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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공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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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시그리드 누네즈의 책을 세 권 읽는다. 우연히 그렇게 됐다.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내 눈에 자주 뜨인 작가. 누네즈는 이 정도면 됐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화자 ‘나’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보내는 긴 편지. 당신은 죽었다. 병에 걸린 것도, 사고가 나서 비명에 간 것도 아니다. 아마도 테뉴어일 터이고 아직도 생활비가 필요할 텐데 당신은 자살해 버렸다. 그래. 평소 당신 생각에 의하면 노인의 자살은 합리적인 결정일 수도 있지. 완벽한 선택이자 최선의 해결책일 수도 있고. 그래서 그냥 죽어버린 거라고? 뭐 어쨌든.
하여간 평소에 원했던 대로 당신의 몸은 불살라버렸고, 장례식도 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조문객 접대 행사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아쉬워 아주 약식으로, 크지 않지만 비싸고 부티나는 한 식당에 당신과 결혼생활을 했던 세 여자와 30년의 우정을 쌓은 ‘나’, 이렇게 네 여자만 조촐하게 당신의 생을 추모하는 모임을 마련했다. 다양하게 수다를 떤 것이지.
당신의 첫번째 아내, 둘째 아내, 셋째 아내를 일일이 그렇게 부르기 귀찮으니까 그냥 1번, 2번, 3번이라고 하면, ‘나’는 뭐라 부르지? ‘나’가 ‘나’를 부르는 거니까 그냥 ‘나’라고 하면 될 거 같군.
1번은 ‘나’처럼 당신이 학과의 최연소 교수일 때 ‘나’와 함께 당신의 수업을 들은 이를 테면 제자였지. 당시에 당신은 학과의 재원이자 로미오였던 시절이어서 많은 여학생이 당신한테 홀딱 반해 있었고, 솔직히 ‘나’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이었어. 그러다가 내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학기가 끝나자 당신은 ‘나’더러 한 번 자자고 했지. 나도 마음은 굴뚝이었는데 어떻게 말을 하다 보니 “둘이 친구 이상 되려는 것은 실수”라고 해버렸어. 당신은 아마 조금의 굴욕감을 느꼈던 것 같아. 하여간 그때 이후로 나이 차이는 좀 있지만 당신하고 ‘나’는 이날 이때까지 좋은 친구, 요즘 동태평양에 있는 사우스코리아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에 의하면 ‘사람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게 된 거야.
당신은 나 말고도 학생이었던 1번을 유혹했고 급기야 자빠뜨리는 데 성공했어. 그러고도 우리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지. 속으로야 모르겠지만 하여간 겉으로는 애정으로 변질되지 않은 채로 말이지. 당신이 자살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에서 살던 1번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으려 했는데 1번부터 3번까지 그리고 ‘나’가 ‘조촐한 추도식’이란 명목으로 한 번 뭉치자는 제안을 듣고 비행기 타고 왔으니 정성이 갸륵하기는 해. 1번은 부정할 수 없이 진실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했어. 서로 그랬다고 봐. 그러나 이런 첫 결혼을 깨뜨린 건 당신 쪽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던 거 아냐? 이후 당신은 아마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1번을 사랑했고, 미안해 했고, 용서를 바랐을 지도 몰라.
사실 당신의 세 아내 다 ‘나’를 탐탁하게 여기기야 했겠어? 뭔가 좀 찜찜했겠지. 1번이야 학교를 같이 다녀서 좀 덜했고, 3번은 자신이 찜찜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더 찜찜했을 사람이니 그렇다고 치고, 2번이 문제였던 걸로 아는데? 자신 앞에서 어떤 여자를 입에 올리더라도 히스테리를 부렸다며? ‘나’와 과거의 모든 여자들과 완전한 단절을 요구했다고 했잖아. 특히 우리 사이를 의심해 안달복달하고. 나한테는 직접 당신하고 ‘나’의 사이가 근친상간 관계인 거냐고 비꼬기도 하더군.
당신은 2번과의 사이에서 나온 외동딸하고 소원한 관계였어. 부녀가 그렇게 되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지. 이 딸이 엄마보다 오히려 당신의 여자관계와 외도를 더 용서하지 않았지. 그것도 질투고 일종의 편집증이지.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잘못된 방식으로의 사랑이었던 거라고 봐.
우리, 그러니까 당신과 ‘나’가 가장 가까웠던 짧은 시간은 당신의 이혼과 재혼 사이의 기간이었어.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당신한테는 연인이 없던 적도 거의 없었지. 늘 주위에 여자가 있었으니까. 당신 한테 애인이 생겼을 때 솔직히 ‘나’는 좀 상심했고, 누군가와 결별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밀려드는 기쁨을 속으로 숨기기에 바빴지. 좋아하지 마. 옆집 잘생긴 총각이 장가든다면 괜히 속상한 거하고 비슷한 기분이었을 뿐이니까. 음, 뭐 그것보다는 조금 더 심각했달까? 좋아, 훨씬 더 진지하게 그랬을 거야.
3번은 스카프 묶는 법을 쉰 가지나 아는 부류의 여성이야. 예순 살로 보이지만 그 나이의 느긋한 매력을 지녀서 척 보기에도 근사해. 당신의 시신을 발견한 아내야. 혹시 모를까봐 얘기해주는 거야. 그런데 시신을 발견하고 당국에 신고하고, 화장 처리를 하고, 재를 나무 상자에 담아 직접 묻은 여자가, 가장 멋져 보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모습으로 나왔어. 아, 지금 못마땅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경외감을 느껴서 그런 거야.
경영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맨해튼의 한 회사에서 계속 경영 컨설턴트로 커리어를 쌓은 인재 중에서도 인재잖아. 그러면서 명색이 작가이자 교수인 나보다 더 많은 독서량을 유지하고 있는 인텔리이고. 모르긴 해도 연봉도 당신의 두 배는 됐을 걸?
3번 말에 의하면 당신의 건강상태가 아주 양호했다며. 심장과 근육은 실제 나이보다 월등하게 젊은 상태를 유지했고. 3번은 당신이 강의를 중단한 것이 실수였을 것이라고 하네. 그동안 강의가 당신의 삶을 체계적으로 만들어 주었다면서. 그러게 왜 여학생들 한테 Dear라고 불렀어? 사전에야 이 말이 “어린 사람을 사랑스럽게 부르는 호칭”이지 대학에 다니는 성인여성woman한테 Dear라고 부르는 시절은 벌써 끝장난 걸 몰랐나? 당신이 이 호칭을 매력적이라고 여긴 건 알지만, 이제 그 단어는 명백하게 여학생들의 품위손상 단어로 격하됐다고. 부적절한 단어라서 학생이 항의를 하면 즉각 사과하고 사용을 그만두어야 했을 것을. 여학생 전원이 서명을 한 항의 서한을 받고 그냥 사직서를 내버리고 만 거야?
이젠 존 쿳시나 필립 로스의 주인공들처럼 교수가 학생들과 한 번 자볼 생각을 하는 건 물론이고 수업 중에 섹스에 관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언급도 하면 안 되는 시절이 온 거야. 소위 ‘합평’을 해도 남학생들은 자기 작품 속에 성적인 장면은 스스로 삭제하고 동료들에게 건넨다는 거야. 이런 시절이 도래했거늘 예전 자기 시절만 생각해서 그대로 수업을 진행한 건 당연히 실수였지. 당신은 이런 금기가 수업을 쪼그라들게 만든다고 생각할 수 있고 ‘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그래도 뭐 시절이 그런 걸.
근데, 설마 이 일 때문에 죽은 건 아니지? 그럴 수 있겠지만.
문제는 당신이 3번하고 살 때, 이른 아침에 뛰러 나갔다가 무지하게 큰 개 한 마리를 데려온 거였어. 그레이트데인 순종. 그러나 유기견. 어깨부터 발까지 86cm, 체중은 82kg. 이게 개야, 털 난 공룡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순한 품종이고 잘 훈련을 받았으며 중성화수술을 받아 함부로 껄떡대지 않는다는 거였어. 3번은 이렇게 큰 개를 키울 자신이 없었지만 당신의 주장을 꺾기엔 너무 느긋한 매력을 자랑하는 잘 교육받은 사람이었지.
근데 당신이 죽어버린 거야. 누군가 키우다 너무 거대한 덩치 때문이었는지, 무한정 먹어 치우는 사료값 때문이었는지, 개를 키우지 못하는 장소로 이사해야 하는 환경 때문이었는지 하여간 버려진 늙은 유기견을 도무지 3번도 키울 자신이 없었지. 그걸 이제 3번 혼자 키우라고 죽어버린 거야? 3번은, 그 점잖고, 품위있고, 학식 높고, 연봉도 많이 받는 3번이 ‘나’의 손을 간곡하게 잡더니 제발 며칠 만이라도 그레이트데인, 당신이 이름을 아폴로라고 지은 덩치가 산 만한 늙은 개를 보살펴달라고 부탁을 하는 거야. 자신도 이미 나이가 들어 이제는 남은 인생을 여행 같은 걸로 즐기고 싶다고. 어떤 정도냐 하면, 당신이 죽고 단 며칠 만에 결국 견디지 못해 지금 아폴로는 비싸디 비싼 개호텔에 머물고 있다나?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열다섯 평짜리, 미국이니까 물론 50제곱미터라고 얘기해야겠지, 아파트는 주인이 절대 개를 키우지 못하게 하고, 좁아 터져서 어깨까지 86cm, 몸무게 82kg의 늙은 거구와 함께 누울 자리도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지.
그래, 그래. 결국 삶이 겨우 2년가량밖에 남지 않은 아폴로와 살게 됐어. 이 아폴로가 책 제목 <친구>야. 함께 산책을 해도 보도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거구. 변을 보려면 꼭 도로 쪽으로 엉덩이를 내밀어 차에 치일까봐 ‘나’가 도로로 나가 차와 아폴로 사이에 서 있어야 하며, 사람의 것보다 훨씬 푸짐하게 싸 놓은 변을 치울 때마다 지나던 사람들이 유심히,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는 재수없게 쳐다보는 것에도 익숙해졌어. 근데 ‘나’나 재수없는 것이지, 올해 10월 중순에 가을 장마가 오지게 오니까 이 독후감 쓰는 중늙은이는 올해 농사 걱정은 하지도 않고 보도에 묻어 있는 개똥 찌꺼기가 깨끗해지겠다고 좋아하더라니까? 개 키우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거 걱정하지 않지. 깨끗하게 치워졌는지 확인도 하지 않아. 그러면서도 개 싫어하는 인간들을 무지 싫어해.
근데 역시 뉴요커. ‘나’ 사는 동네 사람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전부 아폴로를 좋아하고, 그래서 만져보고, 늙어가는 걸 걱정해주고, 심지어 안아보기도 한다니까? 역시 뉴욕은 천사들만 사는 곳인가봐, 그렇지? 모든 뉴요커가 다 천사는 아니라고?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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