르크가 <이갈리아의 딸들>을 발표해 영국과 미국에서 영어판이 나온 시기와 겹친다.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고 힌트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작은 체구와 소극적 태도, 수치스러운 생식기 보호대 착용 등으로 주피터/제우스 시절 이후 지속한 가부장 제도 하의 여성의 역할을 남성이 대신 맡은 플롯과는 조금 다르다. 스즈키 이즈미는 남성 종을 아예 눈에 띄지 않는 지하실에 콱 박아 놓고 여성끼리만 살게 한다.


  그런데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레이의 창문 아래로 새벽 네 시쯤에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며칠 간격으로 지나가는 것을 발견한다. 레이는 계속 관찰을 하고, 그와 소통을 위하여 도자기 인형에 끈을 묶고 짧은 글을 써 그가 볼 수 있게 2층에서 인형을 내려뜨린다. 이렇게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만나기 시작한다. 레이가 그를 만났다. 히로. 남자다. 게토 안에서와 달리 히로의 몸에서 나쁘거나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게토의 남자들은 늘 같은 환경과 일과 동족끼리만 살고 있어서 몸에서 냄새가 나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쓰지 않아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반면, 이 히로라는 남자는 전혀 그런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여자만큼은 아니지만 가슴이 불룩, 그러나 지방질 대신 단단한 근육이 튀어나왔고, 하여간 뭔지 모르겠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비틀고 싶게 만드는 충동을 심어준다.

  지남철의 N극과 S극이 만났으니 어찌 찰싹 달라붙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들은 히로가 숨어 지내는 옛 시절의 공장건물, 커다란 공장에 뒤에 있어 전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숙소로 오전에 들어가 땅거미가 질 때까지 하루종일 서로의 액체를 교환한다. 아프게 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감각. 이게 뭘까? 오후로 접어드니 좀 덜 아프고 훨씬 많이 좋아지는 느낌. 간질간질한 통증 비슷한 거.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것만 하고 잔뜩 지쳐 집에 오는 모습을 본 할머니가 단번에 눈치를 챘다. 할머니 젊은 시절에는 레이가 한 것 같은 걸 해본 사람이 무척 많았거든.

  할머니가 레이에게 말한다. 너는 병원에서 만든 아이가 아니야. 네 엄마가 오늘 네가 한 것처럼 남자를 만나 체내수정을 해 낳은 딸이 너다. 엄마는 병원에서 시술확인서를 얻지 못해 너를 낳고 곧바로 수감되어 아직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너마저 그런 신세가 되게 할 수 없다. 레이는 내가 신고했다. 오늘밤이나 내일 새벽에는 게토로 들어가겠지.

  레이는,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그냥 그렇게 알아듣고 작품이 끝난다.

  SF는 확실히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1970년대 후반에 이걸 SF가 아니라고 할 수 없었을 것 같기도 한 진퇴양난. 그런데 확실히 페미니즘 문학은 아니거나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 거 같다.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의 색다른 작품이니 읽어볼 만하긴 한데, 굳이 권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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